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탈식민] 서발턴의 말을 듣는 이는 누구인가?2022-04-13 21:5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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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4부 동시대성과 가능한 미래들_5부 스피박의 응답 발제.hwp (75KB)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서발턴 개념의 역사에 관한 성찰들

4부 동시대성들과 가능한 미래들: 말하(지 않)기와 듣기

생명권력과 새로운 국제 재생산 노동 분업 - 펭 치아

서발터니티로부터 이동하기: 과테말라와 멕시코의 토착민 여성들 진 프랑코

5부 스피박의 응답

 

책의 막바지에 이르러 스피박이 처음 제기했던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혹은 우리는 서발턴의 말을 들을 수 있는가의 문제로 되돌아가 보고 싶다. 스피박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에서 서발턴의 말할 수 없음, 혹은 우리의 들을 수 없음이라는 결론을 폭탄처럼 던졌다. 그 폭탄은 서발턴의 서사를 재현하고 대표하려는 입장에 섰던 많은 탈식민 이론가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스피박은 자국의 노동자들을 격려하는 푸코와 들뢰즈를 비판하면서 글을 시작했다. 스피박이 보기에 자국의 노동자들을 격려하는 푸코와 들뢰즈의 행동은 국제노동 분업의 체계를 직시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아가 제3세계 서발턴의 목소리를 막아버린다. 스피박은 국가 간 혹은 계급처럼 거시적인 규모의 권력관계보다 미시적인 규모에 치중하는 푸코의 권력 분석에서 오는 위험을 설파한다.

 

이 책의 4부에 실린 펭 치아의 글은 스피박이 푸코를 비판하는 맥락에 주목한다. 무엇보다 펭 치아는 서발턴의 목소리를 복원했다는 이론가들의 주장이 국제노동 분업을 통한 자본주의와 공모하고 있다는 스피박의 주장에 공감한다. 이런 주장은 서발턴에 대한 인식론적 폭력에 일조한다.(303) 동시에 펭 치아는 이데올로기보다 권력의 효과에 주목하면서 생명권력의 매커니즘을 풀어가는 푸코의 이론이 제3세계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는 데 유용하다고 주장한다.

 

스피박은 미시권력 분석만으로 자본주의 착취관계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비판하지만, 펭 치아가 보기에 아시아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성 이주 가사노동자의 현실은 오히려 생명권력의 매커니즘으로 정교한 설명이 가능하다. 식민지에서 독립한 아시아의 신흥개발국들이 주변국의 이주노동을 활용하는 방식은 전통적인 식민주의나 중심-주변의 서사로는 말끔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사용자인 중간계급 여성과 이주노동자 여성 간에 이루어지는 착취와 대립은 페미니즘의 서사로도 봉합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여성 이주노동자들의 선택이 통치 테크놀로지 효과로 나타난 강한 욕망과 필요,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여성 노동을 국가가 활용하는 과정과 여성 이주노동자를 가사노동에 활용하는 과정은 자본주의와 국가 간 거래에서 구조적 합리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합리성이 아이러니하게도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을 비인간화시킨다. 이 노동을 규율하는 방식은 생명과 신체에 작용하는 규율이다.

 

온화한 국제주의를 지향하는 페미니즘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이주노동자의 노동과 신체는 더욱 강한 도구성을 가지게 되며, 인간을 도구로 보지 말라는 도덕적 명제는 나약하다. 도구적이지 않다면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다. 게일 루빈의 말대로 노동자에게는 아내가 필요하다. 여성 노동자에게도 가사노동자라는 아내가 필요하다. 이주 가사노동자를 탈인간화시켰던 테크놀로지는 다시 가사노동자의 인간다움을 긍정하는 방식으로 서로가 처한 위기를 모면하려 한다. 동시에 그들이 말하는 인간성 혹은 인권이 매우 자본주의적 형태임을 못 보게 한다.

 

이런 관계와 위기는 모두 개인의 선택이나 선의 혹은 악의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 구조 안에서 인구의 형태로 나타나는 일들이다. 아시아 안에서 국가 간 발전의 층위에 따라 이주노동자의 이동은 계속 일어난다. 경제 발전은 국가 내 인권을 제도화하지만, 시민사회의 이상으로 작동하는 이런 인권은 이주노동자의 현실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본은 인간을 만들어내고, 동시에 비인간도 만들어낸다.

 

펭 치아는, 자본주의이든 사회주의이든 경제적 성장과 이에 따른 재분배가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스피박의 주장에 동의한다. 어쩌면 스피박은 서발턴이 서발턴으로 머무르지 않고 서발터니티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듯 보인다. 스피박에게 서발터니티는 말할 수 없음, 자신을 재현할 수 없음과 같은 말이다. 스피박의 말대로라면 서발턴의 재현 불가능성은 가르치기 작업을 통해서만 깨질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 글에서 펭 치아는 자신이 언급한 아시아 이주노동자 여성들이 서발턴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하며, 재현의 가능성 문제를 비껴간다. 스피박이 서발턴 연구에 던진 폭탄은 서발턴 연구 자체가 아니라 재현의 가능성 문제로 향한다. 스피박은 지식인이 서발턴을 재현할 수 없으며, 함부로 재현해서도 안 되고, 재현해줄 필요 없이 스스로 재현할 수 있는 존재라고 추켜세워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이 논쟁이 무익하다고 본 펭 치아는 논쟁을 이탈한다.

 

스피박은 다만 가르칠 뿐이다. 그들이 말할 수 있는지, 투표할 수 있는지를 물으며. 가르치기라는 표현으로 스피박 글에서 생략된 주어가 누구인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스피박은 지식인 자신의 주체만큼 서발턴의 주체성에 몰입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와 혁명을 내세우는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이. 왜 스피박은 누군가를 서발턴이라고 칭하는 일과 재현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일에서 인식적 폭력의 냄새를 맡지 못하는가.

 

다시 스피박이 던진 질문 우리는 서발턴의 말을 들을 수 있는가?’로 돌아가 되묻고 싶다. 여기서 서발턴의 말을 듣는 이는 누구인가? 서발턴 연구자들을 포함한 지식인이다. 수많은 인용과 전문 용어, 철학 독해로 이루어진 텍스트를 읽고 충격에 빠질 이들도 지식인이다. 세계를 식민지와 피식민지로 나누듯, 어쩌면 스피박은 수많은 이들을 재현하는 존재와 재현되어야 하지만 재현 불가능한 존재로 나누어 버렸다. 문득 <스피박의 응답>을 읽으며 모호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서발턴인가, 아닌가? 나는 나를 재현할 수 있는가, 아닌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를 완벽하게 독해할 만큼 배우지 못한다면, 나는 언제나 재현 불가능한 서발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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