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에세이][푸코] 푸코의 연구스타일에 대하여 2019-12-22 16:2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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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연구스타일에 대하여

 

2019 에세이/ 푸코세미나/ 삼월

 

1. 비판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한 사람의 생애를 관통하는 일관성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 믿음이 한 사람에게 가상의 성격(캐릭터)을 부여한다. 일관성을 견지하지 못하는 태도, 이론, 삶의 가치는 평가절하 된다. 한 사람의 것이라고 묶기 힘든 푸코의 다양한 작업과 활동을 보며 사람들은 일관된 성격을 부여하기에 곤란함을 느꼈다. 1983년 한 인터뷰에서 기자가 그 점을 지적하자, 푸코는 이렇게 답했다. “그럼 당신은 제가 지난 몇 년간 ‘열심히 연구’해서 ‘변함없이’똑같은 주장만 되풀이’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푸코의 연구스타일에 대해 많은 부분을 설명해주는 문장이다. 푸코는 비판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려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푸코가 말하는 ‘비판’이란 무엇일까. 푸코는 우선 누군가를 비판하기 위해 ‘열심히 연구’했다. 비판은 비난과 다르다. 적대감이 비판을 가능하게 하지도 않는다. 비판하기 위해서는 우선 대상을 ‘열심히 연구’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 비판의 목적은 변화에 대한 기대이다. 비판을 통해 무언가를 몰락시키거나 전복해야 할 경우라도 목적은 역시 변화에 대한 기대와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마지막으로 비판을 위해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거나 반복해서는 안 된다. 비판은 자기 자신의 입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비판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 스스로 ‘진리’에 도달했다는 믿음은 비판의 실패를 의미한다.

 

나는 푸코가 스스로 진리와 멀어지려 했다고 본다. 비판은 모든 것,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회의하는 태도를 고수한다. 모든 것의 정당성을 의심하고 자기 자신의 정당성마저 뒤흔드는 태도가 바로, 푸코가 말하는 ‘비판’이다. 자명한 진리로 여겨지던 학설들을 비판하고 새로운 관점으로 역사를 써내려가려 했던 푸코에게 누군가는 감탄하지만, 누군가는 회의의 시선을 던지며 묻는다.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푸코 당신의 말은 진리인가?’ 나는 푸코가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답했으리라 믿는다. 푸코에게 던진 의심에 찬 누군가의 시선도 비판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회의가 다시 진리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비판은 바로 실패할 것이다.

 

누군가는 말할 수도 있겠다. 진리의 길은 멀고, 의심하기는 쉽다고. 그러나 끊임없이 의심하고, 모든 것을 의심하며, 또한 열심히 연구하면서 의심해야 하고, 자기 자신마저도 의심해야 한다면, 그 의심이 어찌 쉽다고 하겠는가. 이런 의심의 가시밭길에 비하면, 자명한 진리에 복종하는 일은 무난한 꽃길이라고 보아도 되지 않을는지. 자신의 말이 진리이니 믿고 따르라고 하는 ‘교주’들은 얼마나 많은가. 의심의 가시밭길을 버리고 그 길을 따르면, 주변 사람을 포함해 여럿이 편하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편해지지 않겠는가. 아무 변화도 기대하지 않고 늙어가면서 고요하고 편안하게.

 

푸코는 명확한 인과관계나 자명한 해답을 추구하지 않았다. 푸코의 저술이나 강연록을 끝까지 읽고 나면 중간에 갑자기 끝나버린 미완의 작품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이렇게 끝난다고?’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라는 반응이 절로 나온다. 결론을 내리기를 주저하는 푸코의 망설임에서 나는 독자 혹은 청중들에게 자신의 강의가 새로운 연구의 출발점이 되기를 바라는 푸코의 기대를 종종 읽기도 한다. 거기에는 모든 이야기의 결론에서 자신의 견해가 유일하게 자명하고 정당한 무엇으로 여겨지는 일을 경계하는 태도가 담겨있다. ‘저자의 죽음’을 선언하는 푸코는 우리에게 ‘독자의 탄생’을 종용하고 있다.

 

 

2. 가설에 대항하는 가설

 

《성의 역사 1: 지식의 의지》에는 푸코의 이런 독특한 연구스타일이 매우 과감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푸코는 이 책의 시작 부분에서 우리가 확고하게 믿고 있는 성 억압 담론에 대한 비판을 시작한다. 사람들이 아주 오랫동안 자명하다고 믿어온 의견을 비판하기 위해 푸코는 어떤 기술을 사용할까? 황당하게도 푸코는 가설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가설에 대항하는 새로운 가설을 세운다. 《성의 역사 1: 지식의 의지》의 첫 부분을 살펴보면서, 푸코의 연구스타일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 보자.

 

우리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19세기)의 이중적인 성생활 규범이 오랫동안 우리를 지배해왔다고 믿는다. 가정 내에서 생식을 위해 이루어지는 부부의 합법적 성생활을 제외하고 다른 형태의 성은 금기시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때 생식기능에 부합하지 않는 성은 침묵을 강요당하고 억압된다. 성의 역사를 억압 증대의 역사로 보는 시선은 프로이트를 지나며 근대까지 계속된다. 입헌군주인 빅토리아 여왕 시대는 부르주아의 시대이기도 하다. 성 억압의 담론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비판의 담론과 성급하게 연결된다. 노동력 동원과 양립할 수 없는 방만한 성관계가 억압의 대상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들은 오래 믿어온 만큼 설득력이 있는 주장들이다.

 

푸코는 이 주장들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말하기보다 이런 주장이 누구에게 어떤 이득을 가져오는지를 살펴본다. 특히 푸코가 주목하는 지점은 억압이다. 성과 권력의 관계가 억압적이라는 주장은 아주 흔하며, 우리에게 이상한 만족감을 준다. 푸코는 그 만족감이 어떤 이득에서 오지 않을까 의심한다. 억압이 금지와 부재, 침묵으로 연결된다면, 단지 침묵을 깨고 말하는 일만으로도 위반의 몸짓이 된다. 특히 성에 관한 억압은 성에 대한 침묵을 깨는 위반으로 연결되기 쉽다. 이때 억압은 혁명과 쾌락을 공존시키는 조건이다. 성에 대해 말하기는 일종의 쾌락이면서 동시에 위반을 통한 혁명을 꿈꾸게 한다.

 

이때 누군가 성이 억압되지 않았다는 주장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주장은 아무런 즐거움도, 이득도, 성과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오히려 성이 억압된다고 주장할 때의 즐거움과 이득과 성과가 훨씬 많다. 아무도 원하지 않을지 모를 분석을 푸코가 시작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아무런 즐거움도, 이득도, 성과도 없어 보이는 주장을 푸코가 펼치기 시작한다. 푸코의 물음은 ‘왜 우리는 억압받는가’가 아니다. ‘왜 우리는 커다란 열정과 강렬한 원한을 품고 억압받고 있다고 스스로 말하는가'이다. 억압이 자명한 역사적 사실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권력은 억압의 방식으로만 행사될까? 또 억압에 대한 비난, 혹은 비판은 권력(혹은 권력 메커니즘)을 차단할 수 있을까? 억압과 억압에 대한 비난은 과연 다른 것일까?

 

푸코는 의혹을 풀어가기 위해 ‘성이 억압되지 않았다’는 가설을 내세운다. 애초에 가설을 다르게 세워놓고 성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푸코의 연구스타일은 무언가가 ‘있음(혹은 없음)’을 전제하는 가설에 대항하기 위해 그 가설의 오류와 비판지점에 매달리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 가설을 세워 무언가가 ‘없음(혹은 있음)’에서 연구를 시작해나간다. 어떤 연구도 처음에는 가설로부터 출발하며, 완벽하게 증명될 수는 없다. 푸코는 성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방법을 알려준다거나, 선동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성 억압 담론에서 유발된 권력효과에 관심을 가진다. 인간의 성생활에 작동하는 권력-지식-쾌락 체제는 왜, 그리고 어떻게 작동하는가, 하는 문제들이다.

 

책의 제목은 《성의 역사 1: 지식의 의지》이지만, 푸코는 애초에 ‘성의 역사’를 쓰려는 마음이 없었다. 오히려 ‘성’을 근본적인 문제로 보고 뭘 쓴다는 게 거짓이거나 환상이라는 걸 보여주려고 했다. 성 억압을 거론하면서 푸코가 드러내려는 문제들은 권력의 기술과 지식의 의지이다. 금지와 검열 같은 면들은 권력의 기술과 지식의 의지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 푸코가 보는 권력은 그렇게 막무가내로 작동하지 않으며, 더욱 교묘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렇게 보면 16세기 말부터 성의 담론화는 제한되는 게 아니라 선동되었고, 권력은 여러 형태의 성생활을 확산시키고 확립했다. 지식의 의지 역시 성생활의 과학을 구성하는 데 몰두했다.

 

새로운 가설을 세우면서, 그동안 보지 않으려 했던 역사적 사실들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다. 통념과는 다르게 성이 억압되었다고 말하는 시기에 오히려 성 담론의 폭발이 감지된다. 종교개혁 이후 구교 내부에서는 성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를 하지 않는 방식으로, 고해성사가 자주 요구되었다. 행위에 대한 고백은 물론이고 상상과 욕망도 고해와 영성지도의 대상이 되었다. 욕망은 육신의 행위에 계기를 부여하는 일종의 장애로 발견되고, 인식되었다. 고백의 기술, 고백의 요구는 점점 늘어난다. 권력은 성을 금지하는 게 아니라, 생산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3. 어떻게 살 것인가

 

푸코의 가설은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간다. ‘성이 억압되지 않았다’에서 ‘성이 허구이다’까지. ‘성’이라는 영역을 일종의 허구로 본다면, 이 허구는 권력의 메커니즘과 지식의 의지가 담론의 확산을 위해 필요로 하는 허구이다. 푸코의 권력론에서 중요한 것은 억압보다 실천이다. 푸코는 우리가 권력에 의해 억압받는 게 아니라, 각자 그물망 속에서 권력을 실천하고 있다고 본다. 성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물망 속에서 성 담론을 생산하며, 성을 통해 스스로를 규율한다. 결국 푸코가 ‘성의 역사’를 통해 밝히려는 것은, 우리가 성을 통해 권력을 실천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제 무서운 진실을 알게 되었다. 권력에 의해 억압당하는 줄로만 알았던 우리가, 실은 권력을 생산하면서 실천하고 있었다는 무서운 진실. 푸코의 후기 사유가 윤리학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 자신이 권력과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는 성찰은 우리를 윤리적 주체로 각성시킨다. 스스로를 ‘아무 힘도 없는 자’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자’는 보는 일은 명백하게 다른 일이다.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자가 되어, 무엇을 실천할지를 고민하면서 살아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았다. 푸코의 연구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가라고 일러주지 않는다. 다만 모든 것을 지독하게 의심하면서 자신의 가능성과 힘을 믿으라고 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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