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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 아Q를 변호하며
기픈옹달 / 2018-11-03 / 조회 433 

본문

 

  • 몇몇 친구들과 '루쉰, 전사의 글스기'라는 이름으로 글쓰기 워크샵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 쓴 글을 나눕니다.
  • 본래는 소제목이 없지만 수정하면서 붙였습니다. 
  • 브런치에도 올려두었어요. 이쪽이 가독성이 더 좋습니다. https://brunch.co.kr/@zziraci/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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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인狂人

 

혁명과 혁신이 다르다면, 그것은 연속성의 문제일 것이다. 혁명이 단절이라면 혁신은 변화라고 해야 한다. 혁명 이후에는 낯섦, 기존의 언어가 표현하지 못하는 이질감이 있다면 혁신은 말 그대로 ‘새로움’을 가져다준다. 일면 이 둘은 닮아 보이나 실상은 다르다. 새로움은 낡은 것을 대체하고 언제든 다시 낡은 것으로 돌아갈 수 있으나, 혁명이 가져다주는 이질감은 차후 무엇으로 대체될지 알 수 없다.

 

따라서 혁명 이후란, 아니 본질적으로 혁명이란 상상 불가능의 무엇으로 존재한다고 해야 한다. 만약 혁명의 시공간이 존재한다면 그 시간을 사는 사람은 기묘한 존재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알 수 없는 존재. 루쉰에게는 그것이 광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알고들이나 있으셔. (…) 그놈이 글세 이 대청 제국 천하가 우리 모두 거라 했다는 거야. 생각해 보게. 이게 어디 사람이 할 소리냐고. (...) 그놈 표정이 도리어 토끼눈깔을 불쌍히 여기는 투였다니까!”

(…)

“토끼눈깔이 불쌍타고? 미쳤지. 정말 돌아 버렸구만.” 흰 수염이 큰 깨달음을 얻은 듯 떠벌렸다.

“그래, 미친거야.” 스무 남짓한 총각도 대오각성의 일갈을 내질렀다.

: <약> (이하 모두 그린비 루쉰전집 <외침>에서 인용) 

<약>은 참혹한 사건을 다룬다. 혁명당원이 십자로에서 공개 처형을 당한 날, 그의 피를 찍은 찐빵이 거래된다. 폐병에 좋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두고 '돌아버렸다(疯了)'며 떠들어댈 뿐이다. 반대로 그들은 기묘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따끈따끈한 피를 적신 그 찐빵이 필시 폐병을 낫게 할 것이라는. “틀림없어, 틀림없는 거라니까! 따끈할 때 먹었으니 말이야. 사람 피 먹인 찐빵은 폐병엔 직방이라니까!”

 

그러나 ‘약’은 약이 되지 못했다. 결국 소설의 주인공은 폐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뜨거운 피를 적신, 따끈한 찐빵이었는데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새벽에 얻어오느라 김이 모락모락 나던 그것이 다 식어버렸기 때문일까? 연잎에 싸서 아궁이에 넣고는 시커멓게 구워 먹었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 찐빵을 건네준 이가 처음부터 충분히 피를 적셔주지 않았기 때문일까? 이 모든 질문이 잘못되었다. 따끈따끈한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진다 한들, 설사 그것을 사발 채 들이킨다 해도 폐병은 낫지 않는다. 저들은 저들의 잘못을 알지 못한다.

 

<광인일기>는 대놓고 돌아버린 사람의 속내를 보여준다. ‘일기’라는 독특한 형식을 통해 그는 보통의 언어로는 읽어낼 수 없는 한 인간의 불안한 내면을 드러낸다. 그는 '식인(吃人)',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부지기수라 말한다. 사람을 잡아먹는 사람 과연 그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몇 마디 되지도 않는데, 입이 떨어지지가 않네요. 형님, 그 옛날 야만인들은 제법 사람을 잡아먹었겠죠. 그 뒤 성정이 달라져, 어떤 자는 사람 먹는 걸 거부하며 그저 착해지려 애썼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이 되었고 멀쩡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어떤 자는 사람을 먹었습니다. 벌레처럼 말입니다. (...) 

반고가 천지를 개벽한 이래 줄곧 잡아먹다가 이아의 자식까지 이르렀고, 이아의 자식부터 줄곧 잡아먹다가 서석림까지 이르렀고, 서석림부터 줄곧 잡아먹다가 늑대촌서 붙들린 자까지 이르게 될 줄 말입니다. 작년 성 안에서 죄인을 참살했을 때, 폐병쟁이들이 찐빵으로 그 피를 찍어 핥아 먹었습니다. 

저들이 날 잡아먹으려 하고 있습니다. (...)"

(…)

이때 형도 흉악한 면상을 드러내더니 고함을 질렀다.

"모두 나가! 미친놈(疯子)이 무슨 구경거리라고!"

<광인일기>

<광인일기>의 시작과 끝은 모호하다. 시작에서는 ‘이미 쾌차해 모 지방의 후보로 부임하였으니’라고 말한다. 광인은, 식인의 두려움에 떨던 그는 정상인 - 늑대의 부류가 되었는가? <광인일기>는 ‘아이를 구해야 할 텐데(救救孩子)...’라는 말로 끝맺는다. 위 루쉰전집과 다른 번역도 있다. 마지막 말, '救救孩子'을 '아이를 구하라'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앞이 걱정과 우려라면, 뒤는 강력한 호소라 하겠다. 그의 어조가 어떤 것이든 <광인일기> 주인공의 행적을 더 이상 뒤쫓을 수 없다. 

 

 

2. 늑대촌, 루전, 웨이좡 ...

 

그러나 실상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사건이 벌어지는 시공간이다. <광인일기>의 늑대촌(狼子村)은 <약>의 참혹한 현장과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다. 루쉰의 다른 작품 <쿵이지>, <내일>, <야단법석>의 루전鲁镇 역시 포개어져 있는 시공간이라 해야겠다.  그의 또 다른 작품 <아Q정전>의 배경이 되는 웨이좡未庄도 지근거리에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아Q정전>에서는 <야단법석>의 칠근七斤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을 만날 수 있다.

 

(...) 그다음 날부터 변발을 자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들리는 말로는 이웃마을 뱃사공 칠근七斤이 처음으로 걸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고 했다. 

<아Q정전>

(…) 갑자기 또 칠근이 원망스러워졌다. “이 웬수야. 싸다 싸! 모반이 일어났을 때 내가 그리 일렀잖아. 뱃일도 하지 말고 대처에 나가지 말라고. 그런데도 죽자 사자 기어 나가더니 기어이 변발을 잘리고 말았잖아.”

<야단법석>

그것뿐인가. <광인일기>에는 자오구이赵贵 영감이, <야단법석>에는 자오치赵七 영감이, <아Q정전>에는 자오 나리(赵太爷)가 등장한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지방의 유지로서, 학식도 있고 재산도 있는 사람들이다. 비록 시간적으로 동시대는 아니지만 - 서석림은 1907년에 세상을 떠났고, <야단법석>의 황제 복벽 사건은 1917년이었다. <아Q정전>은 선통 3년, 1911년 좌우를 배경으로 한다. 따라서 굳이 순서를 잡자면 <광인일기>, <아Q정전>, <야단법석> 순으로 시대적 배경이 다르다. - 각 작품의 인물들은 하나의 시공간에서 서로 지근거리로 존재한다. 아마 그 주변에는 <쿵이지>의 주인공 쿵이지, <내일>의 주인공 단씨 댁 역시 있었을 것이다. 조금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 셴헝咸亨주점 이쪽저쪽에 루쉰 소설의 여러 인물이, 비록 여성은 하나도 없었겠지만, 자리 잡고 앉아 있었으리라.

 

앞에서 간단히 언급했듯, 루쉰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청조말(<광인일기>와 <아Q정전>, <약>)에서 민국 초기(<야단법석>)에 이르기까지 약 10여 년 간 차이가 벌어진다. 그런데도 이를 하나의 시공간이라 부르는 것은 어째서인가. 이는 비록 ‘신해혁명’이라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사람들의 삶은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두발 이야기>에서 말하듯, 신해혁명이 근 10년은 지났지만 - <두발이야기>는 1920년 10월 10일에 실렸다. 신해혁명 기념일은 1911년 10월 10일이다. - 사람들의 면모는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여전히 변발을 두고 설왕설래 수많은 말이 오간다.

 

조물주의 채찍이 중국의 등짝을 후려치지 않는 한, 중국은 영원히 이 모양 이 꼴일 거야. 스스로 머리털 한 올도 바꾸려 하지 않을 테니 말야! 

<두발 이야기>

따라서 시간이란 대단한 것이 못된다. <야단법석>의 시점은 이보다 앞선 1917년이지만 역시 머리털을 두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그뿐인가. 소설 말미에서 칠근이네 딸 육근이는 발을 싸매고 뒤뚱거리며 마당을 오간다. 전족을 위해 발을 동여맸기 때문이다. 루쉰의 시대로부터 100년이 훌쩍 지난 2000년대 초, 나는 중국에서 전족을 한 노인을 본 적이 있다. 그만큼 전통은 질기며 힘에 세다. 그것이 바로 혁명의 어려움을, 시대의 단절이 결코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사건이다. 따라서 과거와 단절된 시대는 어쩌면 과거 시대의 인종이 모두 사라진 뒤에야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혁명보다는 멸종이야 말로 기대할만한 것이 아닐까.

 

 

3. 정신승리법

 

이런 배경위에서 <아Q정전>은 혁명의 불가능성과 가능성을 모두 타진한 글이라 할 수 있다. 흔히 이 소설은 이른바 ‘정신승리법’으로 대표되는 부정적인 인간의 전형을 그린 글이라 알려져 있다. 

 

실제로 아Q는 놀라운 정신의 소유자이다. 그는 "우리도 한때는... 너보다 훨씬 더 대단했어! 네깟 게 뭐라고!"라며 과거를 소환하며 우쭐거리는 것은 물론, 진심인지 조롱인지 모를 말을 듣고도 한껏 기분이 들뜨기도 한다. 자존심이 강해서 주변 사람을 쉬이 무시한다. 허나 머리에 난 부스럼 때문에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기에 다툼이 벌어지면 ‘노려보기주의’로 상대를 공격한다. 문제는 이것마저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건달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뒤에는 ‘아들놈한테 얻어 맞은 걸로 치지 뭐, 요즘 세상은 돼먹지가 않았어...’라며 또 다른 승리법을 고안해낸다. 

 

이 승리법이 한계에 봉착하면? 또 다른 승리법을 찾으면 될 뿐이다. 아Q의 정신승리법을 안 건달들이 "아Q, 이건 자식이 애비를 때리는 게 아니라 사람이 짐승을 때리는 거야. 네 입으로 말해 봐! 사람이 짐승을 때리는 거라고!" 강요하면 "버러지를 때리는 거야, 그럼 됐지? 나는 버러지야, 이래도 안 놔?"라며 스스로 자기 경멸의 ‘제일인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한번은 놀음판에서 크게 돈을 딴 적이 있었다. 그러나 무슨 연유인지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더니 놀음판이 사라져 버렸다. 아Q 앞에 무수히 쌓였던 은전 무더기도 함께 날아가 버렸다. 그날의 ‘패배’는 잠을 못 이룰 정도로 쓰라렸다. 그러나 위대한 아Q는 또 다른 방법을 찾아낸다. 제 손을 들어 뺨을 후려치는 것이다. 자기가 때리고 자기가 맞은 것이지만, 자기가 맞은 것을 망각해 버리면 ‘자기가 때린 것’만 남는다. 화풀이를 한 바람에 다행히 그는 흡족한 마음으로 잠을 이룰 수 있었다. 

 

자신의 과거를 뽐내며, 쓸데없는 우쭐거림을 가지고 있는 존재. 아Q는 바로 중국을 인격화한 것이다. 자존自尊과 자대自大만 있을 뿐 반성이라고는 없는 존재. 아Q의 정신승리법이란 20세기 초 중국이 패배를 ‘망각’하는 법이라 할 수 있다. '아Q'라는 모호한 이름의 이 인물은 장삼이사張三李四, 언제 어디서든 마주할 수 있는 인물이라 하겠다. 이런 탓에 아Q'정전正传'이라는 이름을 붙였음에도 '속후速朽'의 문장, 곧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글이기를 바랐으나, 루쉰의 바람과 달리 <아Q정전>은 고전古典이 되고 말았다. 

 

문제는 <아Q정전>이 그렇게 평면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2장 승리의 기록’과 ‘3장 승리의 기록(속편)’까지 아Q는 정신승리법으로 밑바닥 생존을 그럭저럭 유지하는 인생이다. 허나 ‘4장 연애의 비극’과 ‘5장 생계문제’를 거치면서 아Q는 새로운 길에 돌입한다. 한편으로 이는 웨이좡을 떠나는 것이며, 거꾸로 이는 ‘7장 혁명’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아Q의 정신승리법은 일면 꽤나 훌륭한 방법이다. 아Q의 삶이 더 나아지지는 않을지라도 적어도 더 나빠지지는 않는다. 그는 패배하지 않는 삶이다. 그의 삶을 어찌 건강하지 않다고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토곡사土谷祠 바닥에서 잘 자는 그를 깨워, 이런 곳에서 자면 안 된다고, 번듯한 집을 구해 사람답게 살라고 할 이유가 무엇이 있는가? 안온한 그의 승리를 깨뜨리고 패배감을, 비애를 심어줄 이유가 어디에 있냐는 말이다. 설사 수많은 사람이 손가락질한다 해도 그는 또 다른 정신승리법을 찾아 그 손가락질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유명인이 되었다는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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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Q 正传 六十图>中一, 趙廷年

 

 

3. 호적수

 

반대로 왕후이가 언급했듯 그의 정신승리법이 유효하지 않는 상황에 주목해야 한다. 

 

도무지 아Q가 이길 수 없는 상대도 있었다. 하나는 왕털보였다. 어느 날 왕털보가 양지바른 담 밑에서 웃통을 벗고는 이를 잡고 있었다. 아Q도 옆에 앉아 웃통을 벗고 이를 잡았다. 그러나 도무지 왕 털보만큼 많이 이를 잡을 수는 없었다. 기껏 한다는 것이 중치 한 마리를 잡아 입에 넣고는 큰 소리를 내도록 깨무는 것이었다. 그래도 왕털보의 것에 미치지 못했다. 한바탕 싸움을 걸었으나 바로 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정신승리법도 통하지 않는다. 왕털보보다 이도 많지 않았고, 힘도 세지 않았다. 그깟 놈을 아들로 칠 수도 없었고, 스스로 버러지로 내려가 자기 경멸의 일인자가 될 수도 없었다. 실상 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애송이D야 말로 아Q가 당면한 이 당혹스런 사태를 잘 보여준다. 아Q는 품팔이로 생계를 유지했지만 애송이D가 아Q의 일거리를 가져가는 바람에 빈털터리가 된다. 한바탕 싸움을 벌이겠다며 벼르고 있는 상황에서 애송이D를 마주친다. 그런데 애송이 D의 반응이 낯설지 않다.

 

“짐승 같은 놈!” 아Q는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입가에 침이 튀었다.

“나는 버러지야, 됐어?...” 애송이D가 말했다. 

이 겸손이 도리어 아Q의 분노를 부채질 했다. 

<아Q정전>

아뿔싸. 상대를 제대로 만났다. 짐승은커녕 버러지를 만났으니. 도무지 질 수 없는 상대다. 아Q가 생물학의 지식이 조금 더 있었다면, 벌레 축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기묘한 것을 들먹이며 먼저 패배자를 자처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아메바 같은 단세포 생물을 자처하는 수가 있었을 테지만 아Q에게는 수가 없었다. 결국 원치 않는 승리를 얻었다. 패배가 없으면 정신승리도 없다. 정신승리는 정신승리로 이길 수 없는 법. 왕후이의 표현을 빌리면 ‘정신승리법이 효력을 상실하는 순간’이다. 결국 아Q는 애송이D를 맞아 ‘용호상박’이라는 말에 걸맞은 무승부를 거두는 수밖에.

 

실상 아Q나 왕 털보, 애송이 D 모두 한 부류의 인간이라 해야 한다. 결국 정신승리법이란 패배를 안겨주는 대상, 예를 들어 자오 나리 댁이나 거리의 건달을 상대할 때에만 통용되는 기술에 불과하다. 패배도 승리도 거둘 수 없는 이들과의 만남은 아Q에게 적잖은 당혹감을 선물해주었다. 굴욕이라 부를 만한 것을.

 

아Q의 두 번째 굴욕은 가짜 양놈에게 두드려 맞은 것이다. 제 눈에 사람 축에도 끼지 못하는 가짜 변발을 두른 가짜 양놈에게 두드려 맞은 것은 적지 않게 아팠다. 도무지 수긍할 수 없는 고통이었던 것이다. 비록 ‘망각’의 힘을 빌어 잊어보려 하지만 완전히 잊히지 않는다. 사람에게 맞으면 벌레를 자처하고, 이름 없는 이에게 도둑질을 당하면 제 뺨을 후려치면 되지만 ‘사람 같지도 않은 것’에게 당하면 어찌해야 하나. 

 

그가 선택한 것은 앙갚음이다. 우연히 마주친 비구니의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놀렸다. 볼을 꼬집으며 희롱했다. 겸손이라는 이름의 정신승리법으로 그럭저럭 살아온 아Q에게 우연히 욕망이 흘러들어 오는 순간이다. 여자를 얻어 대를 이어야지. 아Q는 땀 흘리며 자오씨댁에서 쌀을 찧다 과부인 우 어멈을 보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한다. "너 나랑 자자. 나랑 자자구!" 이 사건으로 흠씬 두들겨 맞은 것은 물론, 아Q는 웨이장 사람들에게 공공연히 배척당하는 존재가 된다. 고스란히 배를 굶게 된 아Q는 결국 웨이장 변두리에 있는 정수암에 들어가 무를 훔쳐 먹는다. 늙은 비구니의 밭에서 무을 빼앗아 달아나며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여기도 찾을 게 아무것도 없구나. 대처로 가는 게 더 낫겠어...’

 

앙갚음. 비구니는 아Q보다도 더 낮은 신분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이때 아Q는 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자각했다고 할 수도 있다. 버러지라고 스스로 자처했으나 제 딴에는 사람 언저리에 있었다. 왕 털보나 가짜 양놈이야말로 사람 축에도 못 든다고 생각했는데 이들에게 연거푸 패배하면서 굴욕을 입고 말았다. 호적수 애송이D는 어떤가. 그는 자신의 판박이여서 도무지 이길 수 없다. 결국 희롱할 상대를 찾아내지만 그 순간 그는 웨이좡에서 배제된 존재가 된다. 그에게 정신승리는 허락되지만 실제 승리는 허락되지 않는다.

 

 

4. 혁명

 

결국 그는 대처로 나가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그가 대처에서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웨이좡 사람들은 그를 존경했다. 그것뿐인가. 이제 아Q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 혁명을 구경한 사람. 목 자르는 것을 구경한 대단한 인물이 되어 있었다. 웨이좡 사람들은 그를 가볍게 보지 못했다. 허나 그것도 오래갈 수 없는 법. 그가 대처에 나가 좀도둑질을, 그것도 말단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자 그에 대한 존경을 싹 거두어 버린다. 다시 돌아온 경멸. 그러나 익숙한 이 경멸의 자리를 그는 견딜 수 없었다. 

 

‘혁명이란 것도 괜찮네.’ 아Q는 생각했다. ‘이런 씨팔 것들을 뒤집어 버리자. 좆 같은 것들! 가증스런 것들!... 나도 혁명당에 가입해야지!’

(…)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다시 마음이 하늘하늘 들떴다. 어찌된 영문인지 홀연 혁명당이 바로 자신인 것 같았고, 웨이좡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포로인 것 같았다. 기분이 하늘을 찌른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모반이다! 모반이다!"

웨이좡 사람들은 하나같이 두려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가련한 눈길은 지금껏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걸 보고 나니 오뉴월에 얼음물을 들이켠 것처럼 속이 시원했다. 그는 한층 신이 나 걸으면서 고함을 질러댔다.

<아Q정전>

혁명과 모반을 입에 담는 아Q의 저 정신도 ‘정신승리법’이라 해야 할까. 도래하지 않은 상황을 제 혼자 상상으로 우쭐거리는 모습은 일면 ‘정신승리’와 유사해 보인다. 정작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제것인양 하는 태도를 긍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패배를 패배로 수용하지 않는 정신승리와 같다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아Q는 놀랍게도, 굴욕을 되갚아줄 생각을 하고 있다. ‘이런 씨팔 것들을 뒤집어 버리자’라는 전복의 상상을 하는 것이다. 그는 보복을 꿈꾸고 있다.

 

그것뿐인가. 아Q가 혁명이니 모반이니 하는 것을 입에 올리자 자오 나리가 아Q를 'Q 선생'이라 부르기까지 한다. 그들에게 아Q가 품은 전복과 보복의 욕망이란 정말로 두려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그들이 아Q의 터무니없는 생각을 다 헤아리지 못한 이유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들에게 아Q는 혁명당원의 모습으로 비친다. 

 

“아……Q형, 우리 같은 가난뱅이 동무들이야 별일 없겠지......” 자오바이옌이 혁명당의 속셈을 떠보려는 듯 조심스레 말했다.

“가난뱅이 동무라고? 당신은 나보다 부자잖소.” 이 말을 남기고 아Q는 떠나 버렸다.

<아Q정전>

무엇이 아Q를 바꾸었을까. 과거 아Q에게 자존과 자대만 있었다면 이제 아Q는 제법 자기를 객관화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는 타자를 객관화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부자와 가난뱅이가 있다. 그럼 그다음엔? 여기엔 정신승리와는 다른 변혁의 가능성이 싹트기 마련이다. 격차와 차별의 인식은 불온함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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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抢米>, 趙廷年

 

 

5. 변호

 

그날 밤 아Q의 잠자리는 좀 다르다. 어찌 된 일인지 루쉰은 아Q가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을 넣었다. 무엇이 그의 잠을 방해한 것일까?

 

한바탕 편력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아Q는 이미 코를 골고 있었다. 넉 냥짜리 양초는 아직 반쯤밖에 타지 않았고 낼름거리는 불꽃은 헤벌린 그의 입을 비추고 있었다. 

“아악!” 갑자기 아Q가 큰 소리를 질렀다.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니 넉 냥짜리 초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다시 쓰러져 잠이 들었다.

<아Q정전>

소설 속에서 아Q의 잠을 깨운 불안함이란 바로 수재와 가짜 양놈의 선수치기였다. 그들은 암자에 먼저 가서 미리 혁명을 해버렸다. 정수암에 있는 ‘황제 만세 만만세’라는 용패를 없버렸다. 멋진 배지도 가슴에 달았다. 그것뿐인가 웨이좡 사람들 가운데는 변발을 둘둘 말아 올리며 다니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개혁의 바람이 분 것이다. 사람들도 변화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아Q도 변발을 머리 꼭대기로 틀어 올리고 거리로 나선다.

 

사람들은 바뀌었다. 변발을 말아 올린 머리를 보고도 뭐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거꾸로 사람들은 공손하게 대했고 점포 주인도 현금을 내라고 하지 않았다. 아Q는 우둔한 인간이었지만 변화에 뒤쳐지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 아Q는 만족할 수 없었다. ‘기왕 혁명을 한 이상 고작 이런 정도여선 곤란하다.’ 고작 머리 모양을 바꾼 것에 아Q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 아Q에게 딱히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마도 혁명당원이 한 짓이겠지. 자오씨댁이 약탈당했다. 흰 갑옷과 흰 투구를 쓴 사람들. 문제는 그다음에 벌어졌다. 아Q가 현성에 끌려간 것이다. 그것도 한 무리의 자경단과 한 무리의 경찰, 다섯명의 정탐꾼에게 끌려. 거리의 건달은 물론 왕털보에게 변발을 잡혀 머리를 벽에 쥐어 박히던 아Q였지만 그들은 아Q를 현성에 끌고 갈 때 그저 변발을 휘어잡고 끌고 가지 않았다. 아Q가 자는 사당 밖에는 기관총이 설치되었고, 아무런 기척이 없자 대장은 현상금 20 냥을 걸었다. 두명의 자경단원이 ‘위험을 무릅쓰고 담을 넘었’고 수많은 사람이 달려들어 아Q를 잡아갔다.

 

‘9장 대단원’에서 아Q는 별 심문을 받지도 못하고 그저 조서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려놓는다. 아마도 바깥으로 삐친, 호박씨 모양이 된 그 동그라미에서 아Q의 ‘Q’가 나왔지 않았을까. 감옥에 들어가서도 "모반을 좀 했지"라며 서슴없이 대답하던 그도 현성의 관리 앞에서는 저절로 무릎을 꿇고 만다. 장삼을 입은 사람은 그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노예근성..." 결국 별다른 자기변호도 못하고 아Q는 총살당하고 만다. 머리를 싹둑 잘리는 것도 아니라 총살. 혁명당원으로 취급받은 것이리라.

 

아Q의 변화를 주목한다면 장삼을 입은 관리의 저 말, '노예근성'이라는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 힘들다. 무엇이 노예일까? 현성의 감옥에 끌려와서는 "모반 좀 했지"라며 떠벌리는 모습이? 아니면 혁명이니 모반이니 지껄였지만 결국 판관 앞에서는 두려움에 스스로 무릎 꿇는 저 모습이? 어떤 사유로 끌려온지도 모르고 제 미래를 가늠하지 못하는 저 우둔함이? 아니면, '이런 씨팔 것들을 뒤집어 버리자. 좆 같은 것들! 가증스런 것들!'이라며 전복을 꿈꾼 저 불온함이? 

 

아Q를 변호하자. 그는 정신승리법으로 패배를 망각하는 인물이었으며, 비구니나 우 어멈에게 엉뚱한 앙갚음을 하는 사람이었다. 날품팔이 인생이었고, 놀음판에서 돈을 탕진하거나 술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사람이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어쩌면 누구나 내면에 품은 인격이라 해야 한다. 허나 그가 전복을, 모반을, 혁명을 입에 담은 것은 전혀 다르다. 

 

사람들은 쉬이 계몽주의자들이 혁명의 주인공이라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혁명의 순간, 그 소용돌이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어찌 다 그런 사람들일까. 만약 정말 그렇다면, 혁명은 계몽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며 확고한 이상과 정확한 청사진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것이다. 물론 그러한 것을 혁명이라 부를 수도 있겠지만, 단절 - 연속되지 않는 시공간과는 무관할 것이다. 거꾸로 역사의 단절이란, 의도치 않은 욕망을 통해 싹틔워지고 예기치 않은 충동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어느 시대인들 완전한 연속과 완전한 단절이 있겠냐만, 욕망과 충동의 우연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예기치 않은 전복의 순간을 어떻게 맞이할 수 있을까.

 

아Q와 혁명의 관계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는 혁명과 모반을 이야기했지만 결국 혁명당에 들어가지 못했다. 흰 갑옷과 흰 투구를 입은 무리에 속하지 못했으며, 웨이좡에서 혁명을 한다고 자처하는 무리에 끼지도 못했다. 그러나 거꾸로 <아Q정전> 전체를 통틀어 그보다 혁명의 본질을 더 잘 꿰뚫고 있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혁명단원이 닥치기 전에 먼저 혁명을 해야 한다며 부산을 떠는 자오씨가의 인물들이며, 아Q에게 혁명당원의 패거리를 묻는 장삼을 입은 판관 모두 혁명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혁명은 그저 위험한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아Q가 자는 사당 앞에 기관총을 가져다 놓았을까. 애송이D도 이기지 못하는 허약한 아Q 하나를 잡자고 기관총을 동원하다니!

 

<아Q정전>의 세계에서 혁명이 가능하다면 역설적으로 아Q를 통해서일 뿐이다. 물론 소문처럼 개혁의 바람이 불어 들고 결국엔 혁명당원이 자오씨댁을 털었지만, 어찌 되었건 혁명에 가장 가까운 것도, 혁명을 가장 바란 것도, 혁명에 가장 취한 것도 아Q였다. 루쉰은 다른 글에서 <아Q정전>에서 20~30년 뒤의 혁명을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그렇다고 루쉰 이후의 역사에서 아Q의 부활을 찾을 필요는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이건, 문화혁명이건 그 무슨 혁명이건. 도리어 언제고 혁명의 순간이 있다면 아Q같은 이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씨팔 것들을 뒤집어 버리자. 좆 같은 것들! 가증스런 것들!’이라 외치는 인격을.

 

아Q는 결국 조리돌림 당한 이후 총살당한다. 그러나 정작 그를 죽인 것은 총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길이었다. 마치 굶주린 늑대와 같은 그런 눈길. 영혼을 물어뜯는 그 눈길은 <광인일기>에서 보았던 그 ‘식인’의 시선과 다를 것이 없을 테다.

 

사 년 전 그는 산기슭에서 굶주린 늑대 한 마리와 부닥친 일이 있었다. 늑대는 다가오지도 떨어지지도 않은 채 영원히 그의 뒤를 따르며 그의 고기를 먹을 요량이었다. 그때 그는 무서워 거의 죽을 뻔했다. 다행히 손에 도끼 한 자루를 들고 있어서 그것에 의지해 배짱을 두둑히 하며 웨이좡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 늑대의 눈길은 영원히 기억에 남았다. 흉악하면서도 비겁에 찬, 번득이던 그 눈빛이 마치 도깨비불처럼 멀리서도 그의 살가죽을 꿰뚫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엔 여태 보지 못한 더 무서운 눈길을 보았다. 둔하면서도 예리한, 그의 말을 씹어 먹고도 또 육신 이외의 무언가를 씹어 먹으려는 듯 영원히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그를 따라오는 눈길들. 

그 눈알들이 우루루 한데 뭉쳐졌나 싶더니 벌써 그의 영혼을 물어뜯고 있었다.

"사람 살려…."

<아Q정전>

"사람 살려(救命)…"라는 <아Q정전>의 외마디는 기묘하게도 <광인일기>의 '아이를 구해야 할 텐데(救救孩子)...'라는 말과 공명한다. 

 

혁명革命을 이야기하던 이가 목숨을 구하고(救命) 있다. 그는 늑대 무리와도 같은, 도깨비불 같이 덤벼드는 눈알들에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다. 웨이좡 사람들을 비롯하여, 현성에 몰려든 조리돌림 하는 이들이야 말로 언제든 식인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이라 할 테다. 

 

여기에 이르면 당혹스런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정신승리법과 식인의 무리, 혁명을 막는 것이 있다면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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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Q 正传 六十图>中六十, 趙廷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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