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차이나]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민족 없는 시대의 민족 논쟁2022-05-18 20:4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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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없는 시대의 민족 논쟁

에레혼

청나라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려면 “만한滿漢” 논쟁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논쟁을 둘러싼 질문들은 다양하다. “청 왕조는 끝내 한족 문화에 포섭되었는가?”하는 고전적인 질문부터, “청대 황제들이 펼쳤던 배타적 민족관과 포용적 민족관 가운데 어떤 가치관에 방점을 찍어야 할 것인가?”하는 다소 디테일한 쟁점도 존재한다. 혹은 “아편전쟁의 책임은 배타정책을 고수한 임칙서에게 있는가, 아니면 유화정책을 펼친 기선에게 있는가?”하는 질문에 답을 내릴 때에도 임칙서가 한족이고 그의 후임자 기선이 만주족이라는 부가 정보가 동원되기도 한다.

청나라는 중국사의 무대에 어떤 국가보다 인상적으로 등장했으며 역시 인상적인 모습으로 퇴장하였다. 그러다 보니 “중원 바깥에서 출발한 왕조”라는 청나라의 가장 뚜렷한 정체성은, 이 국가의 설립에서 붕괴에 이르기까지 주요한 논쟁거리로 자리잡았다.

또 민족과 탈민족에 대한 이야기냐며, 이제 이골이 난다고 할 수도 있겠다. 청나라의 민족 구성, 그리고 국가 정체성을 규정하는 문제는 케케묵은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 청나라를 연구하는 모든 학자는 민족과 관련된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을 새롭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주장은 20세기 후반 중국학계를 뒤흔들었다. ‘신청사’라고 이름 붙은 연구 경향은 1990년대 미국의 중국 사학계를 필두로 제기되더니, 이제는 통용되는 상식처럼 회자되기에 이르렀다.

신청사 연구의 촉발은 1980년대로 다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중국에서는 제 1 역사당안관(명청대의 주요 사료를 보관하고 있는 사료관)의 소장 자료를 외국인에게 개방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상당수의 만주어 문헌이 발견되면서 기존의 청사 연구의 패러다임이 변화하게 된 것이다. 기존 청사 연구자들은 청나라가 중원에 진출하게 되면서 만주족의 정체성을 버렸다고 간주했다. 하지만 이러한 만주 문자로 된 사료가 대량 발굴되었다는 사실은 청조 및 만주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촉구했다. (신청사의 출발점에 대한 내용은 “이훈, 「’만한사전滿韓辭典’에 대하여」, 『새국어생활(29), 2019.”의 내용 참조.)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역시 신청사의 영향력 하에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 머리말에서 이러한 영향 관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과거 청나라는 ‘중국 역사 속의 마지막 왕조’로 일컬어졌다. 또한 명청시대라는 용어에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청은 명과 연칭되면서 중국의 전통을 완성한 왕조로 기억되었다. 그러나 근년 들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청나라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미국 학계에서는 ‘신청사’라는 연구 조류가 형성되어 청의 제국 건설과 성공적인 운영이 적극적인 ‘한화’에 있다는 종래의 시각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일본에서도 청나라 역사를 ‘중국 역사 속 마지막 왕조’로서의 ‘청대사’가 아닌 ‘대청제국사’라는 시각에서 접근하려는 학자들이 주목할 만한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이 책이 신청사의 연구방법론을 따르고 있다는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 하나 더 있다. 2장에서 청나라의 역사를 서술하는 방법에 나타나는 특징으로부터 그러한 판단을 할 수 있다. 기존의 청사 연구에서는 청나라의 탄생은 1644년의 홍타이지 군대가 산하이관을 돌파하는 순간과 동일시된다. 그러나 신청사 연구자들은 만주라는 지역과 만주족이라는 정체성에 방점을 찍고, 이들이 스스로를 ‘대청국’(다이칭 구룬)이라고 명명한 1636년을 청나라의 시작으로 본다.

그리고 《키메라의 제국》에서는 청 제국의 맹아를 파악하는 작업도 잊지 않는다. 청이 제국 통치 모델을 구축하기 시작한 시기는 바로 이들이 몽골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1630년대이다. 이어지는 서술에서도 기존의 청나라 역사를 설명하는 여타 저서와 차별되는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키메라의 제국》에서는 강희제로부터 시작된 청나라의 치세에 대해 비교적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책에서는 청나라가 중앙 유라시아 지역으로 영토를 팽창했던 과정을 서술하며, 청나라가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국적 기업’과 같은 국가 운영을 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데에 분량을 할애한다.

이러한 책의 설명은 명쾌하고, 청나라가 스스로를 청이라고 부르기 이전의 시점을 살펴보는 일은 흥미롭기까지 하다. 그러나 흥미와 대안적 시각에 심취하여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지는 않을까. 발제문을 마무리하기에 앞서 신청사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진전시켜보고자 한다.

신청사는 중국 학계의 입장에서 달갑지 않은 방법이었다. 먼저 중국에 대한 연구가 중국 이외의 지역에서 권위를 생성한다는 사실이 중국 학계에 위기의식을 환기시켰다. 그리고 신청사의 입장을 찬성할 경우 만주 지역의 특수성이 강조되며, 이전의 청사 연구자들이 주장했던 ‘만주족의 자발적 한화’라는 논리가 불식된다. 중국 대륙의 역사학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 방어전을 펼쳤다. 이들이 내세운 주장은 민족이라는 개념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신청사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는, 이 연구 방식이 만주에 주목하는 연구 방식이라는 사실이다. 17세기 초반, 중국의 변방에서 민족성을 중심으로 국가가 형성되었다는 설명은 다소 논리적 비약처럼 느껴진다. 물론 실제로 신청사 연구에서 서구의 민족 개념 내지는 민족국가 개념을 가지고 청나라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신청사 연구의 전제가 당안관의 만주 문자 사료를 자민족 문화에 대한 수호 의지로 비화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어쩌면 신청사에 대한 관심, 그리고 만주족의 청나라에 대한 주목은 중국을 분리하여 바라보려는 욕망이 투영된 결과가 아닐까. 민족 없는 시대로부터 민족을 소환하는 일은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바라보는 것에 불과하다. 20세기 초반, 청 왕조가 무너지자, 중국에는 망국의 원인을 만주족에게 돌리려고 했던 중국 지식인들이 다수 등장하였다. 그리고 중국은 거의 반세기에 걸쳐 이러한 허깨비 민족 관념을 타파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동안 겪은 일이 있으니 신청사의 논리가 중국인들에게 새삼스러운 지적처럼 보일 따름이다. 게다가 시계가 한 바퀴 돌아, 이제 중국도 민족 개념 없는 시기로부터 민족을 발명하고 계보를 이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어느 쪽으로 보아도, 신청사의 주장은 중국에게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학문적 시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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