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차이나] 성상聖像을 너머2021-11-11 15:3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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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를 들어 플라톤과 단테를 읽는 사람이 유럽 근대에 대한 지식과 관심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는 매우 어렵다. 차라리 그들은 각각의 근현대상을 토대로 그것과의 관계에서 어쩌면 르네상스의 내원과 연원이라는 위치를 무의식중에 부여하면서 읽고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해 중국 고전의 경우 <사기>든 <당시>와 <벽암록>이든 그것들에 대한 관심은 중국 근현대에 대한 지식이나 관심과는 오히려 무관하게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121쪽)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미조구찌 유조의 책을 읽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맺힌 - 하나의 사상적 문제의식이라기보다는 특정한 태도가 빚어낸 몇 가지 경험, 그리고 그 경험에 매번 좌절한 정감 - 어떤 난감함을 풀어내는 과정일 테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 어떤 소외감이라 할 만한 것이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자. 몇 년 전 <주자평전>이 번역되어 나왔다. 매우 두꺼운 상하권 두 권의 책으로 번역되었다. 매우 반가운 소식이었는데, 왜냐하면 오래도록 주희에 대한 책을 만나지 못했던 까닭이다. 특히 주자학 혹은 성리학에 대한 책이 아니라 주희 본인에 대한 책은 더더욱 만나기 어려웠다. 십 수년 전 미우라 쿠니오의 <인간 주자>를 읽은 게 전부였다. 주자학에 대한 비판을 줄줄 늘어놓아도 정작 주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이 책을 받아 들고는 연구실 동료들에게 자랑을 했다. 주희에 대한 책이 나왔다고 책을 보여 주며 말이다. 그러나 반응은 영 신통치 않았다. 주희에 관심이 별로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영 다른 데서 실망을 했다. 주희가 누구며 언제적 사람이냐는 거다. 공자와 동시대 사람이냐, 플라톤 시대 사람이냐는 식의 질문을 받으며 할 말을 잃었다. 대관절 어디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일까.


연구실 동료들은 한창 스피노자에 빠져 있을 때였는데, 실상 따지고 보면 스피노자라는 인물은 서양철학의 계보 가운데 지류에 있는 인물 아닌가. 본류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 하나의 지류에까지 깊은 관심을 두는 그 애정을 여기에서는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결국 혼자 투덜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나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어느 시대 사람인지는 알고,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도 안다. 그런데 저들은??


오래도록 인문 공동체에 있으면서 '철학'이라는 말을 꺼린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철학'이란 말은 사실 어디로 보아도 불편한 말이었다. 함께 공부하는 이들에게 철학이란 스피노자, 니체, 들뢰즈 따위를 일컫는 말이었다. 거기에 주희를 들이밀기는 힘들었다. 그렇다고 영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중국철학도 철학입네 하며 주희를 중국철학의 대표주자로 소개하는 길이있었다. 그러나 그 말에 깔려 있는 겸언쩍은 태도도 잘 알고 있었다. 당신들에게 있는 것이 나에게도 있다는 식의 태도. 미조구찌 유조의 말을 빌리면 '세계'에 명함을 내밀어 보겠다는 '글로벌 스탠다드'도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남의 옷을 억지로 빌려 입는 것 같았다. 결국 '철학'이라는 말은 내내 내 것이 아닌 말로 떠돌았다. 명색이 철학과 전공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2. 


억지로 논문을 쓰고는 다음 과정을 포기하기로 했다. 여러 이유가 있었다. 학비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생계의 곤란함도 있었지만, 길이 보이지 않았다. 철학을 더 공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한 두 가지 곤혹스런 갈등이 학교 공부를 포기하게 한 원인이라고 하자. 조금 더 상세하게 말하면, 철학과 대학원에는 연구실 동료들이 말하는 철학은 없었고, 철학의 옷을 빌려 입은 철학만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의미 있는 철학이란 전자에 가까운 것이라 생각한다. 의미도 가치도 없는 코스프레를 할 이유는 없었다. 다르게 말하면 철학 없는 철학과라고 할까? 지금도 생각은 변함이 없다. 철학과에서 학위는 딸 수 있었을지언정 철학이라 할 만한 가치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을 테다.


그렇다고 동료들의 철학이 나의 철학이 되지는 못했다. 맑스의 <자본론>을 읽었지만 남의 언어였고,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었지만 도무지 감동받지 못했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를 읽었지만 역시 살가운 책은 아니었다. 무엇 때문에 접점을 만들어내지 못했을까. 지금 생각하면 하나는 그 책들로 다이나믹한 사회 현상을 이해하고 해석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386의 문제의식 안에서, 나아가 그 새로운 모색 안에서 맑스, 스피노자와 니체, 나아가 들뢰즈는 의미가 있겠지만 21세기의 다이내믹 코리아를 독해하는 데는 별 의미가 없었다. 도리어 동시대 저자들의 책이 좋았다. 엄기호, 오찬호, 박가분... 지그문트 바우만의 책을 기웃거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겹기도 했다. 까마득히 먼 68혁명의 흔적을 탐구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혁명은 늘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멀고 낯설었다. 나아가 낡아 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20세기적 담론에 질려버렸다고 할 수 있겠다. 세기말 헬조선, 21세기에는 좀 다른 길이 필요하지 않나. 지금도 그렇지만,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문제는 후진성의 결과라기보다는 선진성의 병폐가 아닐까 질문해본다. 헬조선 한반도의 모순은 민주주의가 덜 성숙해서, 시민의식이 부족해서, 자유와 평등과 같은 근대적 가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이런 질문은 중국의 문제를 다룰 때에도 유효하다. 과연 중국의 병폐는 그 사회가 덜 진보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일까? 자본주의의 세례를 받고, 인권의식이 성장하면, 민주주의가 도입되면, 인민이 시민으로 자각하면 그 많은 중국의 병폐는 사라질 것인가. 오히려 어떤 문제들은 중국 사회가 너무 빨리 달려가버려서, 특정 분야에서는 다른 사회를 앞질러 새로운 문제를 낳는 건 아닐까. 


돌아보면 동료들의 철학에 크게 공감하지 못했던 것은 나에게 던져진 문제, '중국이라는 문제'를 푸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리어 그나마 도움이 되었던 것은 루쉰, 마오... 더욱 거슬러 올라가면 공자와 장자 등이 더 도움이 되었다. '중국이라는 문제' 그것은 어쩌면 동아시아적 사회 현상이라 할 수도 있고, 아시아적 사회 구조라 할 수도 있을 텐데... 어쨌든 동료들의 철학은 그것을 설명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3. 


쓸데없이 이야기가 길어지고 있는데, 기왕 이야기를 더 하면 동료들의 철학에 처음 관심을 기울이게 한 계기는 '함석헌'이었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기존 보수적 신학체계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으며, 나아가 대안적인 복음주의적 입장에도 만족하지 못했다. 더 멀리 가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함석헌이었다. 그렇게 인문학 공동체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결론만 이야기하면 그 두드림은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했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전도된 독해, 서구의 가치 기준을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내면화하여 거꾸로 뒤집는, 그래서 바로 해답이 여기에 있다는 식의 방법론이었다. 당시 나는 '전통문화연구회'에서 한학漢學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나마 차이가 있다면 좀 숨통이 트인다는 이었다. 


지금도 종종 비판하는 것이지만 중국 고전, 경전을 배울 수 있는 곳으로 '전통문화연구회'와 '민족문화추진회'(현 고전번역원)가 있다는 것이 참 우스운 일이다. 미조구찌 유조의 말을 빌리면 '중국 없는 중국 읽기'가 벌어지는 장소이다. '전통문화연구회'에서 사서오경을 발간하는데 과연 그것은 누구의 책인가? 나아가 십삼경주소도 발간하는데 그것은? 그나마 전통이라 할 만한 것을 찾자면 모든 번역서에 붙어있는 '현토'가 아닐까. 


"이러한 일종의 문화혼효 현상은 이문화로서의 중국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한편으로는 친근감을 배양한 반면 한편으로는 이인식異認識을 방해하는 결과가 되어 결국에는 중국 없는 중국 읽기라는 전통 - 글자 그대로는 중일사전일 터인 저 한화사전漢和辭典이라는 일본어(?) 사전을 보라 - 의 형상을 보게 되었다."(123쪽)


'중국 없는 중국학', 저자가 말하는일본한학과 유사한 한국한학(혹은 조선한학)에 빠지지 않았던 것은 출발점이 달랐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민족의 얼이니, 전통문화니 하는 데는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뒤집힌 독해, 중국-전통을 지렛대로 삼아 현재를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하는 관점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거기에는 또 다른 문제, 저마다의 성상聖像이 있었던 까닭이다. 


예를 들어 저자는 중국 혁명의 감동을 이야기한다. 중국 혁명은 하나의 성상, 즉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 독자적인 행보는 충분히 하나의 독립적 모델이었지만, 이를 선망한 것은 유럽의 혁명이라는 표상을 대체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저들에게 있는 것이 우리에게도 있다는 식의 자기 위안. 그러나 이렇게 마련한 표상은 늘 갈증을 낳기 마련이다. 유럽의 성상을 버리고 여기 새로운 성상을 세운다고 치자, 그것이 아무리 화려한들 저들의 것에 비할 수 있을까. 



4.


공자를 숭배하고, 노자를 숭배하는 이들이 있다. 경전의 시대는 이미 몰락했으나 고대인의 흔적을 숭상하는 이들이 있다. 누구는 <주역>을 숭배하고, 누구는 <논어>를, <노자>를 숭배하나 숭배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성경>을 버린 사람으로서 이런 숭배야 말로 당혹스러운 현상이다. <성경>이 아닌 <성서>로 읽자고 이야기하곤 하는데, 마찬가지로 성인의 글이라는 낡은 관점에서 벗어나 텍스트를 만나는 길은 없을까.


개인적으로 선망 없는 지식은 없다고 본다.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창 3:6)' 해야 마음이 움직이는 법이다. 그러나 그것이 호기심을 넘어 우상이 되면 문제가 달라진다. 거기에는 '읽기 - 이해'는 사라지고 무한한 '섬김 - 수용'이 자리잡기 마련이다. 비판과 해석의 자리는 점점 좁아진다. 지식인 - 학자와 사제 - 셀럽의 경계가 흐려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오늘날 셀럽 혹은 인플루언서의 역할은 과거 사제 혹은 선지자의 역할과 같지 않나. 여기에는 지식보다 믿음이 깃든다.


"... <당시>와 <벽암록>이 읽히는 것은 일본의 문학의식과 선禪의 세계 내의 일이지, 그것에 의해 당대唐代와 송대宋代의 중국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다."(122쪽)


맥락을 소거한 읽기에 지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노자> 읽기를 반기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많은 사람들은 <노자>가 무위자연을 노래한, 유가의 규범적 세계를 비판하고, 문명세계의 모순을 비판했으며, 소박한 인간 본성의 본래성을 드러낸 텍스트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읽어도 그런 것을 찾아내지 못하겠다. 제왕학의 텍스트로, 안정적인 통치를 위한 음험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는 텍스트로 읽힌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늘 환영받지 못한다. 성상을, 마음속에 자리 잡은 그 선망의 자리를 상실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력하지 말라는 글, 의식적 행위가 없어도 된다는 글'로 <노자>를 읽는 해석은 반갑지 않다. 서구문명을 비판하고, 과거 봉건 사회의 한계를 비판하는 텍스트로 <노자> 읽기는 너무 뻔하다. 거기에는 19세기적, 혹은 20세기적 '세계인'이 도사리고 있다. 과연 다른 해석은 가능할까. 유럽을 알기 위해 플라톤과 단테를 읽듯, 중국을 알기 위해 <논어>와 <노자>를 읽는 날이 있을까? 나아가 춘추전국의 혼란기와 진한교체기의 역동성을 읽기 위해 낡은 텍스트를 펼치는 날은?


아무리 보아도 그 길은 좁고 험해 보인다. 사람들은 성상을 바라고 이 성상을 치우면 또 다른 성상을 세우기 바란다. <노자>를 이야기하며, 이현주 목사의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를 비판적으로 이야기했는데 과연 그것이 어떻게 들렸는지 의문이다. 이럴 때는 차라리 대안을 꿈꾸는 이들보다 원리원칙에 철저한 성상파괴자들이 역사의 변화에 도움이 되는 건 아닐까 생각해보곤 한다. 예수와 마리아의 성상을 치우고 공자와 노자의 성상을 세울 수는 없지 않은가. 


내재적 독해, 중국 사회의 내재적 법칙에 따라 읽는 독해는 가능할까? 중국을 낯선 대상으로 삼고 나아가 현재의 우리 사회를 낯선 대상으로 삼고, 나아가 도래할 세계를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로 탐구하는 독해는. 그러나 이것도 쉽지는 않다. 중국은 '착짱죽짱'의 나라, 착한 짱깨는 죽은 짱깨로 혐오와 배척의 세계이며, 오늘날 우리 사회는 K-부심과 n재앙을 오가는 극호&불호의 현장이다. 결국 서로의 성상을 두고 다투는 전장일 뿐. 성상을 버린, 해석과 비평의 자리는 까마득히 요원해 보인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출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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