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겉핥기 중국철학사] 1강 기린은 사라지나 봉황은 날아오르고2019-12-14 11:3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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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안을 나눕니다. 강의 내용은 유튜브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gnnSzwjRO6U


1. 철학사에 대한 변명

우선 하나의 사실부터 언급해두자. 개인적으로는 '철학사'보다는 '사상사'라는 말을 선호하는 편이다. 이는 '철학'이라는 말에 어떤 특권의식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나에게 철학이란 보편학문이라기 보다는 진리를 독점한 특수한 지위를 지닌 학문을 가리키는 말처럼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사라는 말을 쓰는 것은 사상사라는 말이 가진 불명료한 한계 때문이다. 어쨌든 사상사라는 말보다는 철학사라는 말이 더 익숙하니 말이다. 철학이냐 사상이냐를 두고 벌이는 논쟁이 많다는 정도만 짚어두자. 아래에서는 일관되게 철학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생각이다. 


언젠가 나에게 '철학사'를 공부해서 뭣하냐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철학이란 곧 '철학하기 '이며 이는 철학사, 즉 개념의 역사를 배우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여겼던 듯하다. 물론 그 지적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중국 철학이란 경전과 주석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중국철학사는 끊임없는 해석의 역사였다. 해석과 재해석, 경전과 주석의 서로 맞물리는 관계를 빼놓고는 중국철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 


한편 중국에서 '역사'가 가진 특정한 역할에 대해서도 언급해야겠다. 역사란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기술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역사란 하나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것이며, 과거의 사건은 언제든 현재와 뒤섞여 공존할 가능성에 열려 있다. 중첩된 시공간이라고 해야 할까? 중국의 철학자들은 자신이 늘 누적된 지층 위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즉, 맥락없는 철학은 없다.


서양 철학사가 개념의 역사라면 중국 철학사는 인물의 역사, 더 구체적으로는 텍스트의 역사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도 인물과 텍스트를 따라 철학사를 훑어볼 예정이다. 구체적인 시대를 살았던 특정한 인물과 그들의 글을 가능한 일목요연하게 이해하는 것이 본 강의의 목표이다. 최소한의 목표라면 중국철학이라 할 때 떠오르는 수많은 인물과 텍스트의 순서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할 수 있겠다.


본 강좌를 기획한 것은 수년 전 어느 경험 때문이다. <주자평전>이 완역되어 기쁜 마음에 세트로 구입했다. 책을 받고 보니 큰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연구실 동료들에게 자랑했는데 영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그래, 아끼는 것이 다르니 그건 그렇다치자. 헌데 이런 질문은 참 난감했다. '그래서 주자가 언제적 사람이에요? 공자와 비슷한 시대 사람인가?' 그때 나의 항변. '그래도 나는 스피노자와 소크라테스는 구분하는데...' 


중국을 이야기할 때 강조하는 말이 있다. 대한민국과 가장 가까운 나라는 중국이라는 것. 그러나 물리적인 거리와 상관없이 중국은 까마득히 멀다. 중국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매우 낮다. 더구나 중국에 대한 관심도 거의 없는 상황이다. 조금씩 상황은 바뀌어 가고 있지만 중국에 대한 이해의 정도는 현실의 필요를 전혀 뒤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부디 본 강의가 중국을 더 이해하는 하나의 통로가 되기를 바란다.



2. 삼분三分 철학사


본의 아니게 3강에 걸쳐 철학사를 개괄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적절한 구분이기도 하다. 삼분三分이란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지 않나. 이해하기 편리하기도 하고. 1강은 춘추전국시기의 철학을 다룬다. 2강은 현대중국 수립 이전을 다루며, 3강에서는 청말기 부터 오늘날 까지를 이야기해볼 생각이다. 물리적인 시간만 보면 무리한 구분이다. 1강에서 다루는 기간 약 500여년 이라면 2강은 약 2,000여 년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3강은 고작 백여년 되려나? 이렇게 나눈 것은 각 시대 사이에 특정한 변곡점이 있기 때문이다. 


진秦나라의 등장은 새로운 역사의 시발점이었다. 그 이후 중국은 황제를 중심으로 하나의 거대한 통일 제국을 구성한다. 한편 청의 몰락은 또 하나의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황제는 사라졌지만 황제와 제국의 유산은 그대로 물려받았다. 이에 따라 중국의 철학도 새로운 문제를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펑유란은 <중국철학사>를 통해 중국철학을 크게 둘로 구분한다. 하나는 <자학시대子學時代>로 무슨무슨 자子로 불리는 철학자의 시대를 일컫는다. 1강에서 다룰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이다. 또 다른 하나는 <경학시대經學時代>로 경전을 숭상한 시대라 할 수 있다. 그 다음에는? 펑유란은 <중국철학사> 상권과 하권에서 각 시대를 다루었다. 말년에 그는 <현대중국철학사>를 쓰기도 했지만 그 저작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굳이 이름을 붙이면 '포스트 경학시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탈경학시대'? 경전과 전통이 기존의 권위를 잃고 새로운 변화에 직면한 시대의 고민을 3강에서 다룰 예정이다. 


결국 이 강의는 얼마간 펑유란에게 빚지고 있는 셈이다. 펑유란은 1894년에 태어나 1990년에 세상을 떠났다. 청말기에 태어나 현대중국사의 격변을 산 인물이다. 그의 생몰년대는 역설적으로 하나의 상징과도 같다. 1894년의 중국과 1990년의 중국은 결코 같지 않으니 말이다. 그는 꽤 왕성한 활동을 했으나 불행한 중국사와 얽혀 나머지 반평생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이에 대해서는 3강에서 간략히 다루도록 하자.


펑유란은 <중국철학사>에서 중국에서 철학이라 할 만한 것을 골라내는 것이 자신의 작업이라 밝혔다. 따라서 그 작업은 필연적으로 커다란 한계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철학의 범주에 들지 못한 것이 있기 마련이니 말이다. 특히 정치적 맥락, 예술적 맥락에서 펑유란의 작업은 적잖은 한계를 지닌다. 가능한 이 점을 고려하여 풍부하게 서술하는 것이 목표겠으나 너무 원대한 꿈을 갖지는 말자. 겉핥기니까.



3. 기린은 사라지고


기린麒麟은 상상 속의 동물이었다. 상서로운 동물로 여겨졌는데 공자는 기린이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에 크게 탄식하였다. 왜냐하면 더는 자신이 꿈꾸던 과거의 영광스런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는 고대 주周나라를 자신의 이상으로 삼았다. 가능하다면 주나라의 문화를 다시 부흥시키고자 했다. 그는 자신이 그런 사명을 타고 태어났다고 여기기도 했다.


주나라는 하夏나라와 은殷나라를 이어 중국을 통일한 나라이다. 하나라와 은나라는 각각 포악하고 음탕한 군주에 의해 몰락의 운명을 맞았다고 전해진다. 걸왕桀王과 주왕紂王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 둘을 묶어 포악한 군주의 대명사, '걸주桀紂'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이들의 비행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자성어가 바로 주지육림酒池肉林이다. 술로 못을 만들고 고기로 숲을 만들었다. 매일매일 파티를 벌이는 왕이었던 셈이다.


주나라 문왕文王은 은나라의 몰락을 보며 힘을 키웠고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군대를 일으켜 주나라를 무너뜨린다. 이때 무왕이 은나라 타도를 외치며 내놓은 말이 그 유명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실상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역사는 정복자의 손에 기록되기 마련이니. 어쨌든 주나라는 은나라가 망할만 해서 망했다 전한다.


주나라는 커다란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고안한다. 바로 왕의 친족과 공신들에게 나라를 떼어주는 것이다. 이를 봉토건국封土建國이라 하며 이를 줄이면 '봉건封建'이 된다. 이렇게 세운 나라를 제후국이라 부른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저마다 제 나라를 다스렸지만 왕의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다. 왕은 주나라 왕 하나 뿐이었으며 나머지 제후국의 임금은 '공公'이라 부른다. 


제나라와 노나라는 대표적인 제후국이라 할 수 있다. 제나라는 강태공 강상姜尚/여상呂尚에게 때어준 나라다. 그는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한편 노나라는 무왕의 동생인 주공周公에게 떼어준 나라였다. 주공 역시 형 무왕을 도와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노나라를 다스리지 못했는데 형 무왕이 일찍 세상을 떠나버려 무왕의 아들, 조카인 성왕을 보필해야했기 때문이다. 결국 주공의 아들 백금이 노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공자(孔子, BCE511~BCE479)가 바로 이 노나라 출신이었다. 그는 노나라가 주나라의 친족국가로서 주공의 업적을 이어 주나라의 화려한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고 여겼다. 후대에 만들어지는 성인의 계보는 이렇다. "요-순-우-탕-문-무-주공-공자" 요임금과 순임금은 전설상의 성인이고, 우임금은 하나라를, 탕임금은 은나라를 세운 인물이다. 문왕과 무왕 그리고 주공은 주나라의 창시자이며 공자는 이들을 계승하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요-순-우-탕'이 왕조의 교체를 보여준다면, '문-무-주공'은 혈연관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주공과 공자의 관계는 어떤가? 정치적 계보가 철학의 계보로 바뀌는 순간이다.


주나라 유왕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는 포사라는 여인을 좋아했다는데 그의 미소를 보기 위해 거짓으로 봉홧불을 올렸단다. 이 행위는 제후들의 반감을 샀고 결국 이민족의 침입에 주나라는 수도를 동쪽으로 옮겨야 했다. 이렇게 동쪽으로 옮긴 이후를 보통 동주시대라 하며 이를 춘추전국시대의 출발로 본다. 


춘추전국시대의 '춘추'는 공자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역사책 <춘추>에서 따왔다. 공자는 노나라의 역사를 기술하여 당대의 혼란을 바로잡고자 하였단다. 그러나 공자의 시도도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돌릴수는 없는 일이었다. 주나라의 위상이 무너지자 상대적으로 제후들의 위상이 커졌다. 제후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시대가 바로 춘추전국시대이다.


공자는 이런 혼란기 속에서 주나라를 중심으로한 규범적 제도를 다시 부활시키고자 했다. 공자는 '예禮'를 중시했는데, 이 '예禮'란 바로 주나라의 다양한 문화적 유산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안정적으고 문화적으로 융성한 시대를 회복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렇다고 그가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기만 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는 '인仁'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여 이런 혼란기를 바로잡을 새로운 인간형을 탐구하기도 했다. 군자君子는 본디 '군주의 아들', 즉 통치계층을 의미하는 말이었으나 그는 이 말을 차용하여 통치자가 지녀야 할 덕목을 상세히 이야기했다.


공자는 고향 노나라를 떠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이상을 펼칠 기회를 얻고자 했다. 그러나 이상은 이상일 뿐이었다. 그를 받아주는 군주는 없었다. 결국 공자는 고향 노나라에 돌아와 말년을 보냈다. 그는 말년에 제자를 키우고 고대 문헌을 정리했다고 전해진다. 이때 그가 정리한 문헌이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주역周易〉이다. 그리고 <춘추春秋>를 썼으며 그의 제자들이 공자의 말과 행적 등을 엮어 <예기禮記>를 썼다고 전해진다. 이 다섯권의 책을 묶어 '오경五經'이라 부른다. 그러나 과연 공자가 오경에 얼마나 관여했는지는 오늘날 커다란 논란거리 가운데 하나이다.


그보다 <논어論語>가 공자의 행적이나 말을 잘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은 공자 사후에 엮였는데 정확히 언제 누가 저술하고 편집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공자가 직접 쓰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공자가 직접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공자의 이상을 가장 잘 담고 있는 책으로 여겨지고 있다. <논어>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끝난다. "사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라 할 수 없다. 예禮를 알지 못하면 제대로 설 수 없고, 말(言)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제대로 알 수 없다.'(不知命,無以為君子也。不知禮,無以立也。不知言,無以知人也。)



4. 관포지교 부국강병 일통천하


사마천(司馬遷 BCE145?~BCE86)은 고대사를 정리하면서 다섯명의 성인을 이야기한다. 까마득한 옛날 은나라 이전에 다섯명의 성인이 있어 문명의 씨앗을 틔웠단다. 이 다섯을 묶어 오제五帝라 부른다. 이 다섯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저마다 논란이 있으나 사마천은 황제黃帝, 전욱, 제곡, 요, 순을 꼽는다. 여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제가 누구냐 하는 것보다 다섯이라는 숫자이다. 의미있는 숫자를 좋아했던 고대 중국인들은 이렇게 특정시대의 단면을 숫자로 요약하곤 했다. 


춘추시대에도 다섯명의 주요 제후들이 있다. 이들을 묶어 춘추오패春秋五霸라 부른다. 춘추시대의 다섯명의 패자覇者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 처음으로는 제나라 환공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춘추시대를 호령한 인물이었지만 그보다는 그를 보필한 관중이 더 유명하다. 


관중은 본디 제환공을 보필하던 인물이 아니었다. 제나라의 임금 자리를 두고 다투는 상황에서 관중은 훗날 제환공이되는 공자公子 소백小白을 암살하려하기도 했다. 관중의 계책에도 불구하고 소백은 제나라의 임금이 되는데, 이때 목이 달아날 뻔 한 관중을 구해준 것이 바로 그의 어릴 적 친구 포숙아였다. 포숙아는 이렇게 말했단다. 천하를 도모하려면 관중을 재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관포지교管鮑之交, 관중과 포숙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사전 같은 데서 찾아보면 친한 친구 관계라고 하지만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읽어보면 좀 다르다. 어려서부터 관중은 이런저런 사고를 많이 쳤는데 그때 마다 포숙아는 관중 편을 들어주었단다. 그래서 관중은 이렇게 말한다. "나를 낳아 준 것은 부모였지만 제대로 나를 알아준 것은 포숙아였다.(生我者父母,知我者鮑子也。)"


공자 역시 <논어> 마지막 문장에서 알아줌(知)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포숙아 같은 인물이 없었다. 그래서 <논어>에서 공자는 여러차례 이렇게 말한다. "남이 나를 알아 주지 않더라도 맘 상하지 말거라.(人不知而不慍)" 공자의 이런 한탄에 이렇게 항변하는 제자들도 있었다. 선생님께는 저희들이 있지 않습니까? 공자 주변에는 늘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그를 거쳐한 제자가 삼천이란다. 그 많은 제자도 공자의 외로움을 달래줄 수 없었다. 


공자가 외로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관포지교의 고사는 전통적인 규범보다 실실적인 성과가 더 중요하다는 시대의 변화를 보여준다. 제환공이 너그러웠기 때문에 관중을 놓아준 것이 아니라 능력이 있다면 적도 언제든 내편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편 한 인물의 재능이 얼마나 커다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관중 덕택에 제환공은 천하를 호령하였으나 관중이 죽고 세상을 떠나자 제환공은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그의 아들들이 임금 자리를 두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이는 바람에 한동안 제환공의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 역사는 그의 시체에 쓴 구더기가 문간을 넘어올 정도였다고 전한다. 


제환공과 관중의 경험은 이웃 나라의 제후들에게 적잖은 영감을 남겼다. 누구든 제환공과 같이 위세를 떨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관중과 같은 인물만 있다면. 각 제후들은 인재를 모시기에 혈안이었다. 맹자(孟子 BCE372~BCE289)는 이런 뜨거운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공자의 후예를 자처하며 공자처럼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맹자>는 양혜왕과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양혜왕이 맹자를 맞아들이며 나라에 이익(利)이 되겠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듣자마자 맹자는 말끈 성을 내며 이렇게 말한다. '어찌 꼭 그렇게 이익만을 말합니까!(何必曰利)' 첫 만남부터 맹자의 호통을 들은 양혜왕은 꽤 머쓱했을 것이다. 나라의 이익을 도모하지 않는다면 무엇하러 맹자 같은 인물을 융숭히 대접하며 맞이했을까.


흔히 춘추전국시대라 일컫는 말은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합하여 부르는 표현이다. 공자가 지었다 전해지는 <춘추>에서 춘추라는 표현을 빌려왔듯, '전국'도 책 이름에서 따왔다. 바로 <전국책戰國策〉. 전국책은 당시 여러 나라를 떠돌던 책략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제목에서 볼 수 있듯 각 나라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몰두하고 있었고, 이를 위해 다양한 책략을 골몰하고 있었다. 


양혜왕梁惠王은 인재와 책략에 목마른 인물이었다. 춘추전국시대를 보면 양梁이라는 이름의 나라가 보이지 않는다. 엄밀하게 따지면 그는 위혜왕魏惠王이 되어야 한다. 헌데 어째서 <맹자>는 그를 양혜왕으로 기록하는 걸까? 이는 그가 이웃 나라의 침입을 받아 수도를 대량大梁, 지금의 카이펑開封으로 옮겼기 때문이었다. 이웃 나라의 침입을 받아 나라 꼴이 영 말이 아니었던 셈이다. 


더 문제는 위나라 출신의 인재들이 이웃나라에 가서 높은 자리에 올라 거꾸로 위나라로 쳐들어 왔다는 점이다. 손빈은 제齊나라의 군대를 끌고 쳐들어 왔고, 상앙은 진秦나라의 군대를 끌고 쳐들어 왔다. 손빈은 이름난 병법兵法가였으며 상앙은 변법變法, 법을 통한 개혁으로 진나라의 부강을 도모한 인물이었다. 이러니 혜왕 입장에서는 인재에 목이 마를 수밖에. 그래서 맹자를 만났건만 맹자는 이익에 대한 이야기는 집어 치우고 인의仁義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고 한다.


공자가 인仁이라는 표현을 통해 새로운 인간상을 탐구했다면, 맹자는 인의仁義라는 표현을 통해 규범적인 도덕체계를 세우고자 했다. 맹자는 보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공자의 작업을 계승하고자 했다. 그래서 공자에게 인仁이 추상적이며 이상적인 가치였다면, 맹자에게 인仁은 근본적이며 핵심적인 가치가 된다. 공자는 인을 추구하라고 말했지만, 맹자는 인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따라서 공자와 비교할 때 맹자는 더욱 보수적이다. 예를 들어 관중에 대한 평가에서도 이 둘은 크게 엇갈린다. 공자는 관중이 없었다면 오랑캐의 지배를 받았을 것이라며 관중의 역할을 긍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맹자는 가차없다. 관중을 시정잡배처럼 여기는 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효孝에 대한 관점에서도 이 둘은 서로 다르다. 공자는 부모의 마음을 유추해 보라는 식으로 효에 대해 이야기했다. 맹자는 순임금의 고사를 빌려 설사 부모가 자신을 죽이고 해치려는 마음을 품어도 원망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효孝는 죽어서라도 지켜야 하는 가치가 된다.


이런 차이는 시대의 변화에서 연유한 것일 수 있다. 공자의 시대에는 그래도 주周나라의 영광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엿보였지만 맹자의 시대에는 그런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천하는 어떻게 될 것 같느냐는 질문에 맹자는 이렇게 답하기도 했다. "통일 되겠지요,(定於一)" 그러나 그 통일 국가가 주나라일 가능성은 없었다. 주나라는 이제 허수아비나 다름없고, 새로운 통일 왕조가 등장할 차례였다.


그렇기에 제후들은 저마다 제 나라의 부강을 꿈꾸었다. 부국강병富國強兵의 목표는 일통천하一統天下, 천하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제 전국시대에는 호칭도 바뀐다. 본디 주나라 임금만 왕王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지만 이제는 너도나도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한다. 관중은 제환공을 섬겼지만 맹자는 제선왕을 만난다. 제나라의 임금의 호칭이 공公에서 왕王으로 변화했다는 것은, 제나라의 위상이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주나라의 위상이 땅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맹자>는 새로운 천하의 통치자가 갖춰야할 이상적인 덕목에 대해 세세하게 논의하고 있다. <논어>는 군자라는 표현을 통해 폭넓은 통치계층을 대상으로 이야기한다. 당시 제후들을 두고 하는 말이기도 했으나, 그들 아래에서 관직을 얻을 제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기도 했다. 혹은 설사 관직을 얻지 못하더라도 군자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맹자는 성왕聖王의 이상을 통해 명확히 한 나라의 지배자를 청자로 삼고 있다. 천하의 지배자가 될 수 있는 잠재적 후보군이 맹자의 관심대상이었다. 맹자는 그들의 교사가 되고자 했다. 그렇기에 <맹자>에는 더욱 도덕규범적인 냄새가 난다. 



5. 곤화위붕鯤化爲鵬, 봉황은 구만리 창천으로 날아 오르고


유가儒家의 계보는 맹자를 공자 다음에 놓는다. 그러나 이는 후대의 해석이 개입한 결과이다. 맹자는 공자의 계승자로 자처했으나, 정작 공자가 맹자를 보았다면 어떻게 여겼을까 의문이다. 짐작건데 공자는 이 야심 넘치는 인물을 그리 탐탁치 않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공자는 야심찬 제자를 그리 기껍게 여기지 않았다. 공자가 가장 사랑했던 제자는 안회顏回였는데, 그는 안빈낙도安貧樂道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안회는 가난했지만 벼슬에 관심이 없었다.


양혜왕은 맹자 이외에도 여러 인물을 끌어 모았다. 당연히 그의 궁정도 여러 인물이 각자의 주장을 펼치는 공간이었다. 양혜왕을 섬긴 인물 가운데는 혜시惠施라는 인물도 있었다. 그의 행적이 크게 남아 있지는 않으나 그의 이름이 전해지는 것은 훌륭한 친구를 두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장주莊周, 훗날 장자莊子라 불리는 인물이 그 주인공이다.


후대에 끼친 영향에 비하면 장자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출생지도, 생몰연대도 불분명하다. 다만 사마천의 기록을 참고하면 한때 낮은 관직에 있었으며, 뛰어난 재능으로 재상자리를 제안 받았지만 단칼에 거절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천금보화를 제안받았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하찮게 여기지 않고 만족했다. 마치 공자의 제자 안회처럼. 


앞선 <논어>나 <맹자>와 달리 <장자>는 장자의 말을 그리 많이 기록하고 있지 않다. <논어>는 자왈子曰, <맹자>는 맹자왈孟子曰로 시작하며, 각각 공자와 맹자의 말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장자>에서는 장자왈莊子曰이라는 표현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대부분은 이야기, 그것도 지어낸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이를 흔히 '우화寓話'라 하는데 <장자>의 우화적 형식을 조금은 조심스레 이해할 필요가 있다. 흔히 우화를 '교훈적 이야기'로 이해하곤 한다. 그러나 장자는 교훈을 전하는데 별 관심이 없다. 특정한 인물, 사물, 동물을 빌려 이야기를 전할 뿐이다. 우화란 빗댄 이야기일 뿐이다. 


<장자>에는 수 많은 존재가 등장한다. 인물도 많고 사람이 아닌 것도 많다. 그 중에 공자와 안회가 있다. 제법 여러 차례 등장하며 핵심적인 가치를 전하기도 한다. 때로는 공자의 입으로, 때로는 안회의 입으로. 따라서 일부 연구자들은 공자와 장자의 연관성에 주목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통적으로는 이 둘을 대립적으로 보았는데, 이는 일차적으로 사마천의 기록 때문이다. 사마천은 장자가 유가儒家를 공격하며 비판했다고 전한다. 또한 후대의 습관적인 인식, 유가儒家와 도가道家라는 학파의 대립으로 이해하면 이 둘의 사이는 더욱 멀어진다.


공자가 천하를 돌며 기회를 찾았듯, 맹자가 여러 임금을 만나며 자신의 이상을 설파했듯, 당대에는 세상을 떠돌며 자신의 재능을 내세운 자들이 많았다. 이를 유세객遊說客이라 하는데, 이들은 천하를 돌아다니고(遊) 자신의 학설을 전하며(說) 자신의 주인이 될만한 사람을 만나고자 했다.(客) 이들은 때로 일관된 정치적, 철학적 사유를 공유하고 있는 집단의 모습으로 돌아다니기도 했다. 자신의 학설을 대표할만한 인물을 내세우기도 했다. 이렇게 다양한 학설과 여러 철학자가 교차하는 시대였다. 이를 간결하게 줄이면 제자백가諸子百家라 할 수 있다. 훗날 사마천의 아버지는 이를 총 여섯개의 학파로 나누었다. 유가, 묵가墨家, 명가名家, 법가法家, 도가道家가 그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 시대에는 그러한 명확한 구분이 있을리 없었다. 도리어 무엇이라 딱히 이름 붙일 수 없는 재주꾼들도 여럿 있었다. 맹상군의 고사는 이를 매우 흥미롭게 보여준다. 맹상군은 제나라의 실력자로 그의 곁에도 수많은 인물이 몰려들었다. 그는 진나라왕의 초청을 받아 진나라를 방문한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을 해하려는 진나라의 계책임을 알고 도망치려 한다. 이때 도둑질을 익힌 식객食客의 재주가 큰 도움이 되었다. 개처럼 몰래 숨어 들어가 재물을 훔쳐오고 그 재물로 손을 써 진나라 궁궐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궁을 나왔지만 관문을 너머가는 게 문제였다. 이번에는 닭 울음소리를 내는 재주꾼이 있었다. 그가 닭울음소리를 내자 아침인줄 알고 관문이 열렸다나뭐라나. 이 계명구도鷄鳴狗盜의 고사는 정말 다양한 인간상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장자도 크게 보아 이런 인물에 가깝다고 해야겠다. 그는 자신의 재주가 어떻게 쓰일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기이한 이야기를 지어내는 바람에 그의 친구 혜시는 자주 그를 타박하곤 했다. 그런 헛된 이야기를 지어 무엇하느냐고. 그러나 장자는 '쓸모 없는 것이야 말로 쓸모가 있다'는 해괴한 주장을 내놓으며 혜시의 비판을 꺾는다. 쓸모 없는 것의 쓸모란 무엇인가?


저마다 부국강병을 앞세우며 천하통일의 꿈을 꾸는 상황에서 궁극적으로 승자는 오직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맹자는 그 잠재적인 승자에게 인의仁義라는 가치를 심어주고자 했으며, 한편 인의仁義라는 가치를 숭상해야 천하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는 이상을 품기도 했다. 그러나 장자의 관심은 영 다른 데 있다. 이러한 극심한 경쟁의 틈바구니속에 결코 승자가 될 수 없는 이들에 장자의 관심이 있다. <장자>에 다양한 신체적 불구자, 범죄자, 낮은 신분의 가난한 이들이 등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적어도 장자는 그런 시대의 가치에 도무지 편승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장자>를 펼치며 나오는 곤과 붕의 이야기는 그가 영 딴 데 관심을 두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아득한 북쪽 바다에는 크기를 알 수 없는 물고기가 있단다. 그 이름이 곤인데, 그 곤이 기운을 떨쳐 하늘을 솟구치면 이 곤이 커다란 새로 변한다. 도무지 크기를 잴 수 없는 이 커다란 새는 구만리 창천으로 날아 올라 하늘을 가로지르며 아득한 남쪽 바다로 날아간다. 


맹자가 던지는 질문은 이렇다. 천하를 다스리는 인물은 어떤 덕목을 갖추어야 하는가? 이를 이렇게 바꾸어도 좋다. 어떤 덕목을 갖추어야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가? 장자에게는 이런 질문이 아무 의미가 없다. 천하의 향방이 어떻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랴하는 게 그가 던지고 싶은 질문일테다. 물론 대답을 요하는 질문은 아니다. 맹자는 이런 장자와 같은 사람을 두고 천하보다 제 한몸을 더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라 손가락했을 테지만, 장자는 거꾸로 항변할테다. 도대체 천하가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이유가 어디 있느냐고. 


그러나 장자가 후대 사람들의 이목을 끈 것은 개인의 생명 유지에만 관심을 두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개체의 생명을 중시했으나 또한 천하보다 더 큰 세계가 있다는 점을 염두해두고 있었다. 장자가 말하는 바다란 이 땅이 끝나는, 바로 천하 바깥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그곳은 알 수 없는 기이한 것들이 존재하는 신비한 세계이다. 기존의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야기들을 길어올리는 것이 장자의 작업이었다. 그가 특유의 부정의 방법을 통해 논의를 전개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말하는 자는 제대로 알지 못하며, 제대로 아는 것은 말로 옮길 수 없다.(知者不言,言者不知)' 


시대와 불화했다는 점에서 장자와 공자의 거리가 가깝지만, 언어를 두고는 이 둘의 거리를 도무지 좁힐 수 없어 보인다. 공자는 말을 알아야만 한다 했지만, 장자는 말의 무용성을 끊임없이 주장했다. 장자가 터무니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기존의 언어규범으로 다룰 수 없는 주제를 다루고자 했다. 이를 한 글자로 옮기면 도道라 할 수 있다.


장자가 이런 풍부한 상상력의 소유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의 출신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그가 어느 나라 출신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는데, 일부 연구자는 그가 소국 출신으로 전란의 피해를 고스란히 겪었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어쨌든 그는 자신이 시대의 승자가 될 수 없었음을 꿰뚤어 보았고, 또한 적잖은 사람들이 비참한 결말을 맺으리라 짐작했다. 공자가 자신이 당면한 현실에 관심을 두었다면 맹자는 그보다 고개를 더 높이 들어 통치자와 눈높이를 같이 하고자 했다. 장자는 공자보다 더 낮게 생명과 일상의 문제로 파고들었고, 맹자보다 더 높게 천하바깥의 세계로 눈을 돌렸다. 


후대에 장자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방외인方外人, 즉 세속에 초탈한 사람이라 하지만 이는 절반만 맞는 말이다. 장자는 세속의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자 했으나,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는 매우 현세적이며 매우 공상적인 인물이었다. 이러한 모순성이 <장자>로부터 다양한 가능성을 탐구하게끔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또한 도道라고 하는 독특한 개념의 이중성도 여기서 연유한다. 도는 바로 곁에 있는 것이되, 까마득히 먼 것이기도 하다. 일상성과 초월성, 이 모순을 한데 품고 있는 것이 바로 도道이다. 



6. 천하, 헤아릴 수 없는 욕망의 집합체


앞서 이야기했던 여러 인물 가운데 상앙을 다시 언급해야겠다. 그는 춘추시대의 판도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그는 법法을 통해 진나라의 기틀을 새롭게 잡고 천하통일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일찌기 공자는 법을 매우 싫어하였는데, 징벌적 효과만 있을 뿐 개인의 내면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공자가 보기에 형벌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었다. 한편 이는 그가 숭상했던 전통적인 문화가치, 예禮를 법法이 파괴한다 여겼기 때문이기도 했다. 실제로 법은 예의 자리를 빠르게 대체했다.


법이 명문화된 규범에 따라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예는 문화전통의 영향을 빌어 개인의 일탈을 미리 차단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더 큰 차이는 법이 개개인에게 똑같은 의무를 지우는 반면, 예는 상하 위계에 따라 차등을 둔 다는 점에 있다. 권리는 많았지만 상대적으로 의무는 적었던 당시 귀족 계층의 입장에서 법은 전혀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이런 까닭에 자신을 신뢰하던 효공이 세상을 떠나자 상앙은 귀족 세력에 의해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다. 


비록 참혹한 최후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상앙이 불을 지핀 변화의 바람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진나라의 모든 사람은 군공을 세워 자신의 지위를 바꿀 수 있었다. 따라서 전쟁터는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 현장이었다. 상앙은 진나라 전체를 마치 군사 국가처럼 바꾸어 놓았고, 그 결과 진나라의 군대는 나머지 여섯나라를 압도할 정도가 되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합종연횡의 계책이다. 각각 소진과 장의에 의해 발안 되었다고 하는 이 계책은 진나라의 부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합종은 진나라의 동진을 막기 위해 나머지 여섯 나라가 동맹을 맺는 것을 말한다. 반대로 연횡은 진나라가 다른 나라와 비밀리에 동맹을 맺어 여섯나라의 동맹을 깨는 것을 가리킨다. 합종책으로 진나라의 부상을 일시적으로 막았지만 이미 천하는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동쪽의 전통적 강국이었던 제나라는 그래도 긴 안목으로 천하의 판도를 바꾸고자 했다. 이에 따라 진나라의 수도 임치에는 하나의 학술연구소가 세워졌는데 이를 직하학궁稷下學宮이라 부른다. 여기에 또 수많은 인물들이 모여들었고, 자유롭게 여러 사상을 교차하며 다양한 실험을 벌였다. 직하학궁을 거쳐간 인물 가운데 순자(荀子, BCE298?~BCE238?)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이 직하학궁의 연구소장 격인 좨주를 세차례나 역임했던 인물이었다 한다. 


순자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이런 그의 행적보다 그가 앞선 인물들과 다른 철학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맹자처럼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탐욕스런 인간의 욕망을 인정하고 이를 조절하는 법에 관심을 두었다. 그의 핵심적인 주장을 옮겨보자. 


"예란 무엇인가. 사람은 태어나면서 욕망을 가지고 있는데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면 가지려고 한다. 바라는 것은 한이 없고 끝이 없으니 결국 다투게 된다. 다투면 천하가 어지러워지고 궁핍해진다. 옛날 훌륭한 임금은 이 어지러움을 싫어하여 예禮를 제정하여 경계를 두고자 했다. 이렇게 사람들의 욕망을 다루고자 했다. 사람들이 가지려고 하는 것을 충족시켜주되 욕망이 끝없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사물이 다 사라지지도 않고 양쪽이 모두 균형잡혀 자라도록 하였다. 이것이 예를 만든 까닭이다. 따라서 예란 사람의 욕망을 다루는 기술이다.(禮起於何也 曰 人生而有欲 欲而不得 則不能無求 求而無度量分界 則不能不爭 爭則亂 亂則窮 先王惡其亂也 故制禮義以分之 以養人之欲 給人之求 使欲必不窮乎物 物必不屈於欲 兩者相持而長 是禮之所起也 故 禮者養也)"


이렇게 순자는 구체적인 인간 개개인의 욕구를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에 관심이 있었다. 예란 공자가 말했듯 전통적인 문화유산이기도 하나 순자가 주목했던 것처럼 사람의 행위에 제한을 가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처럼 순자는 예를 통해 사람들 사이에 한계를 두고 조화로운 사회를 구성하는데 관심을 두었다. 가족에 대한 관심이 덜하다는 것도 중요한 차이점이다. 순자에게 예란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사이의 규범에 그치지 않았다. 언제든 마주칠 수 있는 존재, 한정된 물질적 자원을 두고 다툴 수 있는 잠재적 경쟁상대와 사이에 예가 필요하다. 


이렇게 초점이 이동한 것은 주周라는 천하 가족이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어져버렸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제후국은 주왕실과 어떻게든 관계를 맺고 있었다. 주나라는 제후들의 큰집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관계는 아무 의미가 없어져버리고 말았다. 천하 사람들은 마구 뒤섞였고, 서로 경쟁을 그치지 않았다. 이들 사이에 어떻게 조화를 추구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순자가 중요한 이유는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철학을 내세운 까닭도 있지만, 그에게서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 나왔기 때문이다. 바로 이사와 한비자가 그 주인공이다. 이사는 진시황을 섬기며 통일제국의 기틀을 닦은 인물이었다. 한비자는 법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종합한 인물이다. 이 둘의 악연에 대해서는 차후에 언급하도록 하자.


이사는 젊어서 말단 관리가 되었는데 하루는 화장실에서 쥐가 사람을 보고 화들짝 놀라 도망가는 모습을 보았다. 반면 창고의 쥐는 배를 두드리며 느긋한 게 아닌가.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에 이사는 더 높은 성공을 위해 고향을 떠난다. 그렇게 순자의 제자가 되었고, 이어서 진나라에 들어가 진시황을 섬기는데 까지 이른다. 단순히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이사의 이야기는 욕망이라는 주제에 대해 가감없이 이야기하는 인간이 등장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순자는 이사가 창고 쥐처럼 풍족한 삶을 누리기 바란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 욕망을 품고 있다는 것이 그의 제자가 되는 데 큰 문제가 되었을리 없다.


공자, 맹자, 장자가 이상에 사로잡힌 인물이라면 순자와 이사는 철저하게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진나라의 부상은 현실의 부상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했다. 실제로 진나라는 본디 주나라의 봉건체제 바깥에 있던 나라였다. 그러다 후대에 서쪽 변경에서 힘을 키워 제후국들의 다툼에 끼어들었다. 근본도 없는 이 나라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특정한 가치에 매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진나라는 문화적으로도 학술적으로도 풍족하지 않았다. 각국의 사람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끌어들였으며 실력만 있다면 출신에 상관없이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었다.



7. 그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함곡관은 좁은 관문으로 진나라로 들어가는 입구인 동시에, 진나라가 군대를 이끌고 나머지 국가를 정벌하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었다. 당연히 이 관문에서는 치열한 전쟁이 여럿 벌어졌다.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 커다란 소를 타고 관문을 넘어 서쪽으로 가려했단다. 이때 관문을 지키던 관윤이라는 자는, 그의 비범함을 보고 한편의 글을 부탁했다. 노인은 일필휘지로 쓴 짧은 글 하나를 건냈는데 그것이 바로 5,000자의 <노자 도덕경>이었다 한다.


<노자>는 <도경道經>과 <덕경德經>으로 이루어져 있어 <도덕경>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를 썼다고 하는 노자는 그 행적도 출신도 매우 불분명한 인물이다. 불분명하다는 것은 그를 둘러싼 이야기가 대부분 신화와도 같은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노자는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흰 수염과 눈섭을 지니고 있었단다. 그래서 이름이 노나老子라나 뭐라나. 


이런 신화적인 이야기 때문에 노자라는 역사적 인물이 과연 누구이며 어떤 행적을 남겼는지 고찰이 매우 어렵다. <노자>에 얽힌 다양한 신화가 노자라는 인물에 대한 이미지를 구성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테다. 흔히 노자가 함곡관을 넘어 서쪽으로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전란이 벌어지는 속세를 뒤로하고 은둔했다는 식으로 이해하곤 한다. 그러나 질문할 것은 어째서 동서남북 가운데 서쪽이었나 하는 점이다. 따라서 이를 거꾸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훗날 천하를 통일할 진나라로 가 천하통일을 예비했다는 식으로. 이렇게보면 노자의 길은 은둔자의 행보가 아니라 예언자의 행보가 된다. 


<노자>를 둘러싼 해석의 차이도 비슷하다. 누구는 <노자>가 자유와 일탈을 이야기한 책이라고 하고 누구는 병법가의 지혜를 담은 통치술의 책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노자>는 영 다른 책이 되어 버린다. 이런 해석의 차이 이외에도 노자가 과연 언제적 사람인지를 두고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공자가 노자에게 가 예를 물었다는 이야기에 따라 노자가 공자보다 앞선 시대의 인물이라고 이야기되곤 한다. 그러나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 이야기를 근거로 역사를 추론할 수는 없는 일이다. 


역사의 숙제는 역사에 맡겨두자. 도리어 적절한 질문은<노자>의 독자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이런 부분은 어떨까. "왕은 곧 하늘이며 하늘은 곧 도리(道)이며, 도리를 따르면 오래가고 죽을 때까지 화를 입지 않는다. (王乃天,天乃道,道乃久,沒身不殆。)" "그러므로 도는 크고, 하늘이 크고, 땅이 크며, 왕 또한 크다. (故道大,天大,地大,王亦大。)" 장자에게 도道가 일상의 단면성을 극복하기 위한 지렛대였다면 노자의 도는 천지에 묶여 있다. 천지만큼 크고 광활하며 이 광역은 왕이 통치하는 영역과 일치한다. 천지가 크듯, 왕도 크다. 


노자는 통치자를 자신의 청자로 상정하고 있다. 적어도 천하의 잠재적 통치자가 그의 주된 관심 대상이다. 천하를 통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낯선 욕망들이 서로 엇갈리며 다양한 인간군상이 가득모여 있는 그 넓은 땅을 다스리려면? 과거 주나라의 통치방법은 이를 분할하는 것이었다. 땅을 떼어 나라를 세우고 제후들에게 통치를 맡겼다. 그러나 낡은 방법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이제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 


노자가 이야기하는 새로운 방식은 이렇다. "거둬들이고 싶다면 늘려줘야 한다. 약하게 하고 싶다면 강하게 만들어줘야 한다. 망하도록 하고 싶다면 성공하게끔 해야 한다. 빼앗고 싶다면 줘야 한다. 이를 일러 감춰진 지혜라 한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단단하고 강한 것을 이기는 법이다. (將欲歙之,必固張之;將欲弱之,必固強之;將欲廢之,必固興之;將欲奪之,必固與之。是謂微明。柔弱勝剛強。)"


부드럽고 약한 것이 단단하고 강한 것을 이긴다. 그러나 오해하지는 말자.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역설은 현실적인 힘의 불균형을 뒤집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도리어 그 반대이다. 힘의 불균형 속에 이 불균형을 지속하며 자신의 우세를 잃지 말 것. 조심스러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기묘한 기술이다. "커다란 나라는 마치 푹 익은 생선과도 같이 다루어야 한다. (治大國若烹小鮮。)" 바스러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노자의 역설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전과는 다른 통치 체제가 등장했던 까닭이다. 천하는 넓고 사람은 많다. 이 넓고 많은 세계를 통치하는 사람은 이전과는 다른 덕목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혹자는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리는 일에서 출발한다고 했지만 노자의 생각은 다르다. 천하를 다스리는 기술은 다르다. 노자는 그렇게 또 다른 권력의 출현을 예비하고 있다.

 

"하늘이 영원하고 땅이 영원하듯. 천지가 그렇게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야 오래 살 수 있다. (天長地久。天地所以能長且久者,以其不自生,故能長生。)" 이제 천지에 스스로를 견주는 인간이 나타났다. 그는 천지처럼 자신의 자리도 영원히 보존하고자 한다. 영원을 꿈꾼자. 만겁의 역사를, 만세萬歲를 목표로 삼은 인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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