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중국] <만력 15년> 1장~2장: 무능한 군주인 내가 이세계에서는 역사책의 주인공?2020-06-12 12:5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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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군주인 내가 이세계에서는 역사책의 주인공? (부제: 1587년에 주목하는 이유)

에레혼

역사를 공부할 때 나에게는 좋지 못한 버릇이 있다. 나는 역사책이나 역사 연구서에서 국가의 몰락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본다. 민중의 불만이 늘어나고, 사회 각 부문이 마비되는 현상은 복선처럼 보인다. 그 원인으로 무능한 통치자까지 지목되면, 이게 역사책 읽기인지 추리 소설 독해인지 혼란스럽기까지 한다. 그런데 작년에 실험실 세미나에서 읽은 책 때문에 나는 이런 취향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시세가 영웅을 만들지만 시세가 영웅을 멸하기도 한다. 영웅을 유산하거나 요절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영웅들의 큰 몸놀림은 그들이 역사적 대세와 집합적 힘의 산물임을, 어떤 평형 지점이나 교차 지점임을 의미한다. …… 지도자의 역사(속칭 제왕장상의 역사)는 개인의 역할을 과장한다. 지나치게 화려한 궁정 이야기와 우연한 계기로 꽉 찬 이 역사는, 독자들에게 작은 것에 치중하다가 큰 것을 놓치게 한다. 제도와 문화를 검토하는 것을 잊게 만드는 것이다. 한사오궁, <혁명후/>, 31~32.

흔히 명나라를 두고 사상적으로 빈약한 시기라고 비난한다. 이런 평가는 명의 문학이나 철학이 다른 왕조─특히 이전 시대인 송이나 이후 시대인 청에 비해 열등하다는 판단으로 인해 도출된다. 하지만 나는 그 평가 이면에 명대에 애석한 심정이 반영되었다고 본다. 명 말기에는 상업이나 제조업이 성숙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긍정적 징조들은 발달로 이어지지 못했다. “개인의 역할을 과장하는” 역사 독법에서는 이제 문제의 원흉이 등장할 차례이다. 명나라 역사를 평가할 때 줄곧 링 위에 오르는 인물은 바로 만력제였다.

만력제의 문제로 흔히 소환되는 사건은 국정 거부이다. 이 황제는 1589년부터 1615년까지 조정에 나타나지 않았다. 시대를 망친 암군의 문제가 나타나면, 그가 얼마나 말도 안되는 행적을 일삼았는지 죄목을 적는 작업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모든 원칙을 충실히 따른 예시를 직접 살펴보자.

정치는 정체에 빠졌다. 관직의 공석은 채워지지 않았고 승진도 없었다. …… 이러한 상황에서 전란이 끊이지 않았다. 북부에서는 몽골족이 침입했고(1560년에 칭하이를 점령했다), 1599년과 1600년 사이에 반란을 진압하고자 서남부 버마(미얀마)에 들어간 명군은 소수 민족과 심각한 충돌을 벌였다. 조선에서는 일본군의 침략으로 7년간 전 국토를 유린당하는 전쟁을 치러야 했다. …… 재정문제는 황제의 사치로 더욱 악화되었다. 게걸스럽고(그는 어지럼증, 발과 다리의 통증으로 고생했고 너무나 뚱뚱해서 부축 없이는 서 있지 못했다.) 방종한 황제는 자신의 무덤과 궁전에 돈을 물 쓰듯 쓰고 먼 이역에서 값비싼 물건들을 주문했다. 앤 팔루던, <중국황제>, 188.

이런 서술에 줄곧 익숙해져 있는 나에게 레이 황의 <1587 만력 15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는 조금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이 책의 독특한 점은 레이 황이 주목하고 있는 역사적 순간에 있다. 그는 만력제의 ‘국정 파업’이 일어난 시점인 1589년─즉 만력 17년이나, 그가 조정에 나타나지 않은 시간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오히려 레이 황은 1587년이라는 평범한 시간 속에 발생했던 ‘(구글이나 바이두에 검색한다고 해도 나올 리 없는) 오조 사건’을 조명하고 있다. 대체 오후에 열린 국가 의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길래? 만력제가 충신들을 역적으로 몰아가기라도 했던 것일까? 아니면 (이럴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새로 발견된 출토 문헌을 분석한 최신 연구 경향에 따라’) 황제가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사실이 발각되기라도 해야 나 같은 독자들의 직성이 풀릴 듯하다.

1장 만력제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쉽게도, 오조 사건은 다소 맥 빠지는 이야기이다. 이는 황제의 오조 소집 명령을 누군가 잘못 발설한 사건으로 그친다. 만력제는 이 사건을 핑계로 누군가를 관직에서 자르거나 대전大典 관련자들을 옥에 가두지도 않았다. 하지만 책에서는 오조 사건을 의미심장한 일로 평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오조 사건은 중국에서 오랜 기간동안 지속된 시스템에 금이 가 있었고, 그 균열이 외부로 드러난 일이다. 여기서 말하는 시스템이란 문관의 입장에서는 황제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 일으킬지 예측하는 도구이자(21), 황제나 수보首輔가 “문인의 공동 관습”에 부합하는 정책을 만드는 데 기본 원칙이 되었다.(88)

이와 같은 조정이 구성되기 위해 황제는 살얼음판을 걷는 사람처럼 국정을 수행해야 한다. 만력제는 집권 초기에는 대신들의 예측 가능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황제였다. 어린 만력제가 조숙했기에 ‘황제 다운’ 모습을 연출할 수 있었다. 물론 황권이 더 공고해지는 과정에는 원보元輔 장거정의 기여도가 컸다. 만력의 스승이기도 했던 장거정은 황제가 판단할 수 없는 정치 대소사에 관여했다. 그에게 붙은 꼭대기()보다 더 높은 꼭대기()라는 칭호는 껍데기가 아니었다. 만력은 진심으로 장거정을 존경했으며, 장거정은 황제의 행동거지도 통제하고자 했다. 예를 들어 만력제는 서예에 대한 감각이 뛰어났으나 황제의 이런 취미를 장거정이 용납할 수는 없었다. 황제는 경전과 역사서 공부를 주로 삼아야 하고 서예와 같은 일에 몰두해서는 안되는 위치에 있었다.

조정을 틀어쥐는 장거정의 행보는 대신들의 미움을 샀다. 그러나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사람을 책잡는 일은 쉽지 않았다. 조정 대신들에게 반격의 기회는 우연치 않게 찾아왔다. 장거정이 부친상을 당한 것이다. 그가 부친상으로 3년간 북경을 떠난다면 이는 곧 대신들에게 권력 탈환의 기회가 된다. 황제가 탈정奪情 명령을 내린다면 그 역시 물고 늘어질 거리로 적당했다. 실제로 만력제는 장거정에게 북경을 떠나지 말라고 명했으며, 관리들은 이것이 윤리 도덕의 본보기가 되어야 하는 조정의 이상적인 모습과 어긋난다고 판단했다.

장거정을 탄핵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부상서 장한이 나서 장거정과 직접 만나 한림원 관리들의 뜻을 전하고자 했다. 하지만 장한이 오히려 탄핵을 당했다. 이에 반발한 관리들이 장거정에 대한 탄핵에 본격적으로 착수했으나, 이번에는 황제가 자신의 스승 앞을 막았다. 만력제는 장거정의 불효를 논하는 신하들을 반역자와 동등하게 취급했다. 부친의 장례를 치르러 북경을 비운 동안에도 황제와 원보 사이의 협력관계는 공고하게 유지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만력제도 황제로서의 자의식을 형성해갔다. 1582년 장거정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는 사건이 일어나지만 이 일은 오히려 만력에게 한림학사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스승이자 감시자였던 사람이 없어졌다는 이유로 그가 단번에 방탕한 인물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발적으로 독서를 즐기는 군주가 되었으며, 비로소 조정의 권력을 자신에게 돌려놓기 위해 고심했다.

장거정이 죽고 난 뒤 황제는 자신의 스승에 대한 본격적인 탄핵을 실시했다. 만력제는 장거정의 대표적인 업적 가운데 하나인 토지 측량(과 이를 근거로 한 조세 정책 개편)에 손을 댔다. 황제가 이 토지 측량을 실사구시와 부합하지 않는 정책이라 선언하자, 이를 충실하게 따랐던 인물들─장거정 편에 섰던 인물들이 자연스럽게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절대 권력의 절대 부패. 장거정과 같이 현명한 인물도 이 클리셰 같은 문구를 벗어날 수 없었다. 황제에게 모범을 보일 것을 명령했던 황제의 스승은 사실 사치와 방탕에 빠져 있는 인물이었다. 심지어는 장거정이 황위를 찬탈하려는 야심마저 가진 인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장거정이 권력을 휘두르던 시기에 순舜이 자신의 신하였던 우禹에게 권력을 선양하는 것과 관련된 과거 문제가 출제되기도 했다. 장거정의 측근들은 이 대학사를 은나라의 재상 이윤伊尹에 비유하기도 했는데, 이윤은 군주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자 자신이 정무를 대신 집행했던 인물이었다. 이런 사건들은 심증에 불과했고 장거정이 흑심을 품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만력제에게 이 사건을 통해 죽은 장거정을 단호하게 단죄하기에 이른다. 장거정의 가산은 몰수되었다. 그의 일가 역시 고문을 당하고 변방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죽은 인물을 다시 죽이는 듯한 과정을 거치면서, 만력제는 드디어 황권이 공고해졌다고 만족했을까? 앞에서도 말했지만 만력제는 더 이상 어린 황제가 아니었으며, 정무 감각을 가진 인물이 되었다. 그는 장거정을 비롯하여 황조를 위협하는 인물들을 제거하는 일도 결과적으로는 조정 대신들의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군림하는 황제가 누구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몇 천 년간 수정되어온 중국의 통치 시스템은 사실 황좌 아래의 인물을을 위주로 돌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만력제는 이십대의 나이에 깨닫게 되었다.

2장 수보 신시행

신시행은 1583년부터 수보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이전대의 걸출한 수보, 특히 장거정과는 궤를 달리한 관리였다. 만력제는 이미 대학사에게 의존하며 국정을 맡아야 하는 단계를 넘어섰다. 이에 걸맞게 수보 신시행은 직무에 충실한 관리 역할을 수행했다. 때로 이런 성실한 태도는 융통성이 없는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그는 조정 행사에 있어 예외를 원하는 관리가 아니었다. 장거정과 또 다른 방식의 고집이었으나, 신시행의 태도가 아집으로 폄하되지는 않았다. 조조早朝든 경연이든 황제가 일방적으로 이것을 폐지할 권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황실에서 거행되는 행사는 허례허식에 가까웠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허례허식을 통해 황제는 스스로가 하늘의 아들(天子)이라는 사실을 인증할 수 있다. 황제는 최고 권력자이지만 그 역시 인의도덕 위에 군림하지는 못한다. 명나라 황제가 참여해야 하는 행사들은 이런 상징성을 가진다.

안타깝게도 만력제는 수보의 고심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전보다 능동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된 황제는 본격적으로 조정의 행사들을 거부하기 시작한다. 황제가 아픈 것을 핑계로 조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노는 일에는 열중이라는 소문이 궁중에 퍼졌다. 하지만 신시행은 장거정처럼 황제에게 직언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황제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탓하기도 하고, 황제에게 완곡하게 상주문을 올리기도 했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으리라. ‘경연과 궁정 행사는 창업군주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지속되던 일입니다.’ 수시로 조정을 비웠던 10대 황제 정덕제도 이 전통을 깨뜨리지는 못했다. 그저 역사가 그를 ‘좀 이상한 황제’로 기억할 뿐. 신시행은 만력제가 그런 황제로 기록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 같다. 수보 신시행은 융통성과 거리가 멀었지만 황제가 원한다면 조회와 경연 시간을 조정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신시행이 이토록 조정의 일상을 회복하려 했던 이유는 그가 관료 사회의 원칙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거정이 ‘일조편법一條鞭法’이라고 불리는 혁신을 감행했으나 대신들의 공감을 얻지 못한 이유는 그가 지나치게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여러 세금 항목을 하나로 통일한 장거정의 개혁은 실용적이었으나 문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변화였다. 중국 고대 왕조는 줄곧 백성을 위해 통치한다는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하지만 특정 시점이 지나면서 (고대 중국에서 인구 구성 대다수를 차지했던) 농민 개개인의 사정을 파악하기란 불가능했다. 게다가 그들의 세세한 상황을 고려한 정책 시행이라고 해도 조정 대신들의 동의가 없다면 시행할 수 없었다. , 대다수의 관리들은 ‘낮은 수준 속에서 백성들의 평온을 유지’한다는 지배층의 소명 의식을 실현하기 위해, 정책이 수용될 수 있는 모집단으로 관료 사회를 설정하는 아이러니를 반복해왔다. 수보 신시행도 예외는 아니었다.

명나라 지식인들이 과거를 위해 공부하는 경전에서는 애민愛民이 강조되었다. 하지만 조정의 문턱을 넘거나 관좌에 앉고 나면 이들은 지극히 보수적인 사고를 갖춘 관료로 변했다. 중국 명대 소설에 억울한 일을 해결하는 청렴한 관리가 자주 등장하는 현상은 역설적으로 당시에 탐관오리가 즐비했다는 실상의 방증이다. 명나라에서는 체제 안정이 더 중요하고, 국가 시스템에 잘 포섭될 수 있는 사람이 인재 대우를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사건의 공평성은 관리들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조정에서 신경 쓸 일이 아니게 되었다.

신시행은 조정 내부의 일과 국가 전반의 행정에 관여하면서 자신의 말로가,─궁극적으로는 명나라의 마지막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인지했을까? 수보 신시행이 조정의 행사를 중시하고 관료사회의 질서를 존중했던 것은 극단으로 치달았던 전임자의 실정을 수습하려는 노력이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양陽을 바로잡으려 한들 명나라에는 이미 음陰이 밝은 단면을 삼킬 듯 거대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만력제는 강력한 조력자의 성공과 실패를 통해 관료의 음ㆍ양을 가까운 거리에서 목격한 인물이었다. 경직된 관료 사회에 개혁가조차 들어갈 틈이 없었으며, 이 개혁가도 성의誠意껏 살아온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신시행의 충고는 황제에게 ‘그깟 조회’나 중요시하는 태도로 비춰지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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