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문학] 단테 <신곡> - 천국편(23곡 ~ 33곡)2022-08-18 16:3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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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신곡> 천국편 (23~33)  

 

                                      봉인된 새로운 희망  



이제 단테는 천국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성 베드로, 성 야고보, 성 요한, 아담, 야훼를 보고 천국을 관장하는 아홉 천사들의 품계에 대해 알게 된다. 이 천사들이 사라지고 나서 베아트리체와 함께 최고의 하늘인 엠피레오로 올라간다. 성 베르나르두스의 안내에 따라 성모 마리아의 은총에 기도를 올리고 드디어 하느님의 빛을 직접 바라본다. 그 안에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관조하며 모든 별을 움직이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으로 <신곡>의 대단원은 막을 내린다.

 

이제 단테가 펼쳐온 저승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끝을 향해가며 천국은 화려한 묘사를 통해 신비화되고 단테의 영혼은 고양되어 숭고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천국에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직관으로 받아들이고 믿음을 실천하는 것이다. 반복되어 나오는 은 하느님의 은총이다. 그 은총이 이 세계를 비추고 관장하고 있다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은 단테에게 있어서 물리칠 수 없는 희망이 되었을 것이다. <희망이란 미래의 영광을 확실히 기다리는 것이며, 하느님의 은총과 이전의 공적이 희망을 낳는다 2567)>

그가 희망을 간절히 이야기하는 것은 절망에 휩싸인 피렌체를 구원하고자 하는 열망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적 세계관 안에 있으면서 그 세계를 좀 더 깊고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하는 그의 시도는 결국 그 희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은 아니었을까?

 

그 의지의 발현이 베아트리체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은 흥미롭다. 베아트리체는 단테가 평생 동안 사랑했던 여인이었다. 그가 사랑했던 여인이었을 뿐이지 그를 천국에 데려다 줄 만큼 성스럽거나 주목할 만한 선행을 실천한 인물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의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숭고하게 신격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대가 듣고 싶은 것을 묻지 않고 말하지요. 나는 모든 시간과 장소가 모이는 곳을 보았기 때문이요. 있을 수 없는 일로 당신의 선을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반사된 빛이 나는 존재한다말할 수 있도록 2910>

결국 베아트리체라는 한 인간은 단테에 의해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게 된 것이다. 베아트리체를 인간 범주 너머로 모셔두고 그녀를 통해 저승을 여행하는 단테 자신을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선 경계인으로 상정하는 방식이야말로 한 개인이 문학을 통해 세계를 창조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범주를 넘어선 인물은 베아트리체가 처음이 아니었다. <내 아들아, 나무 열매를 맛본 것 자체가 이 귀양살이의 원인이 아니라, 다만 표시를 넘어선 것이 원인이었다. - 26115> 아담의 이 말처럼 아담은 자신의 범주를 넘어서 약속을 어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과 야훼는 천국에 와 있다. 물론 림보에서 4302년을 기다렸다고 해도 말이다. 베아트리체가 천국에 와 있는 이유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금단의 경계를 넘어선 것은 죄악이지만 은총의 빛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겠다는 단테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면 가능한 일이라고, 아마도 단테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갈수록 성령과 삼위일체는 중요하게 언급될 뿐 아니라 하느님의 법칙에 대한 철저한 믿음이 드러난다. <이 광활한 왕국 안에서는 슬픔이나 목마름이나 배고픔이 없는 것처럼 우연한 것은 하나도 없느니라. 그대가 보는 모든 것은 영원한 법칙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반지가 손가락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처럼 되어 있다. - 3252> 뿐만 아니라 기독교적인 구원으로서 간절한 기도가 그대로 육성으로 튀어나오기도 한다. 이는 종교적 체험과 실천을 통해 독자를 고양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가 그리고 있는 저승은 그의 상상력의 법칙에 따라 정해진다. (물론 선조들의 세계관과 기록에 의존한 측면이 없지 않았겠지만) 지옥과 연옥이 기하학적이고 건축적으로 설계되었다면 천국은 원동천을 중심으로 시공간을 초월한 아홉 개의 하늘이 다른 속도로 회전하는 사차원 방식으로 그려진다. 투명한 빛과 흰 장미 모양으로 둘러싼 천국의 영혼과 천사들, 아름답게 울려퍼지는 합창 등 천국은 4D 서라운드로 상영되는 멀티작품을 상상하게 한다.

 

그가 그려내는 저승의 창조적 공간은 그가 현실에 구현하고자 하는 세계의 열망을 그대로 보여주는 동시에 작가적 소명의식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저의 혀에 충분한 힘을 주시어 당신의 영광의 불티 하나만이라고 미래의 사람들에게 남기도록 해주소서 3370> 결국 그는 피렌체와 그곳에서 살게 될 미래의 후손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남기고 자신이 <신곡>을 써내려가면서 깨달았던 진실을 그들에게고 전하고 싶은 것이다.

정치가, 문학가, 인문학자, 인류학자, 종교학자, 천문학자로서의 단테. 이 모든 단테의 영혼에 새겨진 그 진실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가 마지막에 언급한 태양과 별들을 움직이는 사랑의 실체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계속해서 그가 언급했던 자유 의지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마지막까지 강조한 사랑은 신념과 실천으로 연결된 인간의 에너지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단테가 피렌체 민중의 언어인 속어로 작품을 썼다 하더라고 이 작품은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이며 귀족 취향이라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그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경계를 넘나드는 여정을 통해 신과 인간 세계를 탐구해나간다. 그 방법은 철학적 사고와 지성을 통해서이다. 신이라는 영원한 법칙이 현실에서도 작동하길 바라는 단테의 열망은 사랑이라는 운동을 통해 드러난다. <여기 고귀한 환상에 내 힘은 소진했지만, 한결같이 돌아가는 바퀴처럼 나의 열망과 의욕은 다시 돌고 있었으니, 태양과 별들을 움직이는 사랑 덕택이었다. - 33142>

결국 그가 원했던 것은 <신곡>이라는 작품을 통한 인간 영원의 구원과 이를 통한 피렌체 현실의 개혁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가 틈을 내고 봉인한 종교적 화두는 변혁을 위한 위장이었을까, 아니면 독실한 신앙인으로서의 성찰적 침묵이었을까? ‘한결같이 돌아가는 바퀴처럼 돌아가는 열망과 의욕의 단테라면, 전자의 가능성에 희망을 가지지 않았을까? 봉인에서 중요한 것은 묶어두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어딘가에 분명 틈이 있다는 점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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