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마오] 혁명과 고별하다: 0724 세미나 발제2019-07-24 11: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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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별혁명》제4부 혁명이 아닌 개량을 위한 철학, 제5부 정치가 아닌 사람을 위한 문학

 

무언가에 대해 ‘지나치게 정치적’이라는 평가를 하는 이만큼 ‘정치적’인 인간을 나는 보지 못했다. 어떤 문화가 정치를 우선하는 문화였다고 말하는 일은 모든 문화가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지식-권력’처럼 분리될 수 없는 것들이 분리될 수 있다고 말하는 일은 기만이다. 혁명 대신 개량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일은, 혁명과 개량이 마치 대립되는 무엇인양 착각하게 만든다. 이런 정치적 기만이 무지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그 원천은 비열함뿐이다.

 

개량은 혁명의 일부이고, 과정이다. 개량과 혁명은 따로 있지 않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개량이 혁명을 대체할 무엇이라고 거창하게 주장한다. 이는 명백하게 마오쩌둥의 유산이며, 과오이다. 국가가 혁명을 전유했을 때, 혁명이 과업처럼 하달되었을 때, 혁명에 대한 사유는 중단된다. 비판이 국가에 의해 권장되고 대규모의 형태로 이루어질 때, 비판이 가지는 파괴적이고 창조적인 기능은 상실된다. 문화혁명의 진짜 피해자는, 비판과 혁명에 트라우마를 가지게 된 지식인의 형상이다. 이 지식인들은 더 이상 비판과 혁명을 사유할 수 없게 되었다. 아마도 그들의 연구는 고유명사들을 끝없이 나열하는 데 그치게 될지 모른다.

 

리저허우는 마오의 사상을 ‘투쟁철학’이라고 정리하면서, 이에 대립하는 사상으로 마르크스의 ‘밥 먹는 철학’을 내세운다. 엉성한 대립구도만큼이나 조악한 정의 앞에서 다시 베른슈타인의 망령이 어른거린다.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보다는 《자본》이 중요하다는 베른슈타인의 주장을 리저허우 역시 되풀이하고 있다. 심지어 그는 마오가 《공산당선언》만 읽고, 《자본》은 읽지 않았으리라 추측한다. 이에 대해 나는 리저허우가 《공산당선언》과 《자본》 모두를 제대로 읽지 않았으리라 추측한다.

 

지식인/노동자를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두 사람은, 마르크스가 ‘노동자’를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살아가는 자’로 정의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임금을 받아 생활하는 자라면, 지식인 역시 노동자이다. 비판이 정당성의 근거를 묻는 일이라면, 혁명은 거기서 나아가 사회의 지배체계, 소유관계의 정당성에 대해 격렬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일이다. 지식노동을 주업으로 삼는 노동자가 비판과 혁명을 지향하지 않는다면, 이는 명백히 업무태만이다. 혁명과 고별하는 일은 이렇게 가능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혁명을 사유할 수 없게 되고, 지식인이 비판과 혁명에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될 때.

 

실상은 부르주아경제학자에 가까웠던 베른슈타인이 사회주의자임을 자처했던 것처럼, 실상은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두 지식인은 마르크스주의의 낡은 유물인 주체성을 신봉한다. 한때 신이 학문의 대상으로서 존경받았던 것처럼, 인간 역시 학문의 대상으로서 인위적으로 부각되었음을 알지 못한다. 인간주의 역시 편협한 사상임을 알지 못하기에 인간과 야수를 구분하는 해묵은 표현을 반복한다. 오히려 인간이 자신 안의 야수성을 깨달을 때 실제의 인간에 더 근접하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주체’는 자칭 지식인인 그들 자신뿐이며, ‘인간’은 자신들이 그려낸 이상적인 인간형에 불과하다. 물론 20세기와 함께 그 ‘주체’와 ‘인간’도 이미 사라졌다.

 

이미 사라진 ‘주체’와 ‘인간’을 그들이 붙들고 있는 이유는 해체를 사유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해체를 사유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바로 해체의 대상임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공고한 순서의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먼저 외국의 철학과 예술 사조와 철학자와 예술가의 이름, 책과 작품의 제목들을 아는 대로 열거한다. 이름과 제목만 외운 것인지 좋다와 나쁘다 이외의 제대로 된 평가를 하지 못한다. 그 후에는 서구와 중국은 다르며, 중국은 특수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리라 확신한다. 그렇게 내놓은 특수한 방식이 감성적 깨달음과 돈오이다. 아주 공고하고 어리석다.

 

깨달음에 대한 얄팍한 사유는 이분법적 세계관에서 온다. 전복이 아닌 반전에 불과한 것을 해답으로 믿는 것이다. 선과 악, 옳고 그름과 같은 이분법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야 근대적 의미의 ‘철학’이 가능해짐을 그들은 부정하고 있다. 단순한 뒤바꿈, 반전을 전복이나 해방으로 이해한다면, 당연히 물렁하고 유치한 결론에 닿을 수밖에 없다. 푸코가 ‘지식-권력’을 한 단어로 붙여서 부른 이유는 이 둘을 떼어내는 일이 불가능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전복은 지식과 권력을 따로 떼어내는 게 아니라, 지식과 권력을 다르게 사유하고 다르게 이용할 수 있을 때에야 가능해진다.

 

그러니 정치와 문학을 구분하는 이들의 태도는 얼마나 유치하고 소박한가. 문학과 감성/ 철학과 이성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태도는 얼마나 고리타분한가. 이 모든 게 마오쩌둥의 탓이다. 수십 년이 흘러도 ‘마오=혁명’이라는 등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할 정도로 마오의 힘은 컸고, 이미지는 강렬했다. 마오에 반대하는 것은 그 자체로 중국이라는 국가체제에 반대하는 것처럼 인식된다. 중국의 국가체제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이들은 명백하게 중국 지식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반체제 인사는 스스로의 바람과는 다르게 중국 지식인의 전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신 역시 마오가 만든 체제, 마오가 준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지 못하는 중국 지식인의 모습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지식인으로 상정하기 위해 국가가 제시하는 혁명에 반감을 품으며, 자신을 대중과 끊임없이 분리시킨다. 마오의 시대로 대표되는 20세기 중국 문화의 경박함을 비난하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대 작가들의 멍청함을 조롱하면서 말이다. 지식인이 스스로를 지식인으로 인식하기 위해 대중과 분리하려고 애쓰는 모습은 얼마나 안쓰러운가. 어쩌면 이 지식인들에게 중국의 대중은, 언제든 다시 마오의 혼령이 씌어 자신들을 공격하고 몰아세울 수 있는 홍위병으로 보이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 거부와 망상에 힘입어 홍위병이 다시 살아나는 일 또한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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