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포스트휴먼] 소수자가 되기 위해 읽고 쓰기2021-07-28 13:4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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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신: 되기의 유물론을 향해2장 들뢰즈와 페미니즘을 지그재그하기

 

로지 브라이도티는 들뢰즈의 충실하지 않은 딸을 자처하면서, 들뢰즈의 텍스트를 경전화하기를 거부한다. 텍스트를 경전화하지 않는 태도 역시 들뢰즈로부터 물려받은 태도이다. 경전화 대신 남는 것은 여성으로서 되기를 집요하게 사유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이 철학적 유목주의와 닿아있다. 들뢰즈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상가들의 가장 긍정적인 면을 유지하고 반복하고 향상한다. 이 과정은 학문으로서 철학의 경계를 확장하며 사유 자체를 다르게 보게 만든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들뢰즈가 철학을 바라보는 관점을 빌려, 철학적 텍스트가 열정을 폭발시킨다고 말한다.

 

사유의 문제에서도 쾌락은 중요하다. 들뢰즈는 비극적 엄숙함보다 즐겁고 관대한 불복종을 실천했다. 들뢰즈가 정신분석과 가장 멀어지는 지점은 결핍과 부재를 강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들뢰즈에게 욕망은 결핍에서 비롯되지 않으며, 여성성은 상징적인 부재로 설명되지 않는다. 들뢰즈가 거부하는 (결핍과 부재를 강조하는) 오이디푸스적 방식으로는 들뢰즈주의자가 될 수 없다. 들뢰즈를 추종하는 남성들에게서 주로 오이디푸스적 방식이 발견된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그런 남성들이 들뢰즈를 따르려면 우선 여성 되기가 필요함을 주장한다.

 

들뢰즈가 강조하는 소수자 되기의 흐름 속에서도 여성 되기는 중요한 부분이다. 소수자 되기는 서구 사유에서 동일자로만 설명되었던 주체를 고발하고, 차이를 변증법에서 분리한다. 들뢰즈에게 차이는 동일자의 사유로 환원되지 않는 차이 그 자체이다. 차이는 긍정을 넘어 적극적으로 생산되어야 하며, 리좀적 사유가 이런 생산에 부합한다. 들뢰즈에게 사유는 감각과 가치로 구성되며, 가치는 고정되지 않는 강도의 힘으로 나타난다.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힘은 의지와 정신보다, 무의식이나 신체와 더 가까운 정동의 힘이다.

 

사유를 다르게 보는 들뢰즈와 푸코의 관점 속에서 철학은 더 이상 로고스에 대한 온전한 사랑이 아니다. 로고스를 사랑하는 동시에 혐오하는 일이 된 철학은, 되기라는 변형을 통해서만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 동일자에서 벗어난 소수자적 주체는 변신을 적극적으로 욕망한다. 물질적인 육체에 기반하며 통일적 주체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난 이 주체는 소수자로서 자신을 대면한다. 들뢰즈의 영향을 받은 페미니스트인 이리가레 역시 주체를 실체가 아닌 과정으로 바라본다. 이리가레에게 주체는 언제나 되어가는 과정이며, 이 과정을 지탱하는 것은 욕망이다.

 

로지 브라이도티나 이리가레가 들뢰즈의 여성 되기를 전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들뢰즈는 여성운동이 분자적 되기를 향해 가면서 몰적인형태를 경유한다고 이해한다. 여성이 자신들의 역사와 주체성을 되찾으려는 관점에서, 대문자 여성은 필요한 동시에 위험한 존재라고 경고한다. 들뢰즈는 유목적 주체를 젠더를 넘어서는 주체로 이해하며, 니체의 관점을 가져와 페미니즘이 노예의 도덕성을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들뢰즈가 이런 주장을 하는 전제에는 성차를 대칭적 문제로 보며 양성이 동등하다는 판단이 깔려있다고 비판한다.

 

들뢰즈는 주체를 해체하는 일에 몰두하지만, 여성은 주체가 되어본 적이 없다. 서구 철학의 역사에서 주체가 나타나고 해체되는 과정은 모두 유럽의 백인 남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들뢰즈는 서구 철학의 역사와 주체 개념을 비판하면서도, 이런 잘못을 되풀이한다. 대문자 팔루스에 기초한 모든 정체성을 해체하려는 들뢰즈는 여성성 역시 해체해버리려 한다. 들뢰즈의 딸을 자처하는 페미니스트는 이런 실수를 지적하고 보완하면서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 바로 남성 철학자들이 무시하고 부인하는 성차의 문제에서 여성 되기를 시작하는 일이다.

 

여성은 주체를 해체하기 위해 주체가 된다. 젠더가 단지 구분이 아닌 역사적 불평등의 문제임을 인식하는 여성은 페미니즘이 지배적 헤게모니를 은폐한다는 비난을 반박하고 넘어선다. 페미니즘이 몰적 형태라면, 페미니즘은 역사적 시간 체계와 사회적 변화 전체에 작용한다. 페미니즘에는 다수자의 철학을 은폐하는 시선에 대한 회의가 녹아있다. 들뢰즈를 계승하는 페미니즘 철학은 들뢰즈의 모든 사유를 경전화하지 않는다. 들뢰즈가 자신이 좋아하던 철학자에게 했던 그대로, 그의 사유에서 가장 긍정적인 면을 유지하고 반복하고 향상한다.

 

들뢰즈를 계승하려는 남성 철학자들이 빠지는 위험 중 하나는 되기를 목표로 간주하는 일이다. 주체를 과정으로 간주하는 되기는 페미니즘 정치를 재정의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때로는 위험에 빠지기도 하지만 남성 철학자들 역시 들뢰즈를 조심스럽게 해석하고 연구하면서 페미니즘에 영감을 준다. 물론 들뢰즈 연구 자체도 이미 젠더화된 측면이 있다. 들뢰즈의 사회 정치적 텍스트는 주로 남성들이, 문화적 혹은 미학적 텍스트는 여성들이 담당하면서 들뢰즈 이해가 젠더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남성들은 들뢰즈가 강조한 문학적 특성에서 점점 멀어진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철학 자체의 창조적 되기가 들뢰즈의 근본적 유산이라고 주장한다. 초학제적 폭넓은 지식을 자랑했던 들뢰즈는, 철학이 긍정의 창의성 속에서 확장을 통해 스스로를 새롭게 한다고 여겼다. 사유가 낳는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힘에 대한 믿음의 기반은 글쓰기와 문학에 대한 들뢰즈의 사랑이다. ‘들뢰즈에게 글쓰기는 소수자 되기와 여성 되기 과정과 유사하다.’(184) 들뢰즈의 철학적 유목주의는 문학 텍스트를 선호한다. 문학 텍스트는 되기의 과정들과 결합하여 를 불안하게 만들면서 삶의 잠재적 가능성을 강력하게 긍정한다.

 

들뢰즈는 텍스트에 접근하는 저자와 독자의 전통적 특권을 거부한다. 저자와 독자는 아는 주체가 아니며, 진정한 해석의 소유자가 될 수도 없다. 들뢰즈의 텍스트 해석은 해석을 거부하는 움직임이며, 재현-의식 모델이 아닌 인식-의식 결합을 강조하는 모델로 대체된다. ‘읽기와 쓰기는 결과적으로 소수자 되기 과정의 순간들로 재정의된다.’(188) 텍스트는 해석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동적 연결이나 연결 끊기를 위해 존재한다. 들뢰즈에게 텍스트는 독자를 내쫓아서 되기의 과정을 촉발하며, 글쓰기는 정동적 재조직과 뒤섞기를 가능하게 한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들뢰즈의 철학적 유목론을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변주로 이해한다. 유목적 힘이 창조성에서 나온다면, 들뢰즈가 제기하는 문제는 감성과 정동성, 욕망의 문제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들뢰즈가 욕망을 결핍과 연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들뢰즈는 욕동을 중요하게 본다는 점에서는 정신분석에 우호적이지만, 욕동을 의식과 합리성에 다시 예속시키려 한다는 점에서는 정신분석에 비판적이다. 이 점에서 정신분석학이 가진 힘은 도덕적이고 부정적인 힘이다. 유목적 철학은 이 부정적 힘에서 벗어나 욕망을 되기의 긍정적 양태로 현실화시키려 한다.

 

주체는 의식적인 자아와 일치하지 않는다. 주체를 이해하는 열쇠는 의식보다 신체에 있다. 주체는 관계에 대한 체화된 역량이며, 이 역량은 욕망에서 비롯된다.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욕망을 좀 더 신뢰할 필요가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을 부정적으로 파악하려는 많은 시도를 전복시키려 노력한다. 주체를 욕망하는 실재로 보면서 욕망의 체제를 부정에서 긍정으로 바꾸려는 이런 시도는 자본주의 안에서 정치적 패러다임을 바꿀 필요성과도 관련된다. 우리가 욕망을 결핍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자본주의의 사회경제적 조건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삶에서 욕망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드는 사회적 조건들은 무수히 많다. 욕망을 부정하고 기관 없는 신체로 존재(되기가 아닌)하는 여성들의 우울은 사회적 억압과 증상을 반영한다. 반면에 드러내고 말하고 사랑하려는 다이애나의 욕망은 그 자체로 전복적이다. 자신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일들을 추구했던 다이애나의 삶은 소수자와 정동으로 연결된다. 여성들은 욕망과 정동을 통해 정체성 정치 자체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되기와 배치를 사유한다. 욕망이 우리를 어떤 배치에 들어가게 할지를 눈여겨보아야 한다.

 

되기는 미시적인 변화이지만 지배 구조를 해체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한 번의 혁명을 통해 모든 것이 바뀐다는 환상은, 끊임없는 반복을 통한 미세한 변화에 대한 믿음으로 대체한다. 창의적인 되기가 끊임없이 우리를 변형시킨다. 되기를 통해 우리는 점점 소수적 존재가 된다. 의식보다 신체에 기반하며 정동으로 연결되는 우리가 된다. 동일자의 환상에서 벗어난 우리는 읽고 쓰기를 통해 적극적으로 욕망하면서 소수자가 되려 한다. 지배적 구조를 해체하며 변형시키는 파괴적 힘이 소수자에게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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