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취투북] <노자가 옳았다> #1 - 오직 변화만 있을뿐 2021-01-12 17:3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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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런치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zziraci/468


일단 몇 가지. 우선 <노자가 옳았다>는 도올의 노자 해석이다. 도올은 문제적 인물임에 분명하다. 그가 TV 강단에서 동양 고전에 대해 이야기하던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를 환영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이른바 동양학을 한다는 사람도 혹은 서양 철학을 한다는 사람도, 지식인이네 하는 사람 가운데도 그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누구는 그를 두고 사기꾼이라고 손가락질하기도 했다.


이 바닥에 있으면 한 번쯤은 언급하게 되는 인물이다. 도서관 등에서 강의하다 도올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늘 비슷하게 답한다. 그렇게까지 비난받을 인물은 아니라고. 나름 꽤 열심히 공부했고 박학다식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어조가 강하고 문체가 독특하나 근거 없이 틀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그리고 덧붙인다. 그의 책은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어 공부하기에 좋다고. 실상 여기에는 읽기 좋은 책은 아니라는 이야기가 숨겨 있기도 하다.


오랜만에 도올의 책을 읽었다. 두루 섭렵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오는 족족 대부분 눈여겨보는 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완독한 책은 몇 없다. <논어한글역주> 정도나 될까. 그의 방대한 서술을 따라갈 공력이 없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장황한 언사를 따라갈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종종 이런 말이 욱욱 솟아오르기도 했다. '돌아가지 말고 곧장 갑시다.' 그러나 도올은 도올이다. 플라톤과 파르메니데스, 헤겔을 거쳐 박세당과 이충익, 원효와 최제우, 최치원까지… 종횡무진 그를 따라가는 것이 버겁다.


유튜브 채널을 통해 도올의 <노자가 옳았다>를 읽자고 제안하면서 고민이 많았다. 스스로 '강사'라는 이름을 붙였으나 이것이 어울리는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일단은 도올의 책을 숙지하고 이해한다는 것도 어려울뿐더러, 그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끄덕이며 듣지도 않기 때문이다. <노자>만 두고 이야기하면 아무래도 나의 해석은 도올의 것과 좀 다르다. 


도올의 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의 글을 요약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아주 단출하게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서구 철학에 대한 비판', 여기 서구 철학에는 다양한 내용이 들어갈 수 있다. 이성 중심, 존재론, 관념론, 유일신… 등등. 이는 도올이 줄곧 비판하던 것들이다. 그러나 이를 <노자> 1장의 내용을 빌어 <주역 계사전>, <대승기신론>, <동경대전> 등과 연결시키며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을 일일이 다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일부를 뽑아 이를 정리하는 데에 만족하도록 하자. 스스로 '강사'라고 하였으나 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좀 정리하는 역할이라는 점을 짚어두자. 가능하면 저자의 이야기를 옮기고 해설하는데 치중하도록 하자.


저자는 <노자> 1장이 전체 81장의 내용을 포괄하는 '대전제(16쪽)'와도 같다 이야기한다. 여기서 도올이 주목하는 것은 '상常'이라는 표현이다. 그는 이를 '늘 그러함'으로 풀이하였다. 이렇게 본 것은 불변의 초월적 존재가 서구 철학의 특징이라 보기 때문이다. '영원불변의 도'라고 풀이한 해석은 잘못되었다.


내가 대만대학 철학과 대학원에서 황 똥메이 교수의 <도덕경> 강의를 들었을 때, "상도"의 "상"을 "changeless"의 불변성으로 이해하는 모든 사상가들을 싸잡아 폄하하면서, 중국인의 세계관, 주역적 우주관 속에는 "changeless"라곤 없다! "changeless-less"만 있을 뿐이다라고 막 역정을 내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되살아난다.(25쪽)


'존재'라는 표현도 낯설기는 마찬가지이다. 요컨대 오직 변화만이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이 변하고 있다는 자체가 중요하다. 이 변화의 세계를 초월한 세계는 따로 없다. '형이상학'이라는 말로 우리는 초월적 세계를 상상하곤 하지만, 이 역시 서구 철학을 번역하면서 생긴 하나의 오독이다.


그러나 실상 '메타퓌지카metaphysika'는 자연학에 포섭되는 성격의 것이 아니며, 경험적 대상을 초월한 초감성적 초자연 세계를 다루고 있으므로 차라리 "트란스퓌지카transphysika"라 이름해야 옳다. 그런데 이 "메타퓌직스"를 일본학자들이 <주역> <계사>의 메시지를 원용하여 "형이상학形而上學"이라고 번역했다. 그래서 마치 "형이상자形而上者"가 형形을 초월하는 초감각적 세계를 지칭하는 것처럼, 엉뚱하게도 서양철학 역어의 함의에 따라 왜곡되는 무지한 현상이 벌어졌다. (33쪽)


따라서 모든 것은 형形, 즉 생성 변화 가운데 있다. 따로 초월적 자리를 상정하지 않는 것. 이러한 전통을 따라 이 세계에 주목하는 것이야 말로 <노자>의 철학을 잇는 사유라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도올은 신유학 역시 서구적 사유의 영향을 받아 수립한 철학이라 평한다. 리理 같은 것에 몰두하며 인욕人欲을 배척하는 게 아니라 무욕無欲과 유욕有欲이 병존, 공존하는(70쪽) 세계의 실상을 볼 필요가 있다. 


이문二門에서 중요한 것은 진여문이 아니라 생멸문이다. 진여문은 "불생불멸"이라 하지만 그것은 시간의 초월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대승의 사상에 있어서는 진여문이 생멸문 속으로 융합되지 않으면 일심(큰 마음, 우주 마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생멸문과 진여문의 구극적 일체성은 곧 대승의 가장 핵심적 진지이다.(66쪽)


생멸문을 빠져나와 진여문으로 들어가는 것, 오욕의 삶에서 벗어나 초월적 세계로 투신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생멸문과 진여문을 함께 보는 것, 나아가 투철하게 생멸문으로 뛰어드는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이에 대한 저자의 입장은 병존과 공존을 더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此兩者同出而異名'을 '此兩者同, 出而異名'으로 끊어 읽는 데서도 볼 수 있다. 통상적으로는 '此兩者,同出而異名'으로 풀이하나 도올은 이와는 달리 풀이한다. 둘을 포괄하는 더 커다란 의미를 찾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이 현玄, '가믈다'는 풀이로 이어진다. 


"차양자동此兩者同"을 아랫 문장과 연속해서 읽는 용법도 있다. "이 양자는 같은 곳으로부터 나와 다른 이름을 갖게 되었을 뿐이다." 결국 대차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그러한 독법을 취하지 않는다. 차양자동! 진여와 생멸은 하나다! 본체와 현상은 하나다! 나의 현존과 지향점은 하나다! 훨씬 더 강력한 선포적 의미를 지닌다.(73쪽)


<노자>의 '현玄'이 검다는 뜻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볼 수 있다. 도올 역시 이를 '검다'고 풀이해서는 안 된다 말한다. 도리어 그는 흥미로운 표현을 소개한다 "가물가물하다"는 말이 비슷하다는 거다.(78쪽) 결국 가물가물한 데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만 보면 흐릿하게 침잠하는 것처럼 보이나 저자의 방향은 반대이다. 여기서 신비로움(神), 형용사 혹은 부사로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독자는 내가 평생 주장해온 한마디를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 혹은 부사이다." 동지위현의 논리로 말하면, 하나님은 도저히 명사가 될 수 없다. 명사가 된다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존재물로서 전락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명사로서 실체적 속박 속에 갇힌다는 것을 의미한다. … 

동방인들에게 "신神"은 명사로 쓰인 적이 없으며, "신비롭다," "초감성적이다," "거룩하다," "신성하다, "신적이다," "신기하다"라는 형용사로서 쓰여왔다. …

같음을 가믈타고 일컫는다. 그것은 규정이 아닌 기술이요, 정의가 아닌 형용이요, 언어의 속박이 아닌 느낌의 무한한 개방이다. (80쪽)


도올의 문체는 호방한 면이 있다. 이점이 논문을 쓰는 학계의 지식인과 다른 점일 테다. 이렇게 한 발을 내디뎠다. <노자> 1장에서 벌써 많은 이야기를 했다. 과연 앞으로 또 무슨 이야기들을 늘어놓을지. 지켜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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