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탈식민] 배제의 역사와 '문명화'의 기만2022-03-30 06:4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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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3부 (안) 들리는 것을 말하기_발제.hwp (77.5KB)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서발턴 개념의 역사에 관한 성찰들》  3() 들리는 것을 말하기

<죽음과 서발턴> 라제스와리 순데르 라잔

<말하기와 죽기 사이에서: 미국 노예제의 맥락에서 출현한 서발턴에게 긴요한 몇가지> 압둘 R. 잔모하메드

<참전 서발턴들: 1차 세계대전의 식민지 군대와 제국전쟁묘지위원회의 정치> 미셸 바렛

 

스피박의 논의는 죽음과 서발턴의 관계를 환기한다. 우리는 죽음과 맺는 관계를 통해 주체성을 사유한다. 이 책 3부에 실린 세 편의 논문은 죽음과 서발턴의 관계를 통해 서발턴의 주체성과 말하기를 분석한다. 세 논문은 모두 신분이 낮은 과부나 노예, 식민지 군인처럼 전형화된 서발턴을 다룬다. 스피박이 부바네스와리를 통해 서발턴의 주체성과 소통 가능성에 관해 물었다면, 세 논문은 전형화된 서발턴 사례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첫 번째 논문에서 라잔은 스피박이 젠더화된 서발턴이라는 불완전한 전형을 다루었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한다. 스피박이 다룬 사티와 부바네스와리의 죽음에서는 계급보다 젠더의 문제가 도드라진다. 여성들은 계급으로는 서발턴이 아니어도 젠더화되면서 서발턴의 위치에 놓인다. 부바네스와리의 죽음이 자살이라는 점도 서발턴의 전형에서 벗어난다. 자신에게 허용되지 않은 형태의 자살을 통해 부바네스와리는 모종의 주체성을 보여주려 한다.

 

라잔은 부바네스와리의 소통 실패가 주변 여성들의 반응에서 드러났음에 주목한다. 서발턴은 말하려 하지만, 사람들은 듣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살의 동기를 쉽게 단정하며 의미를 박탈해버리거나, 엉뚱한 곳에 책임을 묻는다. 자살한 이는 자신의 몸과 죽음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시도하지만, 자살의 이유는 정작 본인에게도 모호할 수 있다. 죽음이 강요하는 이해와 애도의 노력에 우리는 대체로 무능과 게으름으로 답할 뿐이다.

 

결론에서 라잔은 라나지트 구하와 스피박의 연구를 비교하면서, 스피박의 연구가 가진 힘을 재확인한다. 구하의 연구에서 전형적인 하층 카스트 과부인 찬드라는 임신 때문에 가족들로부터 죽임을 당하게 된다. 라잔은 구하가 이 연구에서 자신을 기사도로 여기면서 찬드라의 피해를 강조했다고 본다. 스피박이 여성에 대한 폭력 자체에 주목하거나 처벌 의제를 만드는 일보다 폭력 현상을 이해하는 일에 더 집중했다는 점과 대조된다.

 

스피박의 연구에서 부바네스와리가 단지 말할 수 없음이 아닌 소통의 지연이나 실패를 겪는다면, 구하의 연구에서 찬드라는 지식인의 재현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는 침묵의 존재이다. 이와 달리 두 번째 논문에서 잔모하메드는 서발턴의 말하기에 더 집중한다. 잔모하메드는 미국 노예제에서 서발턴 말하기(글쓰기)의 생산과 수용의 조건들을 살펴본다. 이 연구에서 노예였다가 자서전을 출간한 더글러스는 말하기를 통해 서발턴의 전형에서 벗어난다.

 

노예인 더글러스는 부정의 과정을 통해 주인과 대립하고 주체성을 도모한다. 부정은 죽음과 글쓰기의 두 가지 과정으로 나타난다. 더글러스는 자기가 죽거나 글을 배우는 일을 주인이 원치 않음을 알게 된다. 주인은 노예를 죽이겠다고 위협하지만, 노예의 죽음은 주인에게 어떤 이득도 되지 않는다. 죽음을 피하고픈 욕망이 노예를 노예의 지위에 머무르게 한다는 점을 깨달은 더글러스는 자기 죽음을 걸고 주인과 대립한다.

 

마찬가지로 더글러스는 주인이 글을 배우지 말라고 했다는 이유만으로 글을 배우려 한다. 주인에 대한 부정과 목숨을 건 투쟁은 궤를 같이한다. 더글러스는 문자가 흑인을 노예화하는 백인의 힘”(253)이라는 사실도 이해한다.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을 통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면, 파괴하고 재건할 수도 있다. 잔모하메드는 글을 통해 노예제와 자유를 이해한 더글러스가 변증법적 방식으로 자서전을 쓰면서 자신을 주체로 생산해냈다고 본다.

 

세 번째 논문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사망한 식민지 군인들의 이야기다. 아프리카와 인도의 군인들은 영국과 프랑스를 위해 전쟁에 참전했다. 식민지 내부에서 이 군인들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역사가들은 이들의 경험이 이후 민족 정체성이나 독립과 연결되었다고 평가한다. 영국이나 프랑스는 표면적으로 이 군인들을 제국의 구성원으로 포섭하고 대우하려는 제스처를 취했다. 물론 구체적인 사안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군인들은 살아있을 때나 죽었을 때나 토착민 위치였고, 하급 장교가 된 뒤에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으며, 과연 인간으로 취급되었는지도 의문이다. ‘서발턴이라는 용어가 하급 장교를 칭하는 단어에서 나왔음을 강조하지 않아도, 이들은 논쟁의 여지 없이 서발턴이다. 앞의 두 논문이 서발턴의 말하기에 관심을 가진다면, 세 번째 논문의 저자 바렛은 직급도 낮고 이미 죽어서 말할 수도 없는 전형적인 서발턴의 역사를 기록한다.

 

서발턴용어를 경직되게 사용하는 만큼 서발턴 연구가 전형성을 벗어나야 한다고 느끼지도 않는 바렛은, 서발턴 연구와 젠더를 연결시키는 작업도 불필요하게 느낀다. 바렛이 보기에 젠더를 끌어들이지 않아도 서발턴은 이미 불평등한 취급을 받아왔다. 바렛이 말하는 서발턴은 말하기 능력을 애초부터 가지지 않았거나 봉쇄당했기에 말할 수 없는 이들이며, 지식인들의 섬세한 기록과 재현을 통해서만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

 

바렛은 영국이 제국의 이름으로 식민지의 군인들을 전쟁에 동원하고 제대로 추모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문명화되지 않았다는 점을 불평등의 근거로 들었다고 지적한다. ‘문명의 이름으로 제국을 구성한 이들이 문명화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식민지인들을 배제하고, 그 배제의 역사마저 지워버렸기에 바렛과 같은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연구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게 된다. 배제의 역사를 지워버리는 문명이 기만이라면, 이런 재현도 일종의 기만이다.

 

바렛은 서발턴이 받은 불평등한 대우를 기록하고 복원하는 일에만 집중한다. 서발턴이 말할 수 있는지에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 바렛의 태도는 스피박의 연구가 가진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한쪽에서는 차별과 배제의 역사를 지워버리는 기만이 있다면, 한쪽에서는 그 역사를 복원하면서 우월감을 확인하는 기만이 있다. 나는 서발턴이라는 존재를 언제나 문명너머로 밀어버리는 이중의 기만을 그곳에서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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