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에세이][마오] 마오 옆 저우2019-12-22 23: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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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maozedongyuzhouenlai_.jpg (35.1KB)우리실험자들 연말에세이_마오쩌둥(에레혼).hwp (34KB)

마오 옆에 저우

2019 에세이/ 마오 세미나/ 에레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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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후흑설’: 모든 사람은 낯이 두껍거나(), 속이 검거나(), 아니면 둘 다

 

학과 동기들이 한창 취업을 준비하던 2015년이었다. 당시 막 복학을 했던 나는 취준생 동기들의 자소서나 면접 준비를 가끔 도왔다. 그런데 지금도 기억에 남는 곤란한 질문이 있다. 어느 기업에서 전공 수업을 통해 알게 된 사람 중에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묻는다는 것이었다.

 

누구를 이야기해야 하나? 가장 먼저 머리속에 떠오른 사람은 사마천司馬遷이었다. 하지만 사마천에게는 너무나 많은 얼굴이 있었으므로,예를 들면 자객의 복수에 정당성을 부여했다는 이야기는 면접관에게 별로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할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 다음으로 호출된 사람은 루쉰魯迅이었다. 하지만 수업 시간에 <광인일기> 한 번 읽고, 잡문 몇 편 읽은 것으로 괜히 루쉰을 이야기했다가 금방 밑천이 드러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불현 듯 떠오른 인물이 바로 저우언라이周恩來였다.

 

파고 또 파도 미담만 나오는 사람. 내가 저우언라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한 줄로 정리한 것이다. 충실하게 마오쩌둥毛澤東2인자 노릇을 한 사람, 중국의 외교 하면 떠오르는 신사적인 정치인. 어떤 기업이라도 이런 인재상을 싫어할 리 없고, 아주 뻔한 인물도 아니니 면접에서 이야기하면 꽤나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오에 대한 세미나에 들어갈 때 내심 기대가 컸다. 마오쩌둥에 대해 깊이 공부한다는 것에 대한 기대감 이외에도 책 중간 중간 언급될 저우언라이의 모습 또한 궁금했기 때문이다. 에드거 스노 역시 저우언라이와 만나는 순간을 상당히 기대했던 모양이다. <중국의 붉은 별>에서 저우언라이가 등장하는 모습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묘사되어 있다. 스노가 공산당 홍군에게 국민당군으로 의심받아 고초를 겪게 되는 것은 아닐지 조마조마한 순간에 저우언라이가 구원자처럼 등장한다.

 

안녕하시오, 누군가를 찾고 계시다고요?” 그는 다름 아닌 영어로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이내 그가 그 유명한 저우언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에드거 스노, <중국의 붉은 별>, p. 72)

 

그리고 이후 마오 세미나에서는 3월에 다른 마오쩌둥 전기를 읽게 되었다. 필립 쇼트라는 영국 저널리스트가 쓴 <마오쩌둥>이라는 제목의 책은 <중국의 붉은 별> 2배의 분량을 자랑한다. 그리고 필립 쇼트의 글을 에드거 스노의 글보다 딱딱한 느낌은 있을지언정, 최신의 정보와 방대한 자료를 기반으로 만든 것이다. <마오쩌둥>을 읽으면서 그에 대한 통념을 깰 수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필립 쇼트는 책 곳곳에서 저우언라이를 정조준하고 있다.

 

<마오쩌둥>프롤로그부분은 1935년 쭌이遵義 회의로 시작된다. 쭌이 회의가 중국 공산당 역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중국 스스로는 이 사건을 소련 체제에서 독립하여 반국민당 전선을 구축할 수 있었던 시기라고 평가한다. 마오쩌둥에게 쭌이 회의는 그가 지도자가 될 발판을 마련하는 첫 단추가 되었다. 필립 쇼트의 관점이 특이한 이유는 1930년대에 마오쩌둥과 대립하는 인물로 저우언라이를 등장시킨다는 점이다.

 

저우언라이는 …… 군사 노선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시인하고 자아비판 발언을 길게 했다. 저우언라이는 이런 식으로 처신하는 데 뛰어난 능력이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마오의 적수였던 그가 오늘 마오의 동지로 변신한 것이다. (필립 쇼트, <마오쩌둥 1>, p.32)

 

마오쩌둥이 저우언라이에게 살 길을 제시한 것이고 저우언라이는 그 신호를 눈치챘다. 그 결과 모택동에 반기를 든 코민테른파 공산당원이라는 낙인이 찍힌 것은 보구博古와 오토 브라운이었다. 두 사람과 함께 기동전게릴라전에 반기를 든 3인단의 나머지 한 사람은 저우언라이였다. 그렇지만 그는 마오에게 반기를 든 것에 대해 면죄부를 받는다. 단순히 진솔하게 자아비판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홍군 전체를 궁지에 몰아넣을 뻔 했던 전략적 착오가 용서될 수 있는 것인가? 다음 글의 내용과 필립 쇼트의 서술 방식을 비교해보면, 저우언라이의 행보는 더욱 찜찜한 것이 된다.

 

장정을 시작하기 전에 구성한 ‘3인단을 폐쇄하고 여전히 최고 군사 지휘관인 주더 저우언라이를 군사지휘자로 정했다. 그 밖에도 저우언라이를 당내에서 위탁한 군사지휘에서 최후 결심을 내리는 책임자로 뽑았다. (중국 공산당 중앙당사연구실, <중국공산당 역사 제1()>)

 

위의 기록은 중국공산당이 직접 편찬하는 <중국공산당 역사>의 일부 내용이다. 이 책에서는 당연히 쭌이 회의를 핵심적으로 서술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쭌이 회의를 통해 1인자가 된 사람에게 반기를 든 사람이 어떻게 권력 핵심부에 남을 수 있었는가, 하는 모순에 대해 중앙당사연구실은 자세한 언급을 피하고 있다. 이와 비교해볼 때 책의 첫머리부터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관계를 핵심적으로 짚고 있는 필립 쇼트의 시각이 더욱 탁월하게 느껴진다.

 

<마오쩌둥> 챕터 하나 읽었을 뿐인데, 저우언라이에 대한 환상이 깨져버리는 기분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 동안 심증으로만 가지고 있었던 인자한 정치인에 대한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까지 얼굴이 두껍고 속이 검은(面厚心黑)’ 인물이라고 쏘아 붙인 이종오李宗吾1승 챙기는 순간이기도 하다. 저우언라이는 얼굴이 두꺼운 인간인가, 속이 검은 인간인가. 아니면 두 덕목(?)을 모두 겸비하고 있는 인물인가.

 

 

 

마오쩌둥이 유독 저우언라이에게 너그러웠던 이유는

 

저우언라이가 마오쩌둥을 처음에는 경쟁상대로 생각하지 않은 것도, 이후에는 마오쩌둥의 철저한 2인자가 된 것도 모두 이해할 수 있다. 저우언라이는 프랑스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였고, 천진天津에서 54 운동을 지도한 공산당의 영수격 인물이었다. 그런데 후난성 사투리를 쓰는, 교양이라고는 없는 인물이 중국 공산당만의 독자노선’, ‘게릴라전운운했으니 저우언라이 입장에서는 상당히 심기가 불편했을 것이다. 쭌이 회의 이후 저우언라이가 보여준 굴종 역시 마오쩌둥이 자신을 숙청하지 않은 것에 대한 충성이라 생각한다면, (내가 기대한 저우언라이의 모습과는 많이 배치되는 모습이지만) 충분히 가능한 노선변화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마오쩌둥이 저우언라이에게 보여준 태도이다. 마오쩌둥이 권력의 중심에 오를 때 저우언라이의 보필이 필요해서, 쭌이 회의 단계에서는 저우언라이의 힘을 빌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저우언라이가 영원한 2인자에 머물 인물로밖에 보이지 않아서 그를 견제하지 않았다는 것은, 마오쩌둥이 말년에 보여준 행보와 어긋나는 분석이다.

 

공자 비판 운동은 다른 의미도 있었다. …… 새로운 비판 운동의 실질적 목표는 공자도 아니고 린뱌오도 아니었다. 문화혁명이 야기한 손상을 회복하려 애씀으로써 마오쩌둥의 우려를 산 저우언라이였다. (필립 쇼트, <마오쩌둥 2>, p.469)

 

흔히 비림비공批林批孔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마오가 자신의 수족을 견제하는 과정에서 결국 저우언라이에게까지 칼끝을 겨눈 정치운동이다. (실제로 칼을 휘두른 사람은 마오의 부인 장칭江靑을 비롯한 4인방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의 결과는저우언라이가 지병으로 사망하는 변수가 있었지만, 저우언라이의 죽음에 분노한 중국 인민들이 천안문 광장으로 집결하도록 만들었다.

 

마오가 말년에 저우언라이에게 정치적 견제를 한 것이 그에게서 소위 싹수를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간단하게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저우언라이가 문화대혁명 때 화이트 리스트를 만들어서 지켜야할 인물/문화재를 특별히 지정했을 때는 왜 견제하지 않았을까? 외치外治로 저우언라이가 승승장구 하고 있을 때 진작 그를 제압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마오쩌둥의 행보는 상당수 결과론적으로밖에 해석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시안사변이 좋은 예시이다. 장쉐량이 장제스에게 하극상을 하지 않았다면, 마오는 공산당 토벌 계획을 앞두고 있는 국민당에게 어떻게 대항할 생각이었을까? 결국 마오쩌둥의 생애를 분석하면 순간 순간마다 그저 감이 좋았던 인물이라는, 다소 맥빠지는 분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런 특징이 마오쩌둥을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할 인물로 만들면서, 동시에 마오는 들여다봐야 분석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평가가 나오도록 한다. 마오의 독특한 판단 덕분에 저우언라이는 중국 공산당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존경받을 수 있는 인물로 역사에 남았다. 마오는 특유의 감으로 저우언라이가 초기 중국 공산당의 몇 안 되는 청정 구역으로 나중까지 회자되리라 판단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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