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중국] 유세명언 _ 작가의 의도와 달리2020-05-27 02: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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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유세명언(12 -14)_20200527.pdf (221.8KB)

작가의 의도와 달리

에레혼


빗대기 vs 가르치기

<유세명언 1>로 하는 마지막 세미나를 앞두고, 세미나를 준비하던 때를 떠올려 본다. 황당무계한 책이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과 지나치게 정상적인 책이면 어쩌지 하는 고민이 동시에 들었다. 물론 이런 고민은 첫 번째 세미나 시간을 거치면서 말끔하게 사라졌지만, 세미나 소개글을 쓰는 순간만 해도 걱정은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유세명언喩世明言>이라는 제목을 어떻게 풀이해야 하나, 이런 사소한 문제도 전혀 사소하지 않은 일이 되었다.

제목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면, 책 제목을 어떻게 해석할까 하는 고민이 생긴 이유는 바로 ‘유喩’라는 한자 때문이었다. 이 글자는 ‘빗댄다’는 의미와 ‘깨우치다/가르쳐 주다’라는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그러던 중에 ‘유세’라는 글자를 영어로는 ‘enlighten the world’라고 풀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야 ‘유세명언=세상을 깨우치는 좋은 말’이라는 해석을 마음 편히 적을 수 있었다는 시답지 않은 이야기되겠다.

그런데, 책을 읽어 나갈수록 <유세명언>이 세상에 교훈을 줄 수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풍몽룡은 요즘으로 말하면 ‘아싸’ 소리 듣기 딱 좋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의 삐뚤어진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유세명언>의 작품들이 비로소 민중들에게 권할 만한 이야기로 보이는 걸까? 그럼 서문을 그렇게 쓰지 말든가!


이야기 1: 봄바람 불 제 이름난 기생들이 유칠을 애도하다

<유세명언 1>은 종반부 세 편 이야기도 교훈적인 전래 동화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작품들이다. ‘조백승이 찻집에서 인종을 만나다’에서는 시 짓는 장면이 되풀이되더니 그 다음 이야기인 ‘봄바람 ……’에서는 아예 풍류를 즐기는 인물이 주인공이 되어서 노래를 부른다. 여기에 여러 여성 캐릭터까지 주인공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니 자연스럽게 <홍루몽>이 떠올랐다. 다른 부분이 있다면, 대관원의 여인들과 친한 가보옥은 남성성이 느껴지지 않는 인물인 반면 유영은 자유로운 영혼의 남성 지식인 전형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 사옥영과의 약속을 잊지 않는 모습, 파직당하고 나서도 속세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은 고대 지식인들이 동경하던 인물상을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 2: 장도릉이 조승을 일곱 번 시험하다

옥황상제의 호출로 이승을 떠난 유칠을 뒤로 하고, 남은 두 편의 이야기에는 본격적으로 선계仙界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장도릉은 오경보다 <도덕경>을 먼저 접한 인물이니 싹수가 보이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장도릉은 단약을 마시고 득도한 뒤 백호 신으로 둔갑한 쇠의 신과 사람들을 해치는 큰 뱀을 퇴치한다. 급기야 태상 노군의 비법서를 얻어 수련을 한 뒤에는 귀신 병사들과 일당백으로 싸울 수 있는 슈퍼 히어로가 된다.

이렇게 이름이 알려지고 나면 신선술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몰릴 수밖에 없다. 장도릉 이야기에서는 조승이 바로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조승의 스펙은 장도릉과 달리 평범하다. 이런 장삼이사가 장도릉 같은 도인의 제자가 되는 방법은 온갖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 테스트 과정이 긴 편이기 때문에 작가는 이야기 말미에 일곱 번 시험이 어떤 것이었는지 요약 정리를 해준다. 이 요약 정리가 재미있었던 이유는 ‘과거 대비반 선생님 풍몽룡’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장도릉과 조승의 이야기를 쓰면서 본인의 교육 철학에 반기를 들었던 어떤 수험생이 떠오른 듯, 풍몽룡은 이렇게 말한다.

……요즘 세상 사람들은 교만하고 고집이 세서 스승이 좀 심한 말을 하면 버럭 화를 내곤 하니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온갖 모욕을 견디려고 하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본문 461쪽)


이야기 3: 진희이가 조정의 부름을 네 차례 거절하다

123살에 하늘로 올라간 장도릉 이야기의 결말이 조금은 찔렸던 것일까? 풍몽룡은 진희이 이야기를 시작하며 괜히 이런 말을 덧붙인다. “진희이가 118세를 일기로 죽었으니, 죽고 나서 육신이 썩지 않고 그대로 신선이 되었다 하더라도 잤다고 하는 말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본문 473쪽) 하지만 예닐곱 나이부터 <주역>을 읽었다는 구절에서 진희이 역시 뻔한 고관대작이 되긴 글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속세를 거부하는 태도는 지식인의 몸값을 올리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왕조가 교체되고, 황제는 세 번이나 바뀌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장도릉으로부터 가르침을 얻고자 한다. 물론 이런 시도는 번번히 실패한다. 미끼를 물지 않는 용이면서, 새장 속에 들어가지 않는 봉황이었던 장도릉은 궁궐보다는 무당산이 더 어울리는 인물이다. 이 미스터리한 인물은 송 태종에게 직언을 남기기도 한다.

무릇 황제란 천하를 당신 몸처럼 여기시는 존재입니다. 황제께서 도를 닦아 어느 날 신선이 되신다 한들 백성에게야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본문 486쪽)

아무리 송나라가 문약文弱한 나라라지만, 2대 황제에게 이런 과감한 말을 하는 과감함! 그런데 진희이의 말은 곧 자신과 같은 은사隱士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 아닐까. 백성들이 양생술ㆍ신선술에 빠지는 것과 지식인 및 지배계층이 빠지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라가 멸망하고 왕이 바뀔 때 ‘성이 다른 군주를 섬길 수 없다’며 산으로 들어가서 도를 닦는 지식인은 추앙을 받고, 유한한 현실에 불만을 느껴 내세에 관심을 가졌던 지배층은 지탄의 대상이 된 중국 역사를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작가가 어떻게 생각을 했든 간에

<유세명언>을 읽는 내내 나는 작가가 기획한 “소설로 교화시키기”가 실제 작품 속에서는 어긋나고 있다는 점에 집착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읽고 발제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내가 간과한 부분을 깨달았다. 일단 <유세명언>은 나온 지 400년이 넘은 작품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명나라 독자가 느끼는 소설 속 교훈은 온갖 클리셰와 이야기 콘텐츠에 익숙해진 내가 느끼는 것과 차이가 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풍몽룡도 이야기를 지으며 현실적인 고민을 많이 했으리라 짐작된다. 상상해보면, 명나라 말기의 민중들은 이미 재미있는 이야기에 익숙해져서 이야기에 대한 눈높이도 올라갔을 것이다. , 단순히 교훈만 전달하는 이야기는 따분한 소리 취급을 받기 좋다.

애초에 풍몽룡의 서술 전략이 실현되지 못하는 부분을 찾으려는 일도 현대인의 시각으로 고대 사람의 실수를 짚어내려 했던 태도에 불과하다. 이런 마음이 들 때마다 되새기려 하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풍몽룡보다 1400년 앞선 시간에 온갖 허황된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 이야기를 후세에 남기려 했던 사람들의 목소리 중 하나이다. 곽박郭璞이라는 인물은 산해경山海經이라는 말도 안되는 ‘지리서’에 주석을 단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주석 작업을 향한 시선을 향해 서문에서 일침을 날린다.

세상 사람들이 괴이하다고 부르는 것들에 대해, 나는 그렇게 괴이하다고 하는 까닭을 알 수 없다. 그리고 세상에서 이상하지 않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는 그것이 이상하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다. 어째서 그러한가? 사물은 그 자체로 괴이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생각을 통해서 이상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곽박, <주산해경註山海經 서문>)

교화적 태도가 소설 속에서 실현되지 못하면 못한대로, 그것이 한계일 수도 있고 오히려 <유세명언>의 미덕일 수도 있다. 한 달로 그쳐 아쉬운 풍몽룡 유니버스 탐험이었지만, 이후에 나올 나머지 소설들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5월의 차이나 리터러시를 마무리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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