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리딩R&D] 판도라의 희망_사실과 물신을 단단히 묶어두어야 존재가 유지되는 이상한 세계2022-07-27 16:4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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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딩R&D <판도라의 희망> 0727 9장/결론 발제



사실과 물신을 단단히 묶어두어야 존재가 유지되는 이상한 세계



우리는 진리에 대해 너무 과도한 환상과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과학은 진리에 도달하는 가장 객관적인 도구처럼 여겨졌다. 브뤼노 라투르는 과학이 그렇게까지 객관적인 영역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적인 물질과 비물질적인 주체가 융합된 결과물임을 강조한다. 과학적 사실은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사물은 역사성을 가진다는 것. 분명히 이 책은 이런 주제에 대해 얘기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첫 질문이 “실재란 무엇인가?”(실제로는 실재를 믿는가였음)였다는 점을 기억하자. 물질적으로 확고하게 존재하는 바깥 세계와 그것을 인식하는 인간을 구분하면서 시작했다. 그 시작에는 아고라에 모여든 민중들과 민중을 통제하는 방법으로 이데아를 설파하는 철학자가 있었다고 했다. 살아서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비인간 개념을 만들어 살아있는 인간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게 그들의 목표라고 했다. 무지와 두려움에 쌓인 민중들은 (물론 힘은 있지만) 통제하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라투르는 언뜻 처음의 질문과 분리된 듯 보이는 두 번째 질문 “과학적 사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해 길게 설명했다. 표본과 표준을 만들고 설득과 승인의 과정을 거쳐 제도가 되는 과학적 사실의 사회적인 과정을 강조했다. 두 질문은 정치와는 분리된 철학과 과학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지식인들에게 충분히 일격을 가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브뤼노 라투르는 이제 “행위에 대한 약간의 놀라움”이라는 마지막 장을 쓴다. 진리도 과학도 모두 애매해진 카오스의 세상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기라도 할 작정인 것일까. 예상은 뒤집힌다. 라투르는 사실(Fact, 제조된다fabricate의 어원을 가진)과 페티쉬(fetish, 사물집착)를 조합하여 팩티쉬(Factish)라는 개념을 활용한다. 만약 실재가 구성된 것이라면 모든 것이 환영이고 스토리텔링이고 믿음일 뿐이라는 염세적 태도로 가버릴 수 있지만, 라투르의 팩티쉬는 “그것이 구성되었기 때문에 실제적이고,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믿음”을 그대로 두면서도 순진하게 속아 넘어가지는 말자는 것인데, 자간나트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사실과 물신을 단단히 묶어두어야 존재가 유지되는 이상한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에 “팩티쉬의 보호 아래(?)”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라투르는 결론에서 주체-객체 이분법을 통째로 폐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는 책 전반에서 여러 개념적 브리콜라주를 통해 이 이분법이 얼마나 완고한 설계로 이뤄져 있는지 보여주었다. 그가 제시한 방법은 주체-객체 이분법을 건드리지 않고, 이를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다른 쌍으로 대체하는 시도였다.(466p) 정말로 그랬다. 다른 쌍으로 대체하는 그의 시도는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라투르는 그 효과가 나타날 미래를 긍정하고 있다. 그가 강조하는 세부적인 사항은 다음과 같다. ⓵인식론이라는 인공물보다는 신체, 기구, 과학자들, 제도들로 혈관화된 사회가 더 진실을 말한다는 것 ⓶잠정적이지만 과학들(소문자 과학)의 실행을 보호하고 번영시킬 수 있는 혈관화 과정을 존중하는 것 ⓷집합체로 사회화된 새로운 존재자들이 정치의 원천이라는 것 ⓸인류는 항상 지배자를 상정해 왔지만 지배는 없다는 것. 


언어로 이해되기보다는 정동으로 이해된다고밖에 할 수 없는 결론이지만 그래도 그는 계속 긍정하면서 글을 맺는다. 언어적 이해로 쌓인 지식을 뒤섞어 버리려는 의도가 있는 듯 수많은 개념들을 가져와 쓴 글이기 때문에 이해는 표현되지 못하고 맴돌고 있다. 이런 작업이 존재론, 인식론, 과학, 정치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갖게 할 수 있을까? 어쨌거나 결론을 갈음하는 말은 “돌봄과 주의를 유지하는 팩티쉬”가 아닐까 싶다. 세계와 실재에 대한 과도한 믿음도 포기도 아닌 잡종으로서의 균형이 아무래도 중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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