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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야광인月夜狂人 - 루쉰, 전사의 글쓰기 #1
기픈옹달 / 2018-10-15 / 조회 512 

본문

* 몇몇 친구들과 '루쉰, 전사의 글스기'라는 이름으로 글쓰기 워크샵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 쓴 글을 나눕니다.

* 브런치에도 올려두었어요. 이쪽이 가독성이 더 좋을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zziraci/151

 

“빛이 있으라”

 

저들의 경전에 따르면 이것이 최초의 말이라 한다. 신이 어떻게 말을 배웠는지는 모르나, 이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하니 틀림없이 이것이 첫 번째 말이었을 테다. 기록에 따르면 신은 이후에도 몇 마디를 더 하고, 나중에는 꽤 수다스러웠다고 한다. 여튼 처음에 ‘빛이 있으라’라고 말한 바람에 세상 어디에나 빛이 있게 되었다. 이후에는 점차 작은 것을 말했다. 따라서 빛을 꽤 중요하게 여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허나 오늘날이었다면 좀 다르게 말했을 게 분명하다. 조물주보다 건물주라니, ‘건물이 있으라!’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하늘이나 바다 따위는 접어두고 먼저 ‘땅이 있으라’라고 말했을지 모를 일이다. 바다나 하늘이 없는 세상이야 어떻게든 돌아가겠지만 토지와 건물이 없는 세계는 상상하기 힘들지 않나. 

 

기왕의 상상을 더 붙이면, 밤은 짧게 낮은 길게 만들었어야 했다. 자는 시간을 줄이고 일하는 시간을 늘릴 수 있도록. 더불어 한 시간의 길이는 늘이고, 한 달의 길이는 더 줄여야 한다. 같은 돈을 주고 더 많이 일을 시킬뿐더러, 월세는 더 빨리 받아낼 수 있을 테니. 분명 한 시간이 60분, 8시간의 수면시간, 한 달이 30일이라는 사실이 못마땅한 사람이 있을 테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을지 모르니 두 손 모아 기도해보는 게 어떨까?

 

사람들은 저것이 ‘태초’ 그러니까 첫 시작이라고 한다.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그 이전이 있고, 말이 있으면 침묵이 있으며,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지 못한다. 이렇게 보면 시작보다 더 힘이 센 것은 ‘이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있음’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음’, 혹은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모르는 그 무엇이라 해야 한다. 그래서 저 전능한 신도 어둠, 흑암을 몰아내더라도 하루의 반절은 넘지 못했다.

 

이렇게 조물주의 능력이란 그리 대단할 것이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은 옛 철학자의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옛 철학자는 사람들이 동굴에 갇혀 있다며, 자신이 그들에게 빛을 소개해주는 사람이라 자처했다. 헌데 별 인기가 없었는지 사람들이 그를 싫어하는 것은 물론 죽이려 했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이 빛을 소개하는 사람이 되기를 선망했다. 이 빛은 지식이기도 하고, 진리이기도 하며, 누군가에게는 믿음직스러운 교의이기도 했다. 어쨌든 역사 속에서 ‘빛의 사자’를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횃불을 들고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기를 자처한 사람도 있었고, 대낮인데도 밤인 줄 알고 자고 있다며 사람들을 흔들어 깨우려는 사람도 있었다.

 

20세기 초를 살았던 루쉰도 언뜻 보면 저들과 비슷해 보인다. 그의 청년 시절은 계몽의 전사가 되기 위한 과정이라 보아도 좋다. 그는 스스로 앞장서 서양지식을 습득했다. 사람들은 서양 귀신에 영혼을 팔아넘긴다며 손가락질했지만. 해군 학교에 들어가 몇 길이 되는 까마득히 높은 돛대에 오르기도 했고, 철도학교에 들어가 빛도 들어오지 않는 깊은 땅 속으로 들어가 보기도 했다. 말 그대로 오르락내리락 고생했건만 어찌 된 영문인지 별 길을 찾지 못했다. 그가 <방황>이라는 제목의 소설집에 옛 시인 굴원의 글을 붙인 것은 이런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길은 까마득히 아득하고 먼데,

나는 오르내리며 찾아 구하고자 하네. 

路曼曼其脩遠兮

吾將上下而求索

: <방황>, 루쉰전집, 그린비.

<방황>이라는 제목처럼 그는 해군이 되지도 못했고, 기관사가 되지도 못했다. 그는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의학을 배운다. 의술이야 말로 근대인의 무기 인터, 빛의 사자가 되기에 한걸음 더 가깝게 되었을 텐데 그는 그마저도 끝내지 못한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문예 운동에 투신하기로 마음먹는다. 

 

<외침>의 서문에서 그는 이 여정을 제법 상세히 서술한다. 좋게 보면 방황이라기보다는 계단을 올라간 것이라 할 법하다. 무기를 익혀 힘을 배우는 것, 광물을 캐 부를 얻는 것, 의술을 배워 병을 고치는 것에서 나아가 문예 운동으로 사람의 정신을 깨치겠다 마음먹었으니 말이다. 점점 고상함에 가까워졌다고 해야겠다. 그러나 그가 꿈꾸었던 대로 일이 돌아가지는 않았다. 거창한 꿈을 안고 <신생新生>이라는 이름의 잡지를 내려했으나 시작도 못하고 일이 어그러지고 말았다. 

 

<신생>은 태어나지도 못했다. 헌데, 이후 루쉰전집의 첫 번째 권에는 <무덤(墳)>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신생>의 그 자리를 <무덤>이 대신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점이다.

 

그는 이후 무료와 적막을 느끼게 되었다 말한다. 영혼을 마취시킨 채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고. 무릇 빛을 전해주려면, 비분강개가 있어야 할터인데 그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약하고 가난하며, 병들고 우둔한 사람들을 보고 그의 마취된 영혼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외침> 서문에서는 ‘철의 방’ 비유를 통해 당시 루쉰이 맞닿은 시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창문도 없고, 부술 수 없는 철의 방을 어떻게 해야 할까? 

 

“가령 말일세, 쇠로 만든 방이 하나 있다고 하세, 창문이라곤 없고 절대 부술 수도 없어. 그 안엔 수많은 사람이 깊은 잠에 빠져 있어. 머지 않아 숨이 막혀 죽겠지. 허나 혼수상태에서 죽는 것이니 죽음의 비애 같은 건 느끼지 못할 거야. 그런데 지금 자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의식이 붙어 있는 몇몇이라도 깨운다고 하세. 그러면 이 불행한 몇몇에게 가망 없는 임종의 고통을 주는 게 되는데, 자넨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겠나?”

“그래도 기왕 몇몇이라도 깨어났다면 철방을 부술 희망이 절대 없다고 할 수야 없겠지.”

: <외침> 서문, 루쉰전집, 그린비.

그렇다 희망은 미래 소관인 바 절대 없다는 주장으로 희망을 말살할 수는 없는 법. 결국 그는 ‘글이란 걸 한번 써보겠노라 대답했다.’ 이렇게 <광인일기>라는 작품이 쓰였다. 동시에 루쉰은 이 작품을 통해 이른바 문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1936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18년간 문단의 중심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 중심에서 그는 수많은 사람들과 논쟁을 벌였고 다투었으며 손가락질받았다. 

 

따라서 18년간 수많은 글을 써내었지만, <외침>의 서문에서 밝힌 그의 질문이야 말로 루쉰 글쓰기의 첫 시작이자, 그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철의 방을 부수기 위해, 사람을 하나 둘 깨웠다. 수많은 논쟁은 계몽을 위한 선언 이리라. 결국 그는 이후 마오쩌둥에 의해 성인으로 추앙받는다. 마오에게 루쉰은 혁명의 전사였다. 그렇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는 명령이 있었다면, 혁명의 불이 활활 타오르기 앞서 불꽃같은 루쉰의 글이 있었다. 

 

허나 이와 같은 해석은 루쉰의 글을 일부만 설명한다. 그의 글에 담겨 있는 귀기鬼氣를 읽어내지 못한다. 어째서 그가 처음 세상에 내어놓은 것이 광인이란 말인가. 대관절 <광인일기>에 그려진 광인의 초상이 철방과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광인일기>를 읽어보면 그 누구의 손에 횃불을 쥐어 주어야 할지 알 수 없다. 그러니 불같은 혁명이란 더욱 멀고 요원할 뿐이다.

 

낡은 해석에서 벗어나 루쉰을 만나자. 저 옛날 철학자가 동굴 속 사람을 일깨우고 그들을 꺼내려했던 것처럼, 루쉰도 철의 방을 깨뜨리고 사람을 구하려 했다고 생각하지 말자. 결정적으로 그는 철방의 바깥을 경험하지 못했다. 옛 철학자는 동굴 바깥, 태양 아래 모든 것이 제 모습을 드러낸 참된 세상을 보고 왔다 자처했다. 지식의 특권은 진리를 독점하는 데서 나온다. 오직 신만이 빛을 줄 수 있는 것처럼. 허나 루쉰이 말한 철방의 바깥은 무엇인가? 그는 그 바깥, 희망의 세계에 대해 침묵한다. 설사 철방을 깨뜨린다 한들, 얄궂은 인간의 운명은 결국 죽음을 맞을 뿐이다. 따라서 그의 질문은, 그의 고심은 희망이냐 절망이냐, 철방을 부술 수 있느냐 여부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죽음을 입에 올린 이상 선택지는 셋 뿐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철방에서 죽거나, 철방이 선사하는 절망의 비애를 안고 죽거나. 아니면 철방을 깨고 나와 알 수 없는 죽음을 맞거나. 루쉰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종착역이다. 

 

거칠게 말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잠이나, 철방 속의 비애나, 알 수 없는 죽음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옛 철학자는 세계에 대한 명료한 지식이 다른 삶을 선물해 줄 것이라 믿었지만 루쉰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꿈에서 깨어나도 어둠은 가시지 않으며, 여전히 죽음의 그림자는 지워지지 않는다. 

 

그림자. 이처럼 절실한 문제를 잘 설명하는 것이 있을까. 그 누구도 그림자를 떼어낼 수 없는 것처럼, 그는 저 허망한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희망을 말살할 수는 없었지만 동시에 그가 말한 ‘절대 없다는 주장’, 절망 역시 지울 수 없었다. 절망도 희망도 겹쳐있다. 그는 양자택일을 거부한다.

 

그가 <외침>이라 제목을 붙인 것도 주의 깊이 보아야 한다. 그는 일찍이 비애와 허무, 적막을 느꼈다고 말한다. 언뜻 보면 그가 말하는 <외침>이란 적막을 깨뜨리는 커다란 소리처럼 보인다. 허나 그의 글은 그렇게 당당하지도 않을뿐더러 사람을 구름처럼 몰려들게 하는 그런 뚜렷한 방향과 목소리를 담고 있지도 않다. 굳이 말하자면 ‘적막을 외침’이라 해야 할까. 그가 ‘외침’이라 말한 것은 그만큼 적막이 깊다는 반증이다. 미세한 외침으로도 적막을 깨뜨릴 수 있으나, 어떤 외침으로도 깨뜨릴 수 없는 적막도 있는 법이다. 외침에도 묻어 나오는 적막도 있다. 

 

여전히 피조물의 자리에서 천상의 신이 명령하기만을 기다린다면, 촛불이든 등불이든 횃불이든 치켜들고 제 그림자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철학자의 입에 귀를 대고 그의 말씀을 흘려듣기만 바란다면 결코 그 적막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는 들을 수 없는 소리가 있다는 것을, 볼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우상으로도 감출 수 없는, 온몸을 칭칭 동여맨 악귀 같은 현실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어째서 그래야 하는가? 그것은 현실을 현실로 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땅을 사는 사람들만이 이 땅의 문제를 풀 수 있다. 고명한 말은 고명한 사람들의 것이다. 천상의 누구도, 어떤 지혜로운 자도 이 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지난 날을 앙모하는 자, 지난날로 돌아가라! 세상을 벗어나고 싶은 자, 어서 세상에서 벗어나라! 하늘에 오르고 싶은 자, 얼른 하늘로 올라가라! 영혼이 육체를 떠나려 하는자. 서둘러 떠나라! 현재의 지상에는 현재에 집착하고 지상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살아야 한다.

(…)

우리는 신음과 탄식, 흐느낌, 애걸을 들어도 놀랄 필요가 없다. 독하고 매서운 침묵을 보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인가 독사처럼 주검의 숲속을 꿈틀꿈틀 기어다니고 원귀처럼 어둠 속을 내달리는 게 보이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참된 분노’가 곧 다가오리라는 것을 예고하고 있다. 그때가 되면, 지난날을 앙모하는 자는 지난날로 돌아가고, 세상을 벗어나고 싶은 자는 세상을 벗어나며, 하늘에 오르고 싶은 자는 하늘로 오르고, 영혼이 육체를 떠나려는 자는 떠나야 한다! ......

: <화개집> 잡감, 루쉰전집, 그린비.

루쉰이 말하는 세계는 완전하지도 않을뿐더러 무엇이 결여되어 있지도 않다. 그저 세계는 본디 문제 덩어리이다. <광인일기>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이 땅의 역사는 누군가를 집어삼켜 잡아먹은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 죄에서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그가 그리는 세계엔 둘 밖에 없다. 짐승이거나 광인이거나. <광인일기>에서는 식인의 역사를 읽어낸, 피해망상증에 걸린 광인이 등장한다. <약>에서는 보다 분명하게 이 광인을 그려낸다. 

 

<약>은 청말 여성 혁명가 추진秋瑾의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는 청나라를 무너뜨리는 봉기를 일으키고자 했다. 그러나 혁명은 실패로 돌아가고 그는 처형당한다. 오늘날 남아 있는 그의 사진, 한 손에 칼을 쥔 사진은 그의 매서운 삶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를 본뜬 <약>의 주인공 샤위夏瑜는--이름부터 그는 추근을 닮았다. --‘대청제국 천하가 우리 모두 거라’ 말한다. 그러나 그의 말은 미친 소리로 취급받는다. 더욱 끔찍한 것은 사람의 피가 폐병에 좋다는 이유로, 형장에서 그의 피를 찍은 찐빵이 거래된다는 점이다. <광인일기>에서는 사천 년의 이력을 지녔다고 말했지만, <약>에서는 바로 오늘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추악함을 깨닫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이는 또 다른 자각을 통해 가능하다. 참과 거짓이 완벽하게 나뉘어 있지 않은 이 세계에서는  그 깨우침이 좀 다른 식으로 찾아온다. 

 

오늘밤 달빛이 참 좋다. 

내가 달을 못 본지도 벌써 30여년 오늘 보니 정신이 번쩍 든다. 그러고 보니 지난 30여 년이 온통 미몽 속을 헤매었던 게다. 

: <외침> 광인일기, 루쉰전집, 그린비. 

달빛 아래 정신이 번쩍 들었다는 게 무엇을 말하는지는 이야기하기 힘들다. 적어도 그것은 위에서 이야기한, 태양이 선사하는 명료한 지식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늑대촌, 개와 승냥이, 하이에나 같은 이들이 우글거리는 마을에서 광인의 초상을 꺼내 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가 기대하는 인간은 철인哲人도 초인超人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영웅英雄도 군자君子도 아니다. 달빛, 희미한 인식이 선사하는 어떤 감각이 있다.

 

따라서 쨍쨍 내리쬐는 태양 아래가 아니라, 벌건 대낮이 아니라 밤이 중요하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이 시간이야 말로 세계가 본모습을 드러내는 시간이다. 아니, 희뿌연 달빛에 비친 그 모습만이 있을 뿐, 어디 따로 본래면목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허위만이 진실이다. 진실만을 알았다면 철인이겠지만, 허위가 진실임을 알았으므로 광인이 되었다.

 

S회관에는 세 칸 방이 있었다. 전하는 얘기로는 마당의 홰나무에 한 여인이 목을 매고 죽었다 했다. 지금 그 나무는 올라갈 수 없을 정도로 자랐지만 그 방엔 아직도 사람이 살지 않는다. 몇 년간 나는 그 방에서 옛 비문을 베끼고 있었다. 내방객도 드물고 비문 속에서 무슨 문제니 주의니 하는 것을 만날 일도 없었다. 이런 식으로 내 생명이 어물쩍 소멸해갔다. 이 역시 내 유일한 바람이었다. 여름밤엔 모기가 극성이었다. 홰나무 아래 앉아 종려나무 부채를 부치며 무성한 잎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시퍼런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철 지난 배추벌레가 섬뜩하니 목덜미에 떨어지곤 했다. 

: <외침> 서문, 루쉰전집, 그린비.

<외침> 서문에서 루쉰은 철의 방에 얽힌 대화에 앞서 자신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보통은 사람이 죽은 방에 살지 않는다. 필시 거기에는 원한이 서려있을 것이며 그 원한이 해코지 할까 봐.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옛 비문을 베끼고 있었다. 사람이 죽은 곳에서, 죽은 사람의 글을 베끼는 것은 어째서 일까? 더구나 이를 자신의 글쓰기와 연관 지어 말하는 것은 어떤 까닭인가.

 

태초의 말은 명령이었다 한다. 누가 그 명령을 수행했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말대로 되었다 한다. 그렇게 말은 현실을 바꾸는 힘이 있다. 그렇기에 오늘도 수많은 사람이 지식을 숭상하고, 새로운 삶을 얻고자 달려드는 것일 테다. 신을 숭배하는 자들과 철인을 추종하는 사람은 닮았다. 

 

루쉰의 글은 명령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리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세상을 밝히기는커녕 귀신과 죽음을 자신의 글 속에 가지고 온다. 여인이 목매어 죽은 나무 아래, 목덜미에 후둑후둑 떨어지는 벌레를 맞으며 비문, 죽음의 글을 베껴 쓰고 있었다. 바로 그 나무 아래가, 죽음을 곁에 둔 이곳에 그의 글쓰기가 있다.

 

쓸모없는 글쓰기. 그가 스스로 아무 데도 쓸 데가 없다고 했던 비문을 베껴 쓰는 일과 이후 문인으로서의 활동에 어떤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루쉰에게는 비문을 베껴 쓰는 일이나 현실의 문제를 치열하게 다투는 글이나 크게 다르지 않지 않았을까? 

 

필시 그도 광인이었을 테다. 목 메어 죽은 여인은 루쉰이 줄곧 비판한 예교禮敎라는 낡은 습속의 피해자였을 것이다. 그가 옛 비문에서 읽어내려 한 것도 인의人義니 도덕道德이니 하는 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현재의 문제를, 과거로부터 유래한 끈질긴 뿌리를 가진 현재의 문제를 탐구하고자 했다.

 

죽음에는 자연스런 죽음과 억울한 죽음이 있다. 억울한 죽음에는 어떤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모순이 문제를 낳고 문제는 사람을 죽인다. 따라서 원혼이란, 설사 그것이 귀신이라 하더라도 어떤 문제, 심각한 모순이 있다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 귀신이 해코지하는 것은 원한을 준 대상뿐이다. 그렇게 귀신은 감추어진 세계의 진상을 드러낸다. 우리가 왁자지껄 떠들며 즐기는 세계의 이면에 음습한 원한이,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음을 속삭인다. 

 

루쉰은 죽음을 앞두고 유언처럼 남긴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의 이빨과 눈을 망가뜨려 놓고서 보복에 반대하고 관용을 주장하는 사람과는 절대로 가까이 하지 말라.

: <차개정잡문 말편> 죽음, 루쉰전집, 그린비.

목메어 죽은 여인, ‘여조女弔’를 다룬 글에서는 또 이렇게 말했다.

 

압박받는 사람들은 설령 보복하려는 독한 마음은 없을지라도 남의 보복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 오직 음으로 양으로 남의 피를 빨고 살을 먹는 악인과 그 조력자들만이 ‘남에게 당하여도 따지지 말라’, ‘지나간 잘못은 잊자’ 따위의 격언을 사람들에게 선물한다. 

: <차개정잡문 말편>, 여조, 루쉰전집, 그린비.

새겨들을 말이다. 2018년, 루쉰이 <광인일기>를 쓴 지 딱 100년이 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도덕을 들먹이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더욱 기이한 것은 거짓을 진실로 말하는 것을 넘어, 진실만을 말한다는 위풍당당한 자들이 더욱 많아진 것 같다는 점이다. 거짓을 말하는 자는 상대하기 쉽다. 그러나 거짓을 진실로 말하는 사람은 상대하기 어렵다. 진실만을 말한다며 거짓을 모르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진실된 자들에게, 루쉰의 글쓰기는 분명 유의미한 무기일 것이다. 진리가 거짓을 말할 수 있음을, 밝음이 세계를 또렷이 보지 못하게 만들 수 있음을 폭로한다. 우리는 좀 어두워질 필요가 있다. 그러니 밤의 달빛을, 온몸에 감아오는 원혼을, 현재 두 발아래 채이는 문제를 주목할 것. 빛 아래야말로, 낮이야 말로 기만과 속임수가 횡행하며 살인이 축복으로 둔갑하는 시간이다.

 

신이 조금 지혜로웠다면 빛이 있으라는 말을 좀 나중에 하지 않았을까? 그가 참으로 전능한 존재라면 무엇이 없으라는 말도 할 수 있었을 테다. 그 첫 말이, 무엇이 없으라는 말이었다면 어떨까. 예를 들어 이런 말. 

 

"빚이 없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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