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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서양철학사] 제4장-아리스토텔레스2021-01-26 22: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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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 철학사] 4장 아리스토텔레스-자연질서와 정치적 동물로서의 인간

                                                                                              2021. 01. 27 걷는이

 

이데아를 찾아 시선을 위로 향했던 플라톤은 영원하고 완벽한 이상 국가에 관한 이론을 정립하려고 시도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많은 개별 현상을 찾아 시선을 밖으로 돌렸고, 현존하는 국가형태들에 대한 조사로부터 출발하여 실현 가능한 최상의 국가를 찾아내고자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인간은 오직 공동체(도시국가) 안에서만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믿었다. 플라톤은 이성이 요구하는 바에 입각해서 현실을 비판했고, 그에게 정치란 현실을 이상에 가깝게 만들어가는 과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성이란 현존하는 것들을 분류하고 평가하는 수단이다.

 

플라톤에게는 이데아만이 실재하는 것인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개별 사물들, 실체들이라고 주장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념어들(빨강, 원형, , 인간 등)이 존재하는 무엇을 가리킨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은 이 무엇이 지각 가능한 현상의 배후에 존재하는 이데아들이라고 믿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각 가능한 현상 속에 존재하는 형상들이라고 믿었다. 플라톤에게 감각 경험은 불완전한 지식형태이고, 참된 지식은 이데아에 대한 통찰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경험적인 것은 보다 긍정적인 위상을 갖는다.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실체들뿐이며 우리는 이성의 도움으로 이 사물들 속에서 보편적 형상(보편자)들을 지각하고 구분해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식의 획득을 감각 경험으로부터 본질에 대한 통찰로 이행하는 과정,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것에 대한 정의(定義)를 향한 추상 과정으로 본다. 그는 독립적 존재를 갖는 것은 개별 사물들이지만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지식은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속성들에 대한 지식이라고 믿는다.

 

어떤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현상이 현상이게끔 만들어주는 원인들을 알아야 한다. 개별 사물들은 형상과 질료로 구성되어 있다. 진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것을 예로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네 가지 원인에 대한 이론을 살펴보면 완성된 그릇의 표상은 창작 과정 전체가 지향하는 목표로서 목적인 도공이 재료를 준비하는 것은 변화 과정의 동력 혹은 운동 원천으로서 작용인 그릇의 재료가 된 소재는 질료로서 질료인 진흙 덩어리/그릇이 일정 시점 취하는 형태인 형상인으로 구분된다. 이 네 가지 원인은 여러 철학적 논쟁의 일부가 되었다. 질료 개념은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대량 생산된 바늘들은 동일한 모양과 동일한 속성을 갖지만 각기 자신만의 질료를 갖고 있기 때문에 상이한 단위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질료는 개별화를 행하는 것, 즉 한 사물을 하나의 특정한 개별 사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형태(형상)를 갖기 전의 질료는 무엇인가? 우리는 형태가 없는 것에 대해 말하거나 생각할 수 없는가?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네 가지 유형의 변화를 구분하고 있다. 그것은 실체적 변화: 실체가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 질적 변화: 실체의 속성들이 변화하는 것 양적 변화: 실체가 가지 어떤 속성을 더 많이 혹은 더 적게 갖게 되는 것 장소 변화: 실체가 그것의 공간적 위치를 바꾸는 것이다. 장소 변화와 관련하여 자연적운동과 강제적운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비유기적 자연, 즉 인간이 만들지 않은 무생물과 관련된 목적인 개념을 설명해 준다. 이 이론의 출발점은 모든 사물이 불, , 공기, 흙의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사물들은 이 4원소의 양이 서로 다르게 구성되어 있어서 그 구성 여하에 따라 자연적 위치를 찾아간다. 한 사물의 자연적 위치가 목적인이고, 그것의 무게가 작용인이며, 자연적 위치로 인도하는 경로가 형상인이고, 그 사물을 이루는 물질이 질료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기에 이러한 운동개념은 목적인 개념과 함께 비판되고 거부되었다.

 

형상과 질료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분은 현실태와 잠재태의 구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소나무의 씨앗은 지금 이 순간 단지 씨앗에 불과하지만 나무가 될 자연적 능력들을 갖고 있다. 나무가 성장함에 따라 씨앗이 자체 내에 가지고 있던 능력들이 실현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생물학적 측면을 일반화하여 모든 사물에 적용한다. 모든 개별 사물은 잠재태와 현실태의 긴장으로 가득 찬 혼합이며, 변화란 잠재력의 현실화이다. 각각의 사물의 목적은 자신의 능력들의 실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순수 잠재태비유기적 사물식물동물인간순수 현실태라는 위계적인 우주관에 다다른다. 이 위계적인 우주의 맨 위에 제1원리인 신, ‘부동의 원동자를 상정한다. 신은 순수 현실태로서 그 자체로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데모크리토스처럼 살아 있는 자연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데모크리토스는 역학적이고 무기물적인 개념과 법칙들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학적, 유기체적 범주들로 설명하고자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자연철학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경험하는 바 대로의 자연을 기술하는 것이다. 그는 다양한 종()과 생명 원리가 존재하며, 자연적 기능들과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모든 사물은 그 자체의 자연적 위치를 갖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 분야를 이론적인 학문(테오리아), 실천적인 학문(프락시스), 포이에시스적인 학문으로 구분한다. 이것들은 각각 지식(에피스테메), 실천적 지혜(프로네시스), 예술 혹은 기술적 능력(테크네)과 연관되어 있다. 이론적 학문 분야에는 자연철학과 수학, 형이상학이 포함된다. 실천적 학문의 목적은 윤리적 능력의 획득을 통해 지혜로운 행위로 나아가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과 윤리학을 실천적 학문으로 분류한 것도 흥미롭다. 포이에시스적 학문 분야의 목적은 생산하는 것이므로 이 학문들은 창조적이다. 시학과 수사학이 여기에 속한다. 또한 논리학은 모든 학문의 일부분을 구성하는 연장으로 분류된다.

 

인간은 이성적 피조물로서 살아간다. 이성적 삶은 모든 인간 존재의 보편적 목적인 것이다. 우리의 스타일을 발견하고(에토스), 공동체 내에서 우리의 위치를 찾는 것이 바로 덕(아레테)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최상의 능력을 실현할 수 있으려면 점진적인 사회화 단계를 경험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가족, 마을, 도시국가를 거치며 사람의 본성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인간 본성은 문명화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나타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간은 주로 남성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성은 주로 가족과 국지적 환경에 묶여 있다. 공동체, 즉 사회는 인간이 최상의 능력을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인간은 시민적 삶의 행위자, 사회적 존재로서 자기실현을 성취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폴리스적 동물로 개념화한다. 이성의 만족할만한 성취는 좋은 도시국가를 전제한다. 로고스와 폴리스는 상호 연관되어 있다. 플라톤이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구분하고 국가를 공동 소유와 공동육아를 하는 커다란 가족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사적 영역을 없애고자 했던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족과 국가는 다른 기능을 수행한다고 보았다. 사적 영역인 가족 내에서의 사회화에 이어서 마을과 도시국가라는 공적 영역 안의 삶을 통해 진정한 삶의 실현에 도달한다. 그러므로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대립은 없으며 오히려 내적 연관성이 존재한다. 가족은 사회화와 의사소통을 위한 근본적 제도이다.

 

인간의 삶의 목적인 좋음은 인간들이 사는 방식 속에 존재한다. 좋음은 사람들이 공동체 안에서 3단계의 사회화를 통해 최상의 능력을 실현함으로써 사회 안에서 각자 자신의 위치를 찾을 것을 요구한다. 그것이 덕의 실현인 것이다. 좋은 삶이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을 필요는 없다. 좋은 삶은 조화로운 삶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능력의 조화로운 실현인 절제와 비겁함과 무모함의 중용인 용기를 칭송한다. 중용은 구체적 상황 속에서 합당한 것과 합당하지 않은 것을 구분해낼 수 있는 도덕적 능력의 습득을 가리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존 법에 기반을 둔 정의와 평등 원리에 기반을 둔 정의를 구분한다. 전자는 사회에 존재하는 관념들, 법률과 법 전통, 법적으로 수용 가능한 것의 전통을 포괄한다. 후자는 교환적 정의와 분배적 정의로 구분된다. 여기서 핵심적인 문제는 평등하고 공정한 분배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각인에게 동등한 몫을 나눠주는 평등주의적 분배와 특별한 기능과 역할을 기준으로 평등하게 나눠주는 위계적 분배 규칙을 모두 옹호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적 안정성을 강조했다. 국민의 의견이 경청되어야 하며, 국가는 법에 의해 통치되어야 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경우 가치 있는 통찰은 전문가들의 몫이었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여론이 타당하고 사려 깊은 통찰을 나타낼 수 있다고 믿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한적 민주정이 최선의 국가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 국가는 법에 의해 통치되며, 민주적 양의 원리()와 귀족적 질의 원리가 혼합된 정체이다. 이 혼합정체가 여론과 지적행정 사이에 최상의 균형을 제공하며, 가장 실현 가능한 정체이다.

 

앞서 살펴본 네 가지 원인을 모두 자체 내에 소유하는 실체가 자연적 사물이다. 변화를 위하여 작용인과 목적인 두 가지 면에서 인간의 개입을 필요로 하는 사물이 인공적 사물이다. 인공적 사물은 인간의 창조적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창조적 행위를 도구의 생산처럼 인간에 유용한 것을 취득하는 행위와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의 복사물을 모방하는 행위로 나눠볼 수 있다. 예술에 해당하는 테크네에는 두 종류의 행위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예술의 본질은 그 자체로 즐거움을 주는 복제물이다. 예술이 모방이라는 생각은 플라톤에게서 이어받은 것이다. 그러나 지각 가능한 사물들을 모방하는 예술도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더 많은 가치를 갖는다. 실재하는 것의 모방은 우리에게 사물을 특별한 방식으로 지각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미학적 지각은 생산자(예술가)와 소비자(예술작품을 경험하는 사람) 모두에게 즐거움을 주는데 이것은 이 경험이 그 자체로 좋은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도 미학에서 윤리학으로의 이행이 일어난다. 예술은 도덕적 기능도 갖는다. 카타르시스, 즉 정화하기와 깨끗하게 씻어내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카타르시스로서의 예술은 그리스 문화에 고유한 조화 개념과 연관된다. 이를 통해 조화를 회복하고, 중용의 이상에 따르는 삶을 재개할 수 있고, 정신을 고양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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