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차이나] 탈정치시대의 정치 1장- ‘중국 혐오 시대’ 중국 공부의 어려움2021-07-20 02: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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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혐오 시대 중국 공부의 어려움

 

에레혼

 

 

 

2020년은 중국 연구자들에게 의미 있는 해로 기록될 것이다. 단순히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만은 아니다. 코로나가 중요했다면 발발 원년인 2019년을 이야기했으리라. 중국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머리가 복잡해진 것은 2020, 즉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반응들이 터져 나온 시점이다. 세계를 향한 안하무인한 태도, 투명하지 않은 확진자 파악 실태, 굳게 닫힌 국경과 거침없는 입국자에 대한 관리,…… 중국의 모든 행보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중국에 대한 혐오는 꾸준히 잘 팔리는 상품이었으나, 2020년 이래로 유래 없는 인기를 구가 중이다.

몇 년 전에 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고, 중국 연구자에 드리우는 사회의 잣대를 개탄한 적이 있다. “중국 연구자는 반중과 친중이라는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을 종용받는다.2021년에 다시 이 문장을 읽으니 당시의 개탄은 그저 엄살이었을 따름이다. 찬반이라는 이지선다 선택지라도 있던 시절은 그래도 인간적인 때였다. 지금 중국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은 답변하는 사람의 의중을 읽어내려 애쓴다. 중국에 대해 유보적 입장을 취하는 일조차 중국에 동조하는 것으로 해석되기 마련이다.

“중국에 동조하면 좀 어때서?” 혹자는 중국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진 요즘이야 말로 중국 연구자들이 활약할 수 있는 적기라고 이야기한다. 지금까지 늘어놓은 비관적 진단은 욕심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 약 한 번 먹어보라며 백방으로 뛰어다녀도 항상 파리만 날리는 상황이 2021년 중국학이 처한 상황이라면, 중국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고 따로 영업을 하지 않아도 되는 때는 생생한 과거였다.

《탈정치 시대의 정치》는 이처럼 ‘호시절’에 대한 추억과 현 시국에 대한 푸념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저자 왕후이가 원고를 집필하던 시점에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전세계의 좌파 지식인들이 중국을 기대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중국 굴기의 경험과 그들이 직면한 도전>에는 여러 나라 좌파 지식인들의 우환의식에 대한 왕후이의 호응이 담겨있다.

…… 일부 경제학자는 이번 위기(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가 단지 일반적인 금융 위기가 아니고, 단순히 금융파생상품이 문제만도 아니며, 생산과잉이라는 근원에서 초래된 경제 위기라고 지적했다. (45)

논쟁이 된 또 다른 문제는 이번 위기가 주기적인 것인가 아니면 구조적인 것인가라는 관점이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양자의 측면이 서로 얽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 현재 시점에서 볼 때, 경제 상황은 회복하여 호전될 가능성이 있으니 위기를 주기적인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본래의 구조로 회복될 수 있다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46-47)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신자유주의 진영의 추악함을 보여준 사건이었으며, 당시 “그래도 합리적인 판단을 하고 있었던” 중국의 모습은 신자유주의 혹은 미국에 대한 비판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반중만큼이나 반미 역시 국제적 스테디셀러 중 하나였기 때문에, 중국 신좌파의 부상은 반미반신자유주의 진영에게 인상깊은 사건이었다.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기대-호응]의 구조가 한 때의 유행처럼 우스워 보일 수 있다. 다들 중국에게 “낚여서” 희망을 걸었다며 신좌파를 지지한 이들을 조롱하는 사람도 있을테고, 이 또한 서구권이 동양에서 대안을 찾는 신형 오리엔탈리즘이라고 진단하는 이도 있겠지. 그렇다면 지금 《탈정치 시대의 정치》를 읽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회고와 애도의 방식 말고는 이 텍스트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독해의 포인트를 제대로 짚을 필요가 있다. 내가 주목한 부분은 왕후이의 말을 통해 “중국 특색”이라는 개념을 다시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중국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십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2010년 언저리에 최고조에 달한 중국에 대한 열망은 저마다의 열망이기도 했다. 중국에게 기대를 걸던 사람들은 신좌파라 불리는 세력이 자국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반만 맞는 말이다. 신좌파로 분류되는 이들은 중국이 나아가는 방향에 대해 서슴없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이들 역시 체제 안에서의 혁신을 논의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신좌파는 현재 중국이 ‘더 빨갛게 변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다.” 누군가 만들어낸 이 말은 신좌파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문구이다. 왕후이 역시 1장의 글에서부터 “신좌파도 어쨌든 중국 체제의 수호자”라는 기본 틀은 벗어나지 않는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중소 갈등에 대한 해석이다. 왕후이는 공산주의 진영에서 중국이 취한 독자 노선이 독단과 우발적 태도로 일어난 것이라며 과정에 치중하는 분석틀을 택하지 않는다. 그는 자주적 노선이라는 외교 문제의 결과물에 집중하여, 이것이 이후 개혁개방의 전제 조건 중 하나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발생한 일을 결과론적으로 분석하는 태도는 지나치게 중국적이라서 비판적 목소리를 기대한 누군가에게는 실망감을 안길 수도 있다.

…… 이런 정치적 위상을 바탕으로 국민경제와 공업에서도 고도로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체제를 형성했다. 이런 자주성이 전제되지 않았다면 중국의 개혁개방의 길은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1989년 이후 중국의 운명도 가늠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9)

왕후이를 비판적 지성의 이미지로 간주하고, 그를 입맛대로 해석하게 되는 것은 신좌파를 좁은 시야로 이해하는 것이다. 중국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이 반드시 그 체제에 대한 전복을 요구하란 법은 없다. 다음과 같은 구절도 오독하기 쉬운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해야 보통 인민의 목소리가 공공영역에서 표출될 수 있는가? 진정한 언론의 자유와 협상의 메커니즘과 관민의 상호작용을 통해 국가와 정당의 기본 노선과 정책을 끊임없이 조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국내와 국외의 역량을 흡수하여 가장 광범위한 민주를 형성할 수 있는가? …… 중국의 정치변혁 문제를 생각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감안하여 민주의 경로를 구상해야 한다. (43)

이론의 여지가 있겠지만, 중국 내에서는 민주라는 단어를 제시하는 무리가 꾸준히 존재했다. 이들이 꿈꾸는 것은 사회주의 내의 민주, 정당 내의 민주가 올바르게 작동되는 상황이다. 대표적으로, 많은 이들이 민주라는 키워드를 의도적으로 오해하는 사건이 1989년 천안문 시위이다. 당시 공산당이 천안문 시위대를 반동 세력으로 규정하자, 시위대는 자신들을 애국자라고 바꿔서 불러줄 것을 요구했다. 중국 내에서 활동하는 인물들이 언급하는 민주는 공산주의에 반하는 개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늘 왜곡되어 이해되었다. 아마도 왕후이를 만나는 4주의 시간은 중국적 특수성을 지닌 맥락을 가진 키워드들을 면밀히 분석해볼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신좌파가 신선한 이야기를 하는 집단으로 보이더라도, 이들 또한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나면 다음과 같은 키워드에서도 기시감을 느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중국의 현대적인 국제주의 전통이 새롭게 다시 제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혁명을 수출하는 식의 국제주의가 아니라, 3세계 국가의 생존과 발전 그리고 사회적 권리에 진정으로 관심을 두고 그들을 존중하며, 글로벌 범위에서 평등과 민주와 공동 발전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55) 글 한 편만 보고서 단정짓기는 이르지만 신좌파도 결국 “미국식 패권/이전 시기의 자본주의”를 대체할 요소가 중국에 있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다.

다시 시계를 2021년으로 돌려보자. 중국 내에서 신좌파의 입지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어떤 중국인이 중국의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하더라도) “중국이 세계 질서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는 결말”을 이야기하는 이론 구상 패턴은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중국 혐오의 시대에 어느 누구도 중국이 관심 끌려고 하는 행동에 고개를 돌리려고 하지 않지만, 그들의 행동은 항상 과하다. 과해서 무시할 수 없고, 무시해도 중국은 이미 알아서 움직이는 중이다.

《탈정치 시대의 정치》를 읽기 전에도, 이 책을 보고 나면 복잡한 생각이 들 것이라 예상했다. 책을 읽은 결과는 예상보다 훨씬 참담하다. 중국 고전 연구는 박쥐와 같은 태도를 택하기 좋아서, 이런 텍스트를 볼 때 스스로를 반성하게 된다. 중국을 둘러 싼 상황이 복잡할 때는 고전 텍스트 안으로 숨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리고 원문 텍스트만 붙들고 분석하는 방식은 중국 본토에서 가장 훌륭한 고전 연구 방법론이라 공인되어있다.) 하지만 중국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자리가 생기면, 중국 고전 연구자에서 중간 어절을 괄호처리 해버리고 “중국통”인 척하기 좋은 위치가 딱 지금 고전 연구자의 설 자리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2021년에 중국 현실 정치에 대한 텍스트를 보는 일은 나에게 난관으로 다가온다. 이것이 나와 관련된 필드가 아니면서 동시에 내가 장악하고 있어야 할 중국의 현실이기에. , 중국 혐오의 시대에 중국 연구자들이 도망칠 방법은 하나가 더 있긴 하다. 중국어와 관련된 분야로 도피해버리는 것. 중문학도들이 평생에 걸쳐 주변사람들에게 듣는 “중국어 잘하면 굶어죽지는 않는다”는 말은, “기능으로 활용 가능한 중국 관련 지식”만이 환영받는 지금 시점을 겨냥한 예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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