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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SF특집] 바뀐 인류는 더 이상 인류가 아니다 (옥타비아 버틀러 단편 일부 발제)2020-02-18 09:2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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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옥타비아 버틀러-블러드 차일드 일부 발제.hwp (34KB)

바뀐 인류는 더 이상 인류가 아니다

   

옥타비아 버틀러 단편들 <말과 소리>,<넘어감>, <특사>, <마사의 책>

 

언어와 문자는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자산이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소설 <말과 소리>에서 언어와 문자가 사라진 세계를 보여준다. 정확하게 말하면 대다수의 인간에게서 문자를 이해하는 능력과 언어능력이 사라진 세계이다. 단지 문자와 언어를 이해할 수 없게 되었을 뿐인데도, 그 세계에는 우리가 기억하는 인간의 모습이 없다. 소통 대신 폭력이 일상으로 자리 잡은 세계에서 사람들은 분노와 질투를 숨김없이 그대로 드러낸다.

 

<말과 소리>에서 문자를 잃어버린 라이는 언어를 잃어버린 남자를 만난다. 두 사람은 제대로 소통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가까스로 함께 살자는 데에 합의한다. 단지 너무 외로워서, 자살하지 않기 위해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화자들이 옥타비아 버틀러의 소설에는 제법 등장한다. <말과 소리>의 화자 라이와 <넘어감> 속 제인이 그랬고, <특사>에 등장하는 노아도 비슷한 이유로 외계존재와 소통하는 일에 참여한다. 이들이 누군가를 만나고 소통하는 일에는 어김없이 고통과 희생이 뒤따른다.

 

계속 살기 위해 누눈가와 체온을 나누는 일은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말과 소리>의 라이는 길에서 만난 남자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려다 남자가 죽는 상황을 겪는다. 남자가 구하려던 여자도 죽었고, 그 자리에는 여자의 두 아이만 남았다. 놀랍게도 라이처럼 언어를 이해하는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라이는 변해 있다. 죽지 않기 위해 떠난 라이의 여행은 일단 아직은 성공이다.

 

<넘어감>의 제인은 잊고 싶은 남자를 환영으로 떠올린다. 교도소에 있는 남자가 찾아오지 못한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하지만, 실은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괴로워진다. 자신을 따라다니는 남자의 환영을 쫓기 위해 술과 더 나쁜 상황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다.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일이나 죽어버리는 일’에 아직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거의 평생을 주정뱅이들 주위에서 살았다. 술을 충분히 마시면 아무래도 좋아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167쪽) 제인은 아직 살아남기 위한 여행을 떠나지 못했다.

 

<특사>에 등장하는 노아는 지구와 외계존재 사이에서 통역사로 일하고 있다. 노아는 열한 살에 외계존재들에게 납치당해 강제로 그들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소통은 분명하게 강요된 행위였으며, 고통이 수반되었다.

‘이 계약자는 인간과 접촉한 경험이 별로 없었다.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인간과 커뮤니티들이 서로 대화할 수 있도록 해주는 공통언어의 어휘력도 기껏해야 초보적 수준이었고, 인간의 능력과 한계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통역하자면, 이 계약자는 우연히든 의도적으로든 그녀를 아프게 할 것이었다.’(172쪽)

 

한편으로 소통은 노아와 외계존재에게 언제나 어느 정도의 만족감을 주기도 했다.

‘커뮤니티 안에 감싸인 노아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녀는 무언가 보려하거나 무엇이 보이는지 상상하는 데서 오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 커뮤니티는 노아가 고용될 때마다 기대 이상의 편안하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그녀를 만지고, 쓰다듬고, 어루만지고, 압박했다. … 사람의 수족과는 조금도 닮지 않은 것들에게 안겨서 더할 나위 없이 안전한 느낌을 받았다. 왜 이 행위가 기분 좋은지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포로로 잡혀있던 십이 년 동안 이 행위는 그녀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위안이었다. 이 포옹 행위가 자주 있었기에 그녀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다른 일을 모두 견뎌낼 수 있었다.

다행히도, 커뮤니티들 역시 이 행위에서 위안을 받았다. 심지어 노아보다 더.’(173~174쪽)

 

<블러드차일드>의 틀릭이 인간의 체온을 원했던 것처럼, <특사>의 커뮤니티들은 인간의 피부와 움직임을 좋아한다. 커뮤니티들은 더 많은 인간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아에게 인간 지원자들을 설득해주기를 요구한다. 커뮤니티들이 지구에 온 이후로 인간은 더 이상 지구를 지배하지 못하게 되었다. 가난과 혼란 속에서 그들은 커뮤티니들을 미워한다. 무엇보다 그들의 생김새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지구에 있었다 해도 여전히 그들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져요. 그들이 존재하는 게 이상하게 느껴져요. 저는 그들을 싫어하지도 않는데, 그래도 이상하다는 기분이에요. 아마 우리가 다시 한 번 우주의 중심에서 쫓겨났기 때문일 테지요.”(182쪽)

“그 잡초 놈들은 초대도 받지 않고 와서 우리 땅을 훔치고 우리 사람들을 납치했어요.”(183쪽)

 

지원자들은 노아가 커뮤니티들과 일하고 있다는 이유로 비난하고 불신한다. 자신들 역시 노아와 같은 일을 하기 위해 지원했으면서도. 노아는 자신이 겪은 고통의 많은 부분이 커뮤니티가 아닌 인간들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털어놓는다. 그렇다고 커뮤니티들이 인간을 구원해줄 거라 여기지도 않는다. 다만 자신에게 그러했듯, 인간과 커뮤니티들이 서로에게 필요하며 소통해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뭐가 되는 겁니까? 매춘부입니까, 애완동물입니까?”

“물론 둘 다 아닙니다. 하지만 언어를 배우지 않으면 둘 다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흥미롭고 예기치 못한 존재지요.” “우리는 마약입니다.” “커뮤니티들은 우리를 감싸면 기분이 좋아져요. 우리도 기분이 좋아지지요. 그 점만은 공평하다고 봐요. 그들 중에서 이 세계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이들이 가끔씩 우리를 감쌀 수 있으면 차분해지고 훨씬 상태가 나아져요.”(213~215쪽)

 

노아가 말해주는 역사 속에서 인간은 커뮤니티들에 대항하는 모든 공격에 실패했다. 커뮤니티들에게는 법인격이 부여되었고, 그들은 인류와 다른 방법으로 지구를 활용하며 부를 축적했다. 그들이 원하지 않는다면, 떠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인류를 멸종시킬 거라는 망상을 품을 필요는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은 그들에게 유용하고 즐거움을 준다. 인류가 언제나 다른 인간을 노예나 매춘부, 애완동물로 취급해왔던 것처럼, 그들도 인간을 노예나 매춘부, 애완동물로 취급할 수는 있다. 노아는 그럼에도 살아남자고 인류를 설득하고 있다.

 

<마사의 책>에서 마사는 글을 쓰다 지친 새벽에 신을 만난다. 신은 마사에게 인간과 세계를 바꿀 기회를 주겠다고 말한다. 마사는 일생을 건 고민에 돌입하게 된다. 기회를 써버리고 나면, 마사의 삶은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될 예정이다. 마사는 두렵다. 글을 쓰지 않는 흑인 여성의 삶이 어떠한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마사의 선택은 인류를 파멸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마사는 지금껏 자신의 삶에서 느껴보지 못한 중압감을 느낀다. 상상이 현실로 구체화되는 일은 예상보다 즐겁지 않다. 마사는 두려움 속에서 묻는다. “그러니까 …… 인류가 바뀌면, 더는 인류가 아니라는 말씀이신가요?”(238쪽)

 

신의 모습은 마사의 의식 속에서 상상한 대로 변해간다. 백인 남성에서 흑인 남성으로, 다음에는 흑인 여성으로, 결국에는 마사 자신과 닮은 모습으로. 신의 말대로 마사는 신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는다. 자신이 더 이상 글 쓰는 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감수한 채로.

그녀는 충동적으로 걸어가서 신을 끌어안았다. 꼭 끌어안고, 마사 자신의 옷장에서 꺼낸 것처럼 보이는 청바지와 검은색 티셔츠 아래에 있는 친숙한 여성의 몸을 느꼈다. 마사는 어째서인지,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이 유혹적이고 어린아이 같은 데다 무척이나 위험한 존재를 좋아하게 되었음을 깨달았다.(257쪽)

 

마사는 인류에게 꿈을 선사한다. 인류가 꿈속에서 최대한의 즐거움을 누리고, 현실에서는 더 성숙해지기를 바란다. 그런다고 해서 인류가 완벽해지지는 않겠지만, 인류가 더 많은 상상을 하게 되리라고 마사는 믿는다. 아마도 그렇게 된다면, 독서와 글쓰기는 줄어들 것이다. 마사는 작가라는 직업을 걸고, 자신의 뜻대로 세계를 변화시켰다. 옥타비아 버틀러가 강조한대로 생계를 위한 글쓰기는 중요하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자신이 ‘왜 글을 쓰는가’를 신의 입을 빌어 묻는다. 작가는 글을 통해 인류를 변화시키고 싶었다.

 

SF작가들이 우리를 지금껏 상상해보지 못한 상황이나 세계 속에 떨어뜨려 놓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은 인류가 한번쯤은 다르게 살아보기를, 세계와 자신을 다르게 바라보기를 원했다. 한편으로 이는 인류가 ‘인간’이라는 범주와 틀에 갇히지 않기를 바란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인간’이라는 범주와 틀 역시 인간이 임의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며, 언제든 변화할 수 있다. 그렇게 바뀐 인류를 꼭 ‘인간’이라고 부르기를 고집할 필요도 없다. ‘인간’은 계속 변화하며, 확장된다. 우리는 수많은 SF작가들의 글을 통해, 그 사실을 여러 번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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