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플라톤의 '국가'] 1001 :: 2권 내용정리 - 국가라는 커다란 글자2019-10-04 18: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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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라는 커다란 글자


* 괄호 안 숫자는 <천병희 역, 숲>의 페이지입니다.


1. 글라우콘 : "귀게스의 절대반지가 있다면..."


플라톤은 트라쉬마코스를 일찌감치 퇴장시켜 버린다. 대화의 현장에 여전히 남아 있으나 이전처럼 사납게 울부짖는 모습을 더 이상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침묵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이렇게 플라톤은 트라쉬마코스의 방식을 버리고 철저히 소크라테스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커다란 두 질문을 보자. 하나는 글라우콘의 질문. 글라우콘은 트라쉬마코스와의 논쟁에서 소크라테스가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올바른 것이 불의한 것보다 모든 점에서 더 낫다고 정말로 우리를 설득하고 싶으세요, 아니면 단지 설득한 것처럼 보이고 싶으세요?"(86) 


여기서 중요한 표현을 하나 꼽으라면 '정말로'라고 하겠다. 글라우콘은 정말로 진짜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정말로 그러한 것과 그러한 것처럼 보이는 것. 이 둘의 구별은 <국가>에서 중요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전제를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진짜는 따로 있다는 생각. 나아가 보는 것에 대한 불신. 시선은 진실을 가린다. 이런 생각은 '효과'나 '결과'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글라우콘은 좋은 것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 그 자체로 좋은 것. 둘째, 그 자체로도 그 결과도 좋은 것. 셋째,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결과 때문에 좋은 것. 그렇다면 정의는 어디에 속하는가? 소크라테스는 두번째를 꼽는다. "정의는 앞으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 자체 때문에도 그 결과 때문에도 좋아해야하는 가장 아름다운 부류에 속하네."(87) 그러나 글라우콘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세번째,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 아니냐고 묻는다. 보수를 받거나 인심을 얻거나 명예를 얻거나 등등. 그러나 그 자체는 너무 힘들고 고되다.


여기서 하나 더 짚어야 할 것은 글라우콘이 현실과 이상의 구도에서 이 문제를 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대중의 의견'(88)이다. 여기서 다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대립항. 철인과 대중의 거리. 과연 이는 쉬이 좁혀질 수 있을까? 대중을 계몽하는 것이 아닌, 또 다른 철인의 모습을 <국가>에서 읽어낼 수 있을까.


글라우콘은 트라쉬마코스의 질문에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정의와 불의가 정확히 무엇이며, 그것이 각각 우리 마음속에서 그 자체로 어떤 힘을 발휘하느냐는 것."(88) 트라쉬마코스는 이어서 정의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소개한다. '사람들이 말하기를'이라는 말로 시작하며. 


"사람들이 말하기를, 불의를 행하는 것은 그 본성상 좋은 일이고 불의를 당하는 것은 나쁜 일이지만, 불의를 당하는 쪽의 불이익이 불의를 행하는 쪽의 이익을 능가한대요. 그래서 사람들은 불의를 행하기도 하고 불의를 당하기도 해보고는 불이익은 피할 수 없고 이익은 취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불의를 행하지도 않고 당하지도 않기로 서로 협정을 맺는 것이 자기들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한대요. 그래서 사람들은 법을 제정하고 협정을 체결하기 시작하며 법으로 정해진 것을 '합법적이다' '올바르다'라고 표현하는데, 이것이 정의의 기원이자 본질이래요. 이것은 불의를 행하고도 벌 받지 않는 가장 바람직한 경우와 불의를 당하고도 보복하지 못하는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경우의 절충안인 셈이지요. 그래서 양극단의 절충안인 정의는 좋은 것으로 환영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불의를 행할 능력이 없기에 상대적으로 존중받는 것이지요. 불의를 행할 수 있는 진정한 남자라면 어느 누구와도 불의를 행하거나 불의를 당하지 않기로 협정을 체결하지 않을 테니 말예요."(89-90)


글라우콘의 이 말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의 또 다른 모습을 잘 보여준다. 정의라는 절충안.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마지막 부분이다. 불의를 행할 능력이 없어 정의를 행한다는 것. 그는 여기에 하나의 이야기를 덧붙인다. 바로 귀게스의 절대반지. 자신의 모습은 물론 행위를 완벽하게 감출 수 있는 신묘한 능력의 반지가 있다고 하자. 그런 반지를 소유하고 있더라도 정의를 행할까? 글라우콘은 '자유'(92)라는 표현을 이용하여 이를 질문한다. 그런 능력이 있다면, 아무 짓이나 저지르고도 책임질 필요가 없다면 어떨까? 글라우콘의 표현을 빌리면, 자유로운 자도 정의를 추구할 것인가? 


글라우콘의 질문은 한걸음 더 나아간다. 완전히 불의한 자를 상상해보자. '불의한 자는 완벽하게 불의하려면 본격적으로 불의를 행하고도 들키지 않을 수 있어야'(93) 한다. 왜? 여기서 앞에 언급한 그러하게 보이는 것을 떠올릴 수 있다. 정의/진리는 늘 그 자체로 존재하지만 불의는 그것을 꾸며 묘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거짓된 것은 스스로의 거짓 조차 감추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거짓의 거짓을 진실과 구분할 수 없다면? '불의의 극치는 올바르지 않으면서 올바른 것처럼 보이는 것'(93)이라는 글라우콘의 주장은 하나의 중요한 질문을 함축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관절 그 자체로 올바른 것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는가? 


한편 글라우콘은 올바른 사람에게서 '그렇게 보이는 것'을 떼어내 보자고 말한다. 가령 이렇다면 어떨까? '그는 불의를 행하지 않더라도 가장 불의하다는 평을 들어야 해요. 그가 나쁜 평판과 그것에 따르는 결과에도 끄떡조차 않는지 봄으로써 우리가 그의 정의의 순수성을 시험할 수 있도록 말예요.'(94) 결국 이러한 가정 위에, 글라우콘 스스로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가 잠재적으로 내놓는 결론은 이렇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라 올바른 것처럼 보이는 것.'(94) 


개인적으로 글라우콘의 첫번째 가정은 흥미롭지만, 두번째 가정은 불편하다. 선악 이분법의 구도 위에 있는 '핍박당하는 선'이란 지금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니 말이다. 선/올바름은 그 자체로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나아가 핍박당하기까지. 따라서 비판은 자신이 옳다는 증거이며, 그런 비판 속에도 올바르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올바른 것을 추구해야 한다. 


이렇게 결코 깨뜨릴 수 없는 견고한 껍질이 만들어진다. 그들은 순수함의 껍질을 깨고 한발짝도 바깥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 순수한 것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면, 그는 과연 진정으로 사람들을 계몽할 수 있는 존재일까? 플라톤은 철인 계몽가를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는 사람으로 그렸지만, 실제로 이 순수함에 대한 강박은 빛에 눈을 멀어버리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2. 아데이만토스 : "때로는 설득으로, 때로는 폭력으로..."


1권에서는 트라쉬마코스의 논점이 바로 분쇄되었으나 글라우콘이 던지는 질문은 쉬이 해결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본격적인 답을 듣기 전에 또 다른 인물, 글라우콘의 형 아데이만토스가 던지는 질문을 만나야 한다. 아데이만토스의 말은 크게 보아 글라우콘의 말과 비슷한 맥락에서 전개된다. 또한 보다 구체적인 설명이 덧붙여진다.


아데이만토스는 올바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까닭을 이렇게 설명한다. '정의 자체를 높이 평가해서가 아니라 정의가 가져다주는 좋은 평판을 높이 사기 때문이니까요.'(96) 평판, 즉 그 자체보다는 그렇게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게다가 사람들만 그럴 뿐 아니라 신들까지 그런다. '그들에 따르면, 사람이 신들에게 잘 보이면 신들께서는 경건한 사람들에게 좋은 것들을 아낌없이 선물한대요.'(96)


근거가 되는 것은 시인들의 표현이다. 예를 들어 호메로스는 이렇게 말했다. "분향과 경건한 서약과 제물 바치는 구수한 냄새에 의해 / 기도로써 신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것이라오."(99) 이러한 주장은 '신들을 마음대로 부를 수 있다는 뜻'(99)이기도 하다. 신들도 재물을 좋아한다. 그렇게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아데이만토스는 아래와 같은 삶의 태도가 어떠냐고 묻는다.


"아무리 내가 올바르다 해도 올바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고 고통과 형벌만 안겨줄 것이 빤해. 반면 내가 불의해도 올바르다는 명성을 얻으면 내게는 신과 같은 삶이 약속되어 있어. 현자들이 이렇듯 <외관이 실체를 압도하며> 행복을 좌지우지한다고 내게 지적해주니, 나는 전적으로 외관을 추구할래."(100)


그러나 아데이만토스에게는 귀게스의 절대반지가 없다. '전적으로 외관을 추구'하는 사람을 사람들은 좋아할까? 외관만을 추구한다는 그 솔직함을 드러내는 것은 위험하다. 그래서 '비밀결사나 압력단체'(101)가 필요하다. 사악한 짓을 대놓고 저지르는 것처럼 무능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나아가 '연설하는 기술'도 필요하다. 그렇게 보이게끔 만드는 기술이야 말로 명성을 얻는데 큰 도움을 준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때로는 설득으로, 때로는 폭력으로 남들을 제압하고도 벌 받지 않을 것이오.'(101) 따라서 사악한 자는 두 개의 무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강하게. 말은 다른 것을 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무엇을 지목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고개가 돌아간다. 말로도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 없으면 힘을 이용하면 된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과 판단을 돌리는 능력이 있다면, 신들의 마음을 돌리는 능력도 있다. 이는 더 간단하다. 봉헌과 기도면 충분하다. 다행히도 신은 변덕스럽지 않다. 결국 가장 좋은 방법은 이렇다. '불의를 행하고 불의한 짓을 해서 생긴 소득으로 제물을 바치는 것이 상책이라오.'(102) 따라서 귀게스의 반지가 없어도 상관없다. 재물과 권력만 있다면 사람들의 마음을 돌릴 수도 있을 테고, 나아가 신들의 마음을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존경을 받는 삶이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장 완벽한 불의보다 정의를 택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우리가 불의를 행하더라도 존경스럽게만 처신하면 살아서나 죽어서나 신들과 인간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는 것이 대중과 전문가들의 의견이라면 말예요."(102)


불의는 다른 사람 나아가 신에게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속임이든 아니면 억지로 마음을 돌리는 것이든 불의는 이처럼 대단한 결과를 가져온다. 그렇다면 정의는 어떨까? 그 자체의 순수함을 찾기 위해 그렇게 보이는 것 뿐만 아니라 그 결과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말아야 한다. 때문에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은 한참 미뤄질 수밖에 없다. 정의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신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글라우콘이 그랬듯 아데이만토스도 끊임없이 '~의 말에 따르면'이라는 말을 붙여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들에게는 트라쉬마코스에게서 보였던 그런 기백이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한없이 조심스럽다. 둘 모두 플라톤의 형인만큼,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처럼, 모두 그 자체의 순수함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소크라테스와도 갈등할 생각이 없다. 이들의 질문은 소크라테스의 답을 예비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은 정의 자체의 순수함을 추구하며, 그것이 좋은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 근거를 찾지 못했을 뿐. 그렇기에 이들의 질문은 궁극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된다. 2권에서 이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반론을 만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소크라테스가 답해야 할 것이 정리되었다. "정의와 불의가 신들과 인간들이 알건 모르건 각각 그 소유자에게 그 자체로 어떤 영향을 주기에 한쪽은 좋은 것이고 다른 쪽은 나쁜 것인지 설명해주세요."(105)



3. 소크라테스 "소국과민에서 출발하여..."


한동안 침묵하고 있던 소크라테스가 드디어 입을 뗀다. 다루고자 하는 문제는 결코 간단치 않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날카로운 시력'(106)이 필요하다 말한다. 그러나 모두가 세세한 것을 들여다보는 눈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니 비슷한 커다란 것을 먼저 보자. 


"우리는 정의가 개인의 일이자 국가 전체의 일이라고 말하겠지?"(106) 이 전제가, 정의에 대한 이야기에서 국가에 대한 이야기로 전환되는 중요한 변곡점이 된다. 정의는 개인의 일이자 국가의 일이므로. 오늘날 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적지 않겠으나, 소크라테스는 국가에서 정의의 문제를 탐구하면 개인에게서 정의가 무엇인지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정의의 문제에서 시작한 이 길은, 국가를 경유해 더 멀리 돌아가야 한다.  


큰 것을 먼저 보고 작은 것을 나중에 보자고 했지만, 소크라테스는 가장 작은 국가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그가 생각하는 국가는 자족하지 못하는 개인들에게서 출발한다. 각자의 필요를 위해 모여 살게 되었고 여기에 국가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 "국가는 분명 우리 필요의 산물이네."(108) 


그럼 무엇이 필요할까? 일단 의식주가 필요하다. (소크라테스는 식, 주, 의 순서로 필요를 이야기한다.) 따라서 식량을 생산하는 농부, 집을 짓는 목수, 옷을 짓는 직조공이 필요하다. 물론 이렇게 셋만 있으면 되는 건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에 두 사람 정도 더 추가해보자 말한다. "거기에다 제화공 한 명과 신체적인 필요를 충족시켜줄 사람을 또 한명 추가할까?"(108) 신체적인 필요를 충족시켜줄 사람이 누구인지 모호하지만 일단 이렇게 최소의 국가는 네댓 사람으로 출발한다. 


물론 이는 하나의 가설이다. 모여 사는 사람들 가운데 농부, 목수, 직조공 등이 나왔지 농부와 목수, 직조공이 힘을 합쳐 국가를 건설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소크라테스의 작은 국가, 이 가상의 국가에서는 각자가 자신의 적성에 따라 한 가지 일만 한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다른 나라로부터 가져와야 한다. 새로운 국가의 구성원이 필요하다. 바로 무역상. 무역상을 통해 물건을 사고팔게 되었으니 또 사고팔 만큼 여유분의 생산이 필요하다. 


이어서 화폐가 필요하고, 나라 안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바로 소매상. 흥미롭게도 아데이만토스는 소매상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제대로 다스려지고 있는 국가에서는 대개 다른 일에는 쓸모없는 몸이 가장 허약한 자들'(112)이라고. 그저 시장에 쭈그려 앉아 물건을 사고팔기만 한다는 거다. 여튼, 여기에 임금노동자도 더하자. 


이렇게 최종적으로 약 10여 명의 작은 국가가 탄생했다. 과거 노자가 소국과민을 이야기했듯, 소크라테스의 이 나라도 하나의 이상으로 존재한다. 이 나라는 소박하며 어떤 불의도 생겨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나라이다. 과연 불의는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글라우콘과의 대화는 이 이상적인 나라가 어떻게 '사치스러운 국가'(115)로 전환되는지를 보여준다. 


참된 국가는 최소한의 인원으로 구성된 국가이다. 거꾸로 이는 최소한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국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의 욕망이란 늘 최소한의 필요를 넘기 마련. 그래서 건강한 국가가 아닌, '부어오른 국가'(115)는 다음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 '침상과 식탁과 그 밖에 다른 가구와 여러 가지 부식, 향료, 향수, 창녀, 과자'(115) 등등. 이런 것을 위해 국가는 더 커져야 한다. 이제 사냥꾼과 모방자, 그리고 여러 기술자들이 필요하다. 기술자란 '특히 여자들을 아름다워 보이게 만드는 데 쓰이는 각종 물건을 만드는 기술자'(115)이다. 


이렇게 욕망은 더 큰 국가를 욕망할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영토까지도 욕망하기에 이른다. 이제 '전쟁의 기원'(117)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전쟁이 있으니 전쟁을 수행할, 싸움의 기술을 가진 전문가도 필요하다. 소크라테스의 나라는 직업마다 각자 기술을 가진 전문가들이 모인 곳이므로.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이 전사, 즉 수호자들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논한다. 그들은 높은 기개를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철인의 기질도 가져야 한다.(121) 왜? 무턱대고 아무나 공격하면 안 되므로. 무지한 사람은 자신과 같은 사람은 물론 자신과 다른 사람도 해하려 한다고 했다는 점을 기억하자. 


높은 기개와 철인의 기질을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 바로 '몸을 위한 체력단련과 혼을 위한 시가교육'(123)이 있어야 한다. 둘 가운데 먼저 시가 교육이 필요하며 이 시가 교육은 철저히 사실에 근거한 훌륭한 이야기들을 가르치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몸을 형성하는 것보다 이야기로 아이들의 마음을 형성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중요한 마음을 거짓으로 물들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거짓. 이는 2권 내내 정의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거짓이란 실제와는 다르다는 뜻이며, 그렇게 보이게끔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니까. 문제는 신들을 거짓되게 그려낸 이야기가 많다는 데 있다. 이에 시인들이 읊은 신들의 이야기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비난이 줄줄이 이어진다. 신들끼리 전쟁을 했다는 둥, 아들이 아버지를 증징했다는 둥, 신들이 서로 속였다는 둥 하는 것 등등.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한다.


"국가의 창건자들이 할 일은 시인들이 창작할 이야기의 유형을 알고 그 유형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이야기를 직접 창작할 필요는 없네."(128)


앞서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상상의 국가를 위협하는 것으로 탐욕을 들었지만 여기서 또 다른 하나를 이야기하고 있다. 바로 신들에 대한 이야기. 미담이 아닌, 시인들이 지어낸 이야기. 이는 결국 그의 나라에서 이야기를 내쫓아야 하며, 상상력을 없애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촘촘한 소크라테스의 논의는 여기서 성글어진다. 철학적 논의 결과가 아닌, 몇 가지 전제들을 그저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대화 상대는 맞장구를 칠 뿐이다.


"신은 진실로 선하니까 선하게 묘사되어야겠지?"

"물론이지요."(128)


선한 것은 무해하며, 악의 원인이 될 수 없고, 이롭다는 전제가 줄줄 이어지며 중요한 하나의 명제를 이끌어낸다. 


"그렇다면 선은 모든 것의 원인이 아니라 좋은 것들의 원인이고, 나쁜 것들의 원인은 아닐세."(129)


이 명제는 몇가지 방향에서 중요하다. 첫째, 신이 '모든 것의 원인'이 아니라는 점. 거꾸로 이는 또 다른 질문을 이끌어낸다. 그렇다면 이 많은 모든 것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둘째, 신은 선의 원인이며 악의 원인은 따로 있다는 점. 그렇다면 선과 짝을 이룰 만큼 또 다른 능력을 지닌 존재가 있는 걸까? 


소크라테스는 이런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다만 여기에서 간단한 다음과 같은 간단한 결론을 이끌어낼 뿐이다. "인생의 일부만이 신의 책임이고 대부분은 신의 책임이 아닐세.... 신만이 좋은 것들의 원인이고, 나쁜 것들의 원인은 신이 아닌 다른 데서 찾아야 하네."(129) 나쁜 것의 원인에 대해서는 나중에 논의하도록 하자.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문제 삼는 것은 인간의 모든 행위의 원인을 신에게 돌리는 것, 시인들의 이야기이다. "선한 신이 누군가에게 나쁜 것들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주장에는 우리가 온갖 방법으로 맞서 싸워야 하네."(132) 신은 아름답고 좋은 것만을 줄 뿐이다.


나아가 그는 '최선의 상태에 있는 것들은 다른 것에 의해 바뀌거나 변동될 가능성이 가장 적'다고 말한다. 신은 완벽하므로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신은 늘 가장 아름다운 형상으로, 완벽한 형상으로 있을 뿐이다. 신이 자신보다 못한 더 추한 것으로 변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시인들의 이야기속에 신들이 자신의 형상을 바꿔 인간들을 만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


"신이 자신을 바꾸기를 원하는 것도 불가능하네. 신들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선하기에 저마다 늘 변함없이 본래 형상을 견지하는 것 같으니 말일세."(134)


이 논의는 <국가>안에서 시인들을 공격하는데 그치지만 서구 역사에서는 또 다른 결과를 낳았다. 바로 아이콘 논쟁. 신을 형상화한 모든 성상聖像을 부숴야 한다는 주장은 일정 부분 소크라테스의 이 논리를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문제 삼는 것은 조각상이나 그림 따위가 아니다. 그는 이야기를 문제 삼고 있다. 따라서 다시 확인하는 결론. "신에게 시적 허구 따위는 없네."(137) 이야기, 상상은 허구를 짓는 것이며 곧 거짓과 같다.


"신은 분명 단일하며 말과 행동이 진실하네, 신은 자신을 바꾸지도 않으며, 꿈에든 생시든 환영이나 말이나 신호를 보내 남들을 속이지도 않네."(138)


이제는 소크라테스의 충실한 제자가 된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적극 동의하며 나아가 "그런 원칙들이라면 법률로 삼았으면 좋겠어요."(139)까지 말하는 데 이른다. 소크라테스의 국가는 가상이므로 이를 법률로 삼은 나라가 실제로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저 말은 국가의 입안자보다는 신을 섬기는 자들의 심금을 절절하게 울렸을 것이다. 신학자들이 저 말을 보고 얼마나 감동하였을 텐가.


그러나 거꾸로  상상력을 몰아내어 신을 하나의 철창에 가두고 말았다. 신은 자신의 모습을 변화하지도 못하며 당연히 빗대어 표현하는 법도 모른다. 유머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물론. 그러니 신을 섬기는 이들은 글자대로, 쓰인 그대로만이 금칙이라고 생각하며 천년 넘게 대대로 되뇔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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