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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아나키즘] 농경의배신 7장 야만인들의 황금시대 발제2020-03-31 01:3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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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 농경의 배신/7장 야만인들의 황금시대 발제 _ 0331 아라차



국가는 문명과 야만의 합동 작품



원시인류는 불을 사용하면서 독보적인 생태적 지위를 확보하고 식물과 동물을 길들여 농경과 목축을 시작함으로써 더욱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했다. 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성과가 곧바로 수렵·채집 등의 이동생활을 포기하고 일정한 경작지에서 작물을 재배하며 가축을 기르는 완전한 정착생활로 자연스레 이어진 것은 아니며, 더욱이 정착생활이 이뤄졌다고 해서 필연적으로 국가가 성립되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초기 국가 성립의 필수조건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곡물’이다. 집중적인 노동력 투입으로 곡물이 착실히 재배된 까닭은 안정적인 조세수입과 인력 동원을 전제로 해야만 성립될 수 있는 국가의 강제 때문이었다.


국가는 생태적으로 관개가 잘되는 비옥한 토양이 있는 지역에 한정적으로 들어섰다. 그 배후지에는 통치되지 않는, 엄밀히 말하자면 아직 통치되지 않는 (국가 중심의 관점에서 보기에) 야만인 또는 미개인이 통치하는 지역이 있었다. 야만인들은 흩어져 있었고 이동이 매우 자유로웠으며 소규모 정착지에서 살았다. 그들은 이동식으로 경작하거나 소나 양을 치고, 물고기를 잡거나 수렵·채집을 하고 수집한 물건들을 소규모로 교환했다. 곡물을 길러서 먹었을지도 모르지만 국가의 국민처럼 곡물을 그들의 지배적인 주식으로 삼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동성, 다양한 생계 방식, 분산된 거주지 때문에 국가 건설에 적합한 구성원이 될 수 없었고, 바로 이러한 이유로 야만인이라 불렸다. 


국가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비국가 민족(종족)들에 대한 헤게모니를 장악할 때까지의 기간은 ‘야만인들의 황금시대’ 같은 것이었다. 국가가 너무 강하지 않는 한 야만인이 되는 것이 여러 면에서 나았던 시절이다. 국가는 약탈을 하거나 조공을 요구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야만인들이 군침을 흘릴만한 장소였다. 교역 장소로도 제격이었다. 한 국가의 인구와 부가 늘어남에 따라 근처 야만인들과의 상업적 교류도 함께 늘어났다. 약탈과 교역은 여러 면에서 국정 운영 기술의 어떤 행태들과 비슷하게 매우 효과적으로 결합되었다. 야만인들은 증가하는 교역을 이용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독특한 위치에 있었다. 몇 가지 생태 구역에 걸쳐 분산되어 이동하며 살아가는 생활 방식 덕분에 다양한 곡물 집약적 정착 국가들 사이의 연결 조직이 되었다. 교역이 증가하자 이동하고 생활하는 야만인들은 교역의 동맥과 모세혈관을 지배하고 조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집중화된 곡물과 인구와 가축은 국가 권력의 원천이 되는 한편 습격에는 취약했다. 이동하는 습격자들은, 특히 말을 타는 경우, 자신들이 선택한 시간과 장소에 도착해서 충분한 인원을 동원해 정착 공동체의 가장 약한 지점을 공략했다. 근대 이전의 환경에서는 목축민의 유동적 군대는 귀족 및 소농으로 이루어진 국가의 군대보다 일반적으로 더 뛰어났다. “습격이야말로 우리의 농사다”라는 베르베르족의 유명한 속담은 의미심장하다. 몽골의 습격자들은 상대적으로 중국의 반격으로부터 자유로웠는데, 이는 유목민 습격자들이 고정된 자산이 없다는 점이 군사적으로 매우 유리했기 때문이다. 육지 목축민들이 육로를 통한 대상을 먹이로 삼았듯, 바다 유목민들은 해적질을 통해, 크게 성장한 지중해 무역을 먹이로 삼았다. 


유목민 변방 지역과 인근의 국가 관계는 다양한 형태를 띠었고 변동이 매우 심했다.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일 때는 유목민이 이따금씩 습격을 가하면 국가의 군대에서 한 두 번씩 반격을 가했다. 습격하지 않는 데 대한 대가로 야만인들이 곡물 핵심부의 수익 일부를 받게 된 협약들은 국가와 야만인들에 의한 사실상의 합동 주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한편에서는 유목민 야만인들이 국가나 제국을 정복하고 새로운 통치 계층이 되기도 했다. 몽골족의 원과 만주족의 청이 그 예다. 유목민이 국가의 기병/용병이 되어 국경을 순찰하고 다른 야만인들을 저지하는 형태도 있었다. 교역의 특권과 지역적 자율권을 대가로 내걸고 야만인들을 용병으로 삼는 것이다. 유목하는 목축인이 교역 시장으로서만이 아니라 인력과 수익의 창고로서 정착 공동체를 필요로 했다는 주장도 있다. 목축인들은 이런 창고를 만들기 위해 농경 인구 집단을 강압적으로 이주시켜 다시 정착시키기도 했다. 


후기 야만인들의 삶은 모든 것을 감안해 볼 때 그럭저럭 좋았을 것이다. 생계수단은 여전히 몇 가지 먹이그물에 걸쳐 있었고, 분산되어 살았던 만큼 한 가지 식량 공급원이 잘못되더라도 영향을 덜 받았을 것이다. 그들은 더 건강하고 더 오래 살았을 것이다. 더 유리한 교역을 하게 되어 많은 여가 시간이 생겼을 테고, 노동 대비 여가 시간의 비율은 매여있는 농경민에 비해 훨씬 높았을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농경생활과 국가의 위계적 사회 질서에 예속되거나 길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야만인들의 황금시대에도 암울한 측면이 있었다. 교역 상품 가운데는 속박되어 국가 핵심부로 팔려갈 수 있는 비국가 종족들이 많았다. 그들은 더 약하고 분산되어 있는 동료 야만인들을 희생시켜 국가 핵심부를 강화했던 셈이다. 야만인들은 용병으로서 자신들의 군사기술을 국가에 팔아 도망간 노예를 잡아오거나 반항적인 집단의 폭동을 진압해야 했다. 야만인 징병은 국가 약탈만큼이나 국가 건설과 관계가 있었다. 


국가는 야만에서 문명으로 진화한 결과물이 아니다. 문명과 야만이 확실히 구분되는 것도 아니다. ‘야만인’과 ‘문명인’은 현실적으로나 기호학적으로나 쌍둥이다. 국가가 강화된 역사에서 야만인들의 활약을 무시할 수 없는데도 ‘스타’ 야만인들의 기록은 궁정 필경사들에 의해 왜곡되었다. 궁정 필경사들이 쓴 비국가 민족(종족)들의 역사는 ‘야만인들의 역사’라는 목록으로 정리되어 문서고에 보관되었다. 문서고 바깥에서, 역사의 공백에서 야만인들의 역사를 추적해 보아야 한다. 어쩌면 그곳에 다양한 생존 전략에 능통했던 자유로운 능력자들의 비법이 숨어있을 것이다. 한 가지 노동에만 특화되어 쳇바퀴를 도는 게 아닌, 그때 그때 방법을 달리할 수 있었던 발랄했던 인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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