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겉핥기 중국철학사] 3강 중국이 온다2019-12-29 01:0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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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자료를 나눕니다.


1강: 기린은 사라지나 봉황은 날아오르고 (링크)

2강: 일치일란 변화무쌍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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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로운 유가의 탄생


펑유란은 자신의 작업이 중국에서 철학이라 할만한 것을 골라내는 것이라 밝혔다. 그는 일찍이 <중국에는 왜 과학이 없는가?>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그에게는 이런 질문이 있었던 셈이다. '중국에는 왜 철학이 없는가?' 거꾸로 말하면 그의 작업은 중국에 '철학이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기도 했다. 사실 이는 펑유란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당시 지식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와 비슷한 질문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에겐 왜 종교가 없는가? 민주주의가 없는가? 의회가 없는가? 등등. 따라서 <중국철학사>의 서술은 중국에도 철학이 있음을 알리는 동시에 전통에게 '철학'이라는 근대의 시민권을 부여해주는 작업이기도 했다. 전자가 서구인을 대상으로 했다면, 후자는 중국인을 대상으로 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철학사가 공자로 시작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공자는 마치 서구 철학의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이며, 맹자는 플라톤과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시대적 순서도 중요했겠지만 공자를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펑유란이 '철학'이라 생각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즉, 유가儒家야 말로 철학에 가장 어울린다는 말씀. 법가法家는 정치학에 가깝고, 도가道家나 불가佛家는 종교에 가깝다. 합리적이면서도 이론적인, 게다가 깊은 의미를 지닌 유가야말로 철학에 가장 어울린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펑유란은 주희에 주목한다. 주희야 말로 기존의 철학을 종합하여 새로운 통일된 체계로 완성한 인물이 아닌가? 유가의 전승을 따르면서도 불가는 물론 도가의 요소를 흡수하였으며 법가의 문제의식도 수용했다. 이론적 깊이와 넓이, 게다가 개념적 사유까지. 펑유란은 이렇게 새롭게 탄생한 유가를 신유가新儒家라 부른다. 영어로는 Neo Confucianism. 여기에는 이전의 유가와 다르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전의 유가가 경전의 자구 해석에 머물렀으며 국가를 통치하는 제도에 불과했다면 이제 새로운 유가는 보다 윤리적인 문제에 주목했으며 개별 인간의 수양에까지 관심을 넓혔다. 심성心性, 마음과 본성에 대한 탐구야 말로 이전 유가와 구별되는 차이점이었다. 이제 이전 유가, 과거의 유가는 원시유가(原始儒家Primitive Confucianism)라 불린다. 


'새롭다'는 말은 이전과 다른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시대의 변화에 알맞다는 뜻이기도 했다. 즉 역사적 조건과 필요에 맞게 적합하게 변화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반대로 원시유가에는 낡고 고리타분한 학문이라는 딱지가 붙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정반대의 해석도 가능케 한다. 옛 것이야 말로 진짜배기라는. 먼 옛날, 순수한 유가가 있었다는 환상을 만들기도 한다.


당대 학자들의 생각도 비슷했다. 송나라 시대의 학자들은 자신들이야 말로 과거의 순수한 유가의 충실한 계승자이며 새로운 길을 닦는 사람이라고 자처했다. 


"이 책은 하나의 이치로 시작해서 중간에 모든 일로 확장되며, 끝에는 다시 하나의 이치로 수렴한다. '펼쳐 놓으면 온 세상에 가득 차고, 접어두면 은밀한 곳에 숨겨둘 수 있다'는 말이 이것이다. 의미가 끝이 없으나 모두가 실학實學, 구체적인 학문이다. 이를 잘 읽고 파악한다면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평생토록 실천하더라도 다하지 못할 것이다."(其書始言一理,中散為萬事,末復合為一理,「放之則彌六合,卷之則退藏於密」,其味無窮,皆實學也。善讀者玩索而有得焉,則終身用之,有不能盡者矣。) 


중용 첫머리에 붙인 이 표현에서 자신들의 학문을 실학實學이라 지칭하고 있다. 거꾸로 과거의 학문은 허학虛學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2. 오경에서 사서로


송나라는 문치文治로 유명하다. 과거의 통일왕조가 강력한 무력을 뽐내었다면 송나라는 문화로 융성한 나라로 기억된다. 여기에는 무력이 약한 나라라는 뜻이 숨어 있기도 하다. 문약文弱이라는 표현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또 다른 혼란기를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나라가 어찌 허약하기만 했을까? 강력한 이민족 국가들이 등장했기에 상대적으로 약해 보였던 것은 아닐까? 요遼, 서하西夏가 있었으며 또 금金이 있었다.  


송나라의 수도는 변경汴京으로 오늘날 카이펑開封이다. 송나라의 수도는 밤새 불이 꺼지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만큼 상업이 활발하게 발달했다는 뜻이다. 불야성不夜城! 그러나 이민족의 침입으로 송은 수도를 남쪽, 임안臨安, 오늘날의 항저우杭州로 옮겨야 했다. 이렇게 북송시대와 남송시대로 구분된다. 송을 남쪽으로 몰아냈던 것은 여진족의 금나라였는데, 이 때문에 남송에는 금나라를 어떻게 상대해야 하느냐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기 일쑤였다. 북쪽의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자는 쪽과 적당히 화친하자는 쪽으로. 문제는 이 둘 모두 금나라보다 더 북쪽에 더 강력한 나라가 싹트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여튼 도학道學 혹은 실학實學이라는 정체성에서 이들은 자신들이 이전과는 다른 학문을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 확신은 과거와는 다르게 경전을 대하는 태도를 낳기도 했다. 한나라 시대에는 오경五經이 핵심이었다.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 당나라 시대에 이르면 <의례>와 <주례>를 더하고, <춘추 좌씨전>, <공양전>, <곡량전>을 더해 구경이 된다. 송나라에 이르면 여기에 <논어>, <맹자>, <이아>, <효경>을 더해 십삼경으로 확대된다. 점점 더 경전이 늘어나자 거꾸로 경전의 핵심을 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등장한다. 성인의 말씀의 참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정신 아래 번쇄한 경전을 줄이자는 움직임이 등장하는 것이다.


<논어>는 공자의 말을 기록한 책으로 오래전부터 숭상되었다. 여기에 공자를 이어 성인의 반열에 오른 아성亞聖 맹자의 <맹자>가 더해졌다. 선불교가 가르침의 전승을 이야기한 것처럼 공자의 가르침을 맹자가 이었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공자로부터 맹자에 이르기까지 시대적 간극이 있다는 점이었다. 맹자는 공자의 직계 제자는 아니었다. 이 둘의 간극을 어떻게 해야 할까? 


전래된 이야기에 따르면 공자가 아끼던 제자 안연은 일찍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공자의 아들 공리도 공자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 바로 말년의 제자 증삼曾参이었다. <논어>에서 그는 공자와 비밀스러운 대화를 주고받은 인물로 등장한다. “증삼아 나의 가르침은 하나로 모든 것을 꿰뚫는다. / 네 알고 있습니다.(子曰:「參乎!吾道一以貫之。」曾子曰:「唯。」)" 이 수수께끼 같은 대화는 후대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마치 부처가 은은한 미소로 가섭에게 가르침을 전했듯, 공자와 증삼 사이에도 비밀스런 전승이 있었으리라는 생각이다.


공자가 쓰고 증삼이 정리한 짧은 글, <대학>이 주목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본디 <대학>은 <예기>의 한 편에 불과했으나 이후 따로 떼어져 읽히게 된다. 송나라 시대의 유학자들은 <대학>이 학문의 커다란 체계와 방향을 이야기하는 책이라 여겼다. 게다가 공자를 계승한 증삼의 정신까지! 


더불어 <중용>도 새롭게 경전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중용은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가 쓴 글로 전해진다. 공자에게서 증삼으로, 그리고 증삼에게서 자사로 가르침이 전승되었다는 것이 송나라 유학자들의 해석이었다. 그리고 이 자사에게서 맹자에게로 가르침이 전해진다. 


이렇게 유가의 정신은 새로운 전승과정을 거친다. 요-순-우-탕-문-무-주공을 이어 공자에게까지 이르렀던 전승이 다시 공자-증삼-자사-맹자로 이어진다는 게 이들의 해석이었다. 그리고 송나라 시대의 소수 유학자들이 이 맹자의 정신을 다시 잇는다 생각했다. 주희는 정씨형제 특히 정이천이 그 계승자라 여겼다. 이러한 생각에는 주희 본인이 정이천의 충실한 계승자이며, 이 오래된 전승의 계승자라는 자라는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주희는 이 네 권의 새로운 경전에 주석을 달았다. 그는 당대의 여러 유학자들의 해석을 종합하였다. 이에 그의 작업을 집주集注, 다양한 해석을 모은 주석이라 말하기도 한다. <사서집주四書集注>라는 작업을 통해 이제 이 네 권의 책에 '사서'라는 호칭이 붙었으며, 그의 주석은 이 네 권을 읽는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당대에도 주희는 꽤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사상적 입지는 그리 탄탄하지 못했다. 말년 주희는 정치적 사상적 탄압을 받기도 했다. <사서집주>가 주목을 받은 것은 그보다 한참 뒤, 송나라가 무너지고 원元이라는 새로운 나라가 탄생한 이후였다. 원나라에 이르러서 <사서집주>는 과거시험의 표준이 되었다. 이제 관료를 꿈꾸는 선비는 누구나 <사서집주>를 읽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주희의 해석이 모든 해석의 기준이 되었다. 주희라는 역사적 인물은 사라지고 주자朱子라는 새로운 성인이 탄생하는 것이다.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에 가면 주희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대성전은 공자를 모시는 동시에 공자의 제자들도 함께 모신 공간이다. 공자가 중앙에 있으며, 그 양쪽으로 네 명의 주요 후계자가 자리 잡는다. 여기에는 <사서>의 저자인 증삼, 자사, 맹자가 있고 공자의 애재자였던 안연이 자리한다. 그 아래로 10명이 다시 자리하는데, 나머지 9명은 모두 <논어> 등에 기록된 공자의 제자이나 나머지 한 자리가 주희의 차지이다. 즉, 공자를 둘러싼 유가의 핵심 성인 가운데 주희가 있다.



3. 새로운 변화는 가능한가?


일부 학자는 주희가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가 새로운 학문을 주창한 데는, 북쪽 이민족의 침략에 맞서 중화사상을 수호하고자 하는 태도가 깔려 있었다는 것이다. 정치적 위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상적으로도 서방에서 건너온 불교의 강력한 영향 아래 사상적 투쟁을 벌일 필요도 있었다. 게다가 주희는 송나라 시대에 정치적으로도 소수파였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 자기 수호의 필요에서 나온 것이 주희의 학문 작업이라는 뜻이다. 주희의 학문이 이후 원나라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는 점은 이러한 지적을 숙고하게 만든다. 


그러나 주희가 전통의 충실한 계승자였던 것만은 아니다. 그는 경서에 대해서도 상당히 창의적인 해석을 펼쳤는데 경서의 순서와 표현을 수정할 정도였다. 특히 <대학>을 완전히 다른 책으로 만들어 버렸다. 주희는 전체 문장의 순서를 손보았으며 일부 표현을 바꾸었다. 이전에는 <논어> 같은 명구집의 모습이었다면 주희 손에 거친 이후 하나의 완벽한 체계를 갖는 책이 되었다. 


주희는 <대학>의 전체 구조에서 일부가 사라져 버렸다 생각하여 자신이 생각하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문장을 끼워넣기도 했다. 이를 '보망장補亡章'이라 하는데, 사라진 부분을 보수하여 넣었다는 뜻이다. 이 작업은 단순히 일부 내용을 덧댄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대학>의 핵심,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해석하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사물을 탐구하고 근본적인 인식에 이르는 이 문장의 내용은 주희 철학의 핵심을 잘 요약하고 있다.


"앞에서 '완전한 앎에 이르는 것은 사물을 탐구하는 데 달려 있다'는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나의 앎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 사물을 대상으로 삼아 그 이치를 탐구하는 데 있다는 말이다. 사람 마음의 인식능력은 모든 것을 알 수 있으며, 천하의 모든 사물은 이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치를 미처 탐구하지 않은 것이 있어 나의 앎이 온전치 못한 것이 있다. 이런 까닭에 <대학>을 처음 가르칠 때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모든 천하 사물을 대상으로 삼아 이미 알고 있는 이치에서 시작하여 더욱 탐구하도록 하여 온전함에 이르도록 하였다. 힘쓰는 것이 오래되면 어느 날 확 트여 이치를 깨닫게 되는 때가 있다. 그러면 모든 사물의 겉과 속은 물론 거칠고 세밀한 부분까지 알게 된다. 또한 내 마음의 본모습을 명확히 알게 된다. 이것이 격물格物, 사물을 탐구함이며 또한 치지致知, 완전한 앎에 이르는 것이다."(所謂致知在格物者, 言欲致吾之知, 在卽物而窮其理也. 蓋人心之靈莫不有知, 而天下之物莫不有理, 惟於理有未窮, 故其知有不盡也. 是以大學始敎, 必使學者則凡天下之物, 莫不因其已知之理而益窮之, 以求至乎其極. 至於用力之久, 而一旦豁然貫通焉, 則衆物之表裏精粗無不到, 而吾心之全體大用無不明矣. 此謂格物, 此謂知之至也.)


이치에 대한 탐구와 자기 수양. 주희는 이것이 서로 따로 떨어진 문제가 아니라 보았다. 완전한 인간, 성인聖人이 된다는 것은 모든 사물의 이치를 밝게 꿰뚫어 본다는 것이며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식능력은 물론 윤리적 가능성을 완벽하게 실현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명나라의 왕양명(王陽明, 본명 왕수인王守仁 1472~1523)은 주희의 충실한 신봉자였다. 그는 주희의 이 가르침에 따라 격죽格竹, 대나무를 탐구하여 천리天理, 우주적 이치를 깨우치고자 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일주일간 대나무를 보며 끙끙대다 결국에는 병이 들었다 한다. 어찌 된 일일까? 성인 주희의 말씀이 틀릴 리 없는데. 아마도 더 오래 매달려야 했던 게 아닐까? 至於用力之久, 오래도록 힘을 들여야 한다 하지 않았나.


그러나 왕양명은 전혀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깨우침을 얻는다. 그는 정치적 문제로 용장, 오늘날 구이저우貴州의 관리로 부임하게 된다. 오늘날에도 구이저우에는 평지가 귀하고, 햇빛이 귀하며, 돈이 귀하다는 말이 있다. 지형이 험하고 날씨가 변덕스러우며, 경제적으로 궁핍하다는 뜻. 구이저우의 중심도시가 구이양貴陽인 것은 이런 까닭이다. 오늘날에도 이런데 왕양명의 시대에는 어땠을까. 남쪽 이민족으로 가득 찬 곳이었으며 중앙의 힘이 닿지 않아 언제 어떻게 목숨을 잃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람들이 지껄이는 소리가 마치 새소리처럼 들렸으며 언제 죽을지 몰라 관을 잠자리 삼아 자곤 했단다. 그러나 거꾸로 그는 그러한 척박한 곳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이치에 대한 탐구와 자기 수양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 사물을 탐구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내 마음이 바로 천리가 아닌가!


그는 이치를 특정한 탐구 대상으로 놓는 주희의 관점을 비판하고 대신 인간의 마음에 자체에 이미 이치가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제 마음은 수양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벽한 존재가 된다. 활활 타오르는 등불처럼 마음은 늘 꺼지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모든 사람이, 길거리의 거렁뱅이라 하더라도 모두가 성인이라는 것이 왕양명의 주장이었다. 이런 깨달음의 철학을 양명학楊明學이라 하며, 주자학朱子學과 대립하는 학문으로 이야기하곤 한다.


이처럼 양명은 주희와 다른 식으로 <대학>을 해석하였다. 주희는 <대학> 본문에서 '친민親民'을 '신민新民'으로 고쳐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후 이어지는 '苟日新,日日新,又日新。'이라는 구절을 근거로 들어 백성들을 새롭게 일깨운다는 뜻에서 '신민新民'이어야 하나, 이를 '친민親民'으로 잘못 기록되었다는 게 주희의 주장이다. 그러나 양명은 주희의 해석이 억지스럽고 자의적이라 본다. 그는 주희가 수정한 것이 아닌 옛 형태의 <대학>, 즉 <고본대학古本大學>을 읽어야 한다고 보았다. 


왕양명이 주희의 비판자인가 계승자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관학官學, 즉 체제를 뒷받침하는 학문으로 주희의 철학을 두고 왕양명이 이를 비판하는 새로운 철학이라는 해석이 많았다. 그러나 왕양명도 주희를 성인으로 생각했으며, 주희가 만든 <사서>의 전통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대학>을 다르게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지 다른 경전을 읽어야 한다고 보지는 않았다. 


물론 양명의 후계자 가운데서는 주희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들이 여럿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이지李贄, 이탁오李卓吾(1527~1602)가 있다. 그는 <분서焚書>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불태워질 책이라는 제목처럼 자신의 글을 불온하다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갖가지 기행에 과격한 태도로 끝내 옥에 갇혀 스스로 목숨을 잃는다. 시마다 겐지 등은 이탁오가 주희의 전통에서 탈출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고 본다. 단순히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주자학이라는 전통, 봉건사상에서 새로운 사상적 개혁을 이루는데 실패했다고 해석한다. 이는 주희가 드리운 그늘에서 벗어나려면 새로운 충격이 필요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4.어떻게 근대에 이를 것인가


전통적으로 시간은 돌고 도는 것이라 생각했다. 환갑還甲이라는 말처럼, 60갑자로 이루어진 세계의 시간은 다양한 크기로 존재한다. 연, 월, 일, 시로 60갑자의 시계가 서로 회전한다. 60년이면 하나의 커다란 시계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지만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큰 시계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그 이상을 상상하는 것은 무리이다. 왜냐하면 60년 안팎의 일생을 살기 때문이다.  


근대인은 그런 세계 속에 살지 않는다. 시간은 누적되고 이 누적된 시간은 발전과 변화를 이끌어 낸다. 2019년은 1919년에서 100년이 흘렀으며 그만큼 발전했다는 생각. 그래서 100주년 기념행사를 치르지 않았나. 그러나 조선은 그러지 않았다. 1592년을 조선왕조 200주년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그해는 임진년이었고, 조선을 뒤 흔든 참혹한 전쟁이 벌어진 해였다. 그러나 누구도 조선 건국 200주년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시간에 대한 생각이 다른 까닭이다.


직선적 시간관은 자연스럽게 발전을 상상하게 만든다. 반대로 과거를 야만의 시대로 밀어 넣으면서. 그런 면에서 아편전쟁(1839)은 이전의 무수한 전쟁과는 크게 다른 전쟁이었다. 그 전쟁의 결과 서양과 청나라의 힘 차이를 실감하였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수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18세기와 19세기는 서구의 침략에 시달린 시기이기도 했으나, 전통 왕조가 붕괴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한편 기존의 철학을 새롭게 재점검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왜 중국에는 과학이, 민주주의가 없는가 하는 것이 중국 지식인이 질문이었다. 이는 거꾸로 왜 중국은 근대에 이르지 못했는가라는 후진성에 대한 물음이기도 했다. 왜 중국은 발전하지 않았는가? 누가 중국의 발목을 잡았는가? 저마다 그 원흉을 찾았는데, 주희는 그 가운데 가장 혐의가 짙은 인물로 언급되곤 했다. 적어도 수백 년, 수 세기 동안 주희의 철학 아래 있지 않았나. 


낡은 전통, 즉 봉건의 주모자로 주희를 지목하자 그를 반대한 사람들이 거꾸로 영웅이 되었다. 왕양명, 이탁오 등은 주희의 그늘 아래 벗어나 근대를 향한 열의를 펼친 인물로 자리매김하였다. 물론 성공하지는 못했다.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데 의의를 두자. 그 단절된 시도에 주목하는 연구가 많이 있었다. 서구가 중세의 암흑기에서 벗어나 근대를 열었듯 동방에도 그런 근대적 시도가 있었을 것이라는 희망. '실학'은 그러한 염원 끝에 발견한 실험이기도 하다.


이런 까닭에 조선 후기는 실학자들의 시대로 언급된다. 근대를 향한 위대한 도약은 있었으나 때가 무르익지 않아 단절되고 말았다는 식의 서술. 이 못다 핀 꽃 실학이야말로 새로운 가능성의 대상 아닐까? 근대라는 문제는 동일하나 중국철학에서는 실학의 자리에 해당하는 인물을 좀처럼 발견할 수 없다. 실학자들로 수놓은 화려한 조선 후기에 비해 청말기의 철학은 황폐하다. 이는 근대로의 도입에 앞서 중국에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이민족 국가의 전복. 만주족이 세운 청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한족의 국가를 수립하자. 따라서 중국에게는 낡은 왕조를 무너뜨리는 것은 물론 기존의 권력 구조를 전면적으로 재편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어떻게 근대에 이를 것인가? 한쪽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좌절된 시도에 주목했고, 한쪽에서는 아예 완벽한 변화를 요구했다. 동도서기東道西器니 전반서화全盤西化니 하는 식의 논쟁이 그 산물이다. 타도공가점孔家店打倒, 공자의 무리를 때려부수자는 1919년 54운동의 구호는 20세기 초 그 열망의 흔적을 보여준다. 공자를 때려부수고 새로운 정신을 받아들이자. 공자를 때려잡는데 주희라고 무사할 수 있을까. 1919년, 그해 펑유란은 태평양을 건너 컬럼비아 대학에 진학한다. 그러한 시대적 과제를 맞아 그가 선택한 길은 과거에서 철학이라 부를 만한 것을 건져 올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는 주희를 정점으로 하는 유가에 주목했다. 물론 그의 시도를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주희의 비판자들에 주목해야 한다는 쪽이 있었고, 반대로 유가와의 대결에서 패배한 쪽에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어쨌든 목표는 모두 같았다. 근본적인 질문은 똑같았다. 어떻게 근대에 이를 것인가? 또한 모두가 동일한 정서를 공유하고 있었다. 근대에 이르지 못했다는 실패감. 설사 중국철학의 가능성이 있다 하여도, 그것은 좌절된 가능성에 불과했다. 주희건 양명이건 이탁오 건.



5. 방황과 소외


루쉰(魯迅1881~1936) 역시 19세기에 태어난 인물로 그 역시 시대적 과제를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편 그는 54신문화 운동의 대표인물로 소개되곤 한다. 근대를 향한 열렬한 투사의 모습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식의 가능성을 탐구한 인물로 기억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자신의 뿌리에 주목하지 않았던 까닭이 크다. 그는 실제로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였지만 그것을 커다란 부재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본디 주씨周氏였으나 이를 자신의 이름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어머니의 성을 딴 루쉰魯迅이라는 필명으로 유명하다.


그는 청말기에 태어난 고문古文을 익혔다. 그러나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었다. 이미 왕조는 낡았고 세상은 변하고 있었다. 낡은 왕조에 기대어 뜻을 펼쳐보는 것도 방법이었지만 루쉰에게는 그럴 가능성도 없었다. 청나라 관료였던 할아버지가 부정청탁에 연루되어 관직을 잃고 집안이 풍비박산 났던 까닭이다. 할아버지의 몰락과 아버지의 병환, 개인에게는 불행이었지만 그는 덕택에 낡은 왕조 대신 다른 세계로 눈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서구 학문에 관심을 둔 것이다. 


난징에 해군학교에 들어갔다가 철도학교로, 이어서 나중에는 일본에 의학을 배우러 떠나기까지 한다. 이런 행적을 보면 그는 점점 근대로 가까워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중심으로 들어갈수록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특징은 그의 중요한 사상적 원천이 되었다. 그는 과거로 회귀하지도 않았으며 근대 혹은 서구를 자신의 지향점으로 삼지도 않았다. 그는 철저히 방황하는 인물이었다. 


"나는 암흑을 향하여 무지無地에서 방황할 것이오." <그림자의 고별, 들풀> 


어떻게 보면 단순히 회의적 사상에 빠진 개인의 방황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볼 수 없는 것은 그가 끊임없이 문제 삼은 것이 당대에 직면한 시대적 과제였으며, '전사'라는 표현에 걸맞게 사상적 싸움을 이어나갔던 까닭이다. 그는 20세기 초 혼란한 중국에서 당당히 빛나는 인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자신의 사상적 원류로 삼았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루쉰은 중국문화혁명의 주장主將이다. 그는 위대한 문학가이며 위대한 사상가이자 위대한 혁명가이다." (鲁迅是中国文化革命的主将,他不但是伟大的文学家,而且是伟大的思想家和伟大的革命家。) 마오쩌둥의 평가이다. 마오쩌둥도 당대의 여러 인물처럼 루쉰을 즐겨 읽었고 그를 자신의 사상적 원천으로 삼은 인물이었다. 그의 평가 이후 루쉰은 새로운 중국의 성인이 되었다. 루쉰은 앞장서 공자 그리고 주희를 몰아내는 인물이었으며, 낡은 구습을 깨뜨리고 봉건 타파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었다. 나아가 그들의 자리를 대신할만한 인물이기도 했다. <논어> 등 경전 대신 루쉰문집이, 공자와 주희 대신 루쉰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것이 루쉰에 대한 적절한 독해인가는 새롭게 질문되어야 한다. 루쉰은 건설자라기보다는 파괴자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는 낡은 시대의 파괴를 자신의 과업으로 삼았으며, 자신조차 낡은 시대의 잔재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생성과 수립은 그에게 주어진 과업이 아니었다. 자신의 무덤에 민족혼이라는 글자를 새겼으며, 자신의 글이 경전이 되고 자신이 성인의 위치에 이르리라는 것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결코 반기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철학사에 루쉰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비단 그가 중국인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는 중국이라는 전통, 중국이라는 개별 국가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져 있다. 따라서 그의 이름을 중국철학에 기입하는 것은 새롭게 건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인이기 때문이 아니다. 도리어 중국이라는 전통과 개별 국가를 넘어서 중국철학을 사유하는데 필요한 인물인 까닭이다. 그가 겪은 소외와 방황은, 중요한 유산이자 탐구해야 할 가능성이라 하겠다. 전통과 근대에 포섭되지 않는, 낡은 중국과 새로운 중국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어딘가 고유한 자리. 



5. 혁명은 끝나지 않는다


20세기 중국의 인물 가운데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을 꼽으면 마오를 들 수 있다.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은 중국 공산당을 이끌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오늘날에도 천안문 광장에 걸려 있는 그의 커다란 초상은 그가 신중국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문화혁명이라는 사건 때문에 공칠과삼이라는 성적표를 손에 들게 되었다. 공적이 70이나 과오도 30이라는.  


혁명革命이란 본디 낡은 왕조를 바꾸는 일을 말하는 표현에 불과했다. 천명을 받았다는 이를 끌어내리고 새롭게 천명을 받은 이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  "탕임금과 무왕의 혁명은 하늘을 따른 것이다.(湯武革命,順乎天。)"<백호통> 따라서 근대적 의미의 혁명, 즉 낡은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체제를 세우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마오는 근대적 혁명이라 부를만한 것을 실제로 실현한 인물이었다. 낡은 국가는 무너졌고, 이제 도래할 새로운 나라는 새로운 체제 위에 수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가수립과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이라는 이상 속에 그는 세계사에 유래 없는 일을 이끌어낸 인물이기도 하다.


대장정은 본디 국민당의 포위에서 벗어나 도망치는 길이었지만 어느새 공산당의 새로운 실험을 위한 위대한 행진으로 바뀌었다. 나아가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이상국가를 위한 예언자적 행보로 해석되기에 이른다. 물론 모든 나라가 저마다 전설을 갖지만 대장정은 마오의 독특한 사상적 유연성에서 새롭게 해석되었다고 해야 한다. 거꾸로 말한다면, 다른 혁명가들이라면 다른 공산주의자라면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내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기존의 혁명이 계몽의 과정이었으며, 특히 공산주의 혁명은 프롤레타리아가 주체가 되는 혁명이었다. 그러나 마오의 혁명은 유격대라는 독특한 전술 위에 있다. 전쟁의 '경험' 위에 있는 까닭에 실용성을 중시 여기며 기민한 유동성을 갖는다. 특정한 이론, 개념으로 수렴되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이 계몽의 언어로 기능하기 힘든 특징을 갖는다. 한편 그는 프롤레타리아가 부재한 중국의 현실에서 농민들을 혁명의 주체로 발굴해낸다. 기존의 공산주의혁명이 도시 노동자를 중심으로한다면 마오의 혁명은 거꾸로 농민들이 도시를 포위 섬멸하는 식이었다. 이런 특징은 과연 그를 하나의 사상가, 혹은 이론가로 부를 수 있는가 특히 공산주의 혁명의 한 인물로 이야기할 수 있는가를 묻게 만든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그를 악마화하는 데 보템이 될 뿐이다. 더구나 문화대혁명에 담진 광기의 행태는 철학과 더욱 멀게 떨어뜨려놓는다. 그는 세계사적 학살을 주도한 인물이며, 나아가 광기의 방조자 혹은 광기의 조정자에 이른다. 그러나 혁명의 본질, 과격하고도 전체적인 변화를 생각한다면 문화대혁명 또한 또 다른 식의 혁명이었다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어떤 혁명이었는가가 아니라 무엇으로부터의 혁명이었느냐 하는 점이다. 윤리의 문제보다는 무엇과 단절했느냐 하는 문제를 물어야 한다.


마오는 혁명의 이상을 숭상했던 인물이었다.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절대적인 권력의 자리에 앉아서도 그는 혁명, 특히 사상의 혁명을 끊임없이 생각했다. 문화대혁명은 혁명의 이상을 새롭게 실험하는 거대한 실험의 현장이기도 했다. 조반유리造反有理, 모든 혁명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그가 끼친 영향, 마오의 혁명의 유산은 적어도 전통으로 돌아갈 길을 끊어버렸다. 



7. 진격의 중국


방황과 혁명, 소외와 파괴의 계승자가 있을까? 오늘날 중국은 이와 거리가 멀어 보인다. 21세기에 이르러 중국은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일찌감치 경제적으로 세계 2위였던 일본을 제쳐버렸으며 이제는 최강국 미국을 상대하고 있는 실정이다. 무역전쟁은 부상하는 중국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낳은 현상이다. 


19세기, 20세기 중국사를 보면 극심한 변화로 쉬이 따라가기 힘들다는 인상을 받는다. 아마 후대에 기술될 21세기의 중국사도 비슷하지 않을까. 개혁개방 이후 약 40년이 흐르는 동안 중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빠르고 심각한 변화를 겪은 나라가 되었다. 문화대혁명이라는 하나의 극심한 변화 이후에 불어닥친 또 다른 방향으로의 전환은 오늘날 중국을 세계자본주의의 최전선에 있는 국가로 이끌었다. 


중국은 어디 있는가? 누군가에게 중국은 여전히 전통의 세계에 머물러 있으며, 야만의 공간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전통의 파괴자, 혁명가의 유산은 중국을 또 다른 길로 이끌었다. 전통과의 단절, 혁명의 경험은 중국의 독특한 현재를 낳았다. 거꾸로 21세기 경제적 부상과 함께 전통에 대한 재해석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루쉰에게 빼앗긴 자리를 공자가 되찾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혁명의 열정과 광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홍콩을 진압하는 인민해방군'이라는 표현은 '해방'조차 낡고 무딘 표현이 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경제적 정치적 위상의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을 것이다. 19세기와 20세기가 변화를 강요당하는 시대였다면, 미완의 근대에 목마른 시기였다면 21세기는 이와 다른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과거의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지 않을까. 중국이 중국의 눈으로 과거를 기술하는 날도 머지않았다. 펑유란의 시도, 철학의 시민권이 필요 없어지는 시대도 도래할까? 


실재적이며 현재적인 변화는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중국을 이해할 것인가'라는 물음이 중요했다면 '앞으로는 중국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도 중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가깝게 위치한 탓에 중국에게 적잖은 영향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으로 대표되는 보편 세계 속에 포섭되었던 세계를 중국의 행보가 적잖이 깨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그 균열이 드문드문 보이고 있다.


<진격의 거인>은 거대한 초대형 거인이 나타나 성벽을 깨뜨리며 시작한다. 의도치 않은 충격 속에 사람들은 길을 몰라 헤맨다. 이 만화를 낳은 일본은 이미 비슷한 충격을 경험한 적이 있다. 흑선, 커다란 검은 배가 나타나 변화를 강요했다. 서구 제국의 침입은 유래 없는 낯선 충격이었다. 또다시 충격이 도래하지 않을까? 혹자는 <진격의 거인>에 나타난 초대형 거인이 중국을 형상화한 것이라 이야기하기도 했다. 한동안 무시했지만 갑자기 커다란 덩치로 일상을 뒤흔드는. 사실 이보다 더 전에 미조구치 유조는 <중국의 충격>이라는 책에서 이미 경고를 한 적이 있다. 거대한 덩치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저 고개를 돌리고 있어 쳐다보지 못했을 뿐이다.


극동, 동쪽 끝에 위치한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의 시선은 대부분 태평양 너머를 향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고개를 돌릴 줄 모른다. 보지 않으니 알 수도 없다. 더 문제는 알고 싶지도 않고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 그러나 진격의 발걸음은 쉬이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눈앞에 까마득한 높이의 거인이 등장했을 때 그 충격은 어떨까? 


나에게 중국 철학이란 중국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철학에 그치지 않는다. 해석의 대상으로 중국도 중요하다. 그러나 거꾸로 새로운 방법, 가능성, 실험으로서의 중국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래도록 고개를 돌리지 않았던 까닭에, 해석하고 읽어낼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면은 별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또 다른 식의 중국도 가능하지 않을까? 도래할 중국, 생성될 중국의 철학. 그런 면에서 중국철학사는 또 계속 쓰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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