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차이나] 그래 언제, 무슨 중국이 묻은 걸까?2022-06-13 12:5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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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좀 늦게 나누는 발제문입니다. 다음 링크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zziraci/655



1. 


'키메라의 제국', 흥미로운 제목이지만 또 헛헛한 제목이기도 하다. 청나라의 독특한 구성 과정, 그리고 그 내부의 특이한 구조는 잘 알겠다. 그러나 결국 그것이 오늘날 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는 점에서 뭔가 좀 허망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만약 청 제국의 직성 지역에서만 시료를 채취해서 보면 청나라 황제는 한화에 성공한 '중국'의 수명천자처럼 보이지만 직성 이외의 지역에서 시료를 채취해서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 떠오른다. 몽골 유목민의 초원 세계에서는 대칸의 이미지, 티베트를 중심으로 한 티베트 불교도의 세계에서는 불법의 수호자인 전륜성왕이자 '문수보살 황제'라는 이미지, 타림 분지의 위구르 무슬림 세계에서는 이슬람의 보호자라는 이미지를 각각 갖게 된다. 그리고 기인의 세계에서는 누르하치의 계승자인 한으로 표상되었다. (225쪽)


오늘날엔? 중국은 어디든 중국이라는 말이 과언이 아니다. 그것을 한화漢化라 해야 할지, 아니면 중화민족의 성공적 형성이라 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드는 생각은 생각보다 중국의 뿌리가 깊지 않다는 거다. '한화'라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책 말미에 있는 것과 같은 중화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주장하는 이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아닐까? 저자가 제국의 탄생과 성장, 변이를 설명했듯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 역시 비슷하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무창 봉기는 상징적이다. 이를 두고 미조구찌 유조는 진의 통일 이후 형성된 황제 지배 체제가 사대부의 성장과 함께, 지역적 정체성을 띄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각 성의 독립이라는 형식으로 해체되었다 이야기하였다. 어쨌든 기존의 그림을 지우고 새 그림을 그렸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셈이다. 하여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하나의 괴물-제국은 언제 어디서 탄생하였는가? 



저자의 관점을 빌리면 만한전석 만큼이나 중화민족 역시 상상의 산물이다 

2. 


저자는 맨콜의 이원구조론의 한계를 말하지만, 나름 상당히 흥미로운 구도이다. 이 구도를 보니 뒤늦게 새로이 이해되는 게 있다. 


내가 중국 땅을 처음 밟은 것은 찌는 듯이 더운 2000년 7월이었다. 역사적인 순간이라 하자. 왜냐면 어린 시절부터 공비가 산에서 내려온다는 소리를 듣고,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던 이가 붉은 제국의 한복판에 발을 내딛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해 6월 15일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북괴수괴를 만나 얼싸 안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학교 식당에서 TV로 보는 데 밥이 넘어가지 않더라. 남과 북이 만났지만 가슴속의 두려움마저 지우지는 못했다. 


장춘 공항에 내렸다. 아스팔트 활주로를 걸어가며 만난 커다랗게 쓰인 장춘이라는 새빨간 두 글자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인민복 같은 복장의 공항 직원들의 무뚝뚝함보다 곳곳에 쓰인 붉은 글씨의 구호가 나를 옥죄고 있었다. 중국 땅의 끼니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던 것은, 찌는 듯한 더위에 먹는 뜨거운 음식 때문도, 낯선 향신료 때문도 아니었다. 붉은 귀신에 억눌려 있었던 게다.


가슴은 쪼그라들어 있었지만 정작 그곳에서의 시간은 그렇지 않았다. 멋대로 활개 치고 돌아다녔다고 할까. 며칠이 지나자 붉은 구호들은 그냥 빛바랜 부적들처럼 보였다. 여전히 붙어 있으나 그 신묘함은 영 힘을 잃어버린. 공산당도 모르겠고 중화도 모르겠고, 속살을 들여다보니 인민의 나라였다. 그렇게 볼 수 있었던 것은 기묘한 친숙함, 그곳에서도 불 때어 가마솥에 밥을 지어먹는 그런 익숙함 때문이리라.


내가 또래들과 정치적, 문화적으로 공유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는데 2002년을 통째로 중국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새로운 정치 운동의 역동적 출현, 반미의식의 팽창, 광장의 광기... 무엇도 나를 경유하지 못했다. 20년 전 그해 여름, 나는 짜릿한 승리를 자축하며 한국인 둘과 함께 철사에 꿰진, 한 줄에 7毛 짜리 양꼬치를 뜯고 있었다. 밤은 컴컴했고, 세상은 조용했다.


그러나 아무런 아쉬움은 없는데, 이원구조론의 동남 초승달 지역 출신이 서북 초승달 지역에 뛰어들어 온갖 새로운 것을 느끼고 배웠던 까닭이다. 과거 선비족의 후예라는 토족土族 출신의 친구는 탕거얼腾格尔의 티엔탕天堂을 구성지게 잘 불렀다. “파란 하늘, 맑은 호수, 푸른 들판, 여기가 나의 집 蓝蓝的天空 青青的湖水,绿绿的草原,这是我的家。” 노래 가락은 기묘한 울림을 주었다. 초원의 후예들 검붉은 피부색에 짙은 흑색의 머리칼을 가진 이들을 한데 묶어 놓으면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티베트인, 몽골인, 그리고 토족까지. 과거 유목민족의 후예들은 뭔가를 여전히 공유하고 있었다. 


한편 마馬 성을 가진 회족들은 또 다른 존재였다. 눈을 보면 푸른빛이 돈다는데 언뜻 보아서는 분간이 되지 않았다. 흰 모자가 그들을 구분하는 유일한 징표였다. 반대로 우뚝한 코에 푹 파인 눈, 곱슬머리에 푸른 눈동자의 위구르인들은 한눈에 보아도 달랐다. 그의 옆에는 사라족, 동썅족, 카작족 등이 있었다. 좌판抓饭이라는 신장식 볶음밥은 별로 였지만, 신장빤몐新疆拌面을 즐겨 먹었다. 그들은 늘 목을 긁어내는 특유의 발음이 있었다. 


이런 이민족 틈에서 나와 친했던 이는 칭다오 출신의 한족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역시 이역만리 먼 땅으로 온 것이었다.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그때에는 물어보지 못했는데, 무슨 이야기가 있었겠지. 몇 년 뒤 칭다오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집으로 초대해주었다. 식탁에는 튀긴 생선이 올라왔다. 낯선 밥상을 치우고, 앨범을 보았다. 문혁 시절 그 아버지의 사진은 또 다른 낯설음이었다.


20년 전 나를 사로잡은 중국은 청 제국의 본속주의의 잔재가 남아 있는 그곳이었다. 그것을 중국이라 해야 할까? 또 다른 무엇으로 지칭해야 할까. 중국어는 낯선이들과 소통하는 하나의 공용어였다. 그들은 저마다의 언어와 습속 속에 있으면서 중국어를 썼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중화'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질문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문득 책을 읽으며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20년을 기념하여 어떻게든 가겠다고 벼르고 있는데, 정작 가면 낯선 중국을 만날 거 같다. 중국이 묻어버렸다고 투정하지 않을까. 아니면 중국에 물들지 않은, 중화민족의 변방에 있는 이들이 여전히 있을까. 수유차와 난, 우육면과 샤슬릭이 교차하는 기묘한 혼종이 아직도 있을까. 



등격이腾格尔의 천당, 중국 노래이기도 하고 중국 노래가 아니기도 하다  

3. 


수유+너머와 인연을 맺은 것은 <열하일기> 강독 때문이었다. 여차저차하다, 한문을 공부하겠다고 열하일기 강독반에 참여하게 되었다. 지금의 나라면 진지하게 말렸을 테다. <열하일기> 같은 책으로 한문 공부하는 거 아니라고. 그러나 중국어도 한문도 아닌 무엇인가가 툭툭 흥미를 끌었다. 당시 만주에 사는 사람들과 나눈 필담, 그건 백화도 고문도 아닌 기묘한 언어였다.


저자 구범진은 <열하일기>에 주목하며 연행사가 빤첸 라마를 만난 것을 상세히 묘사했다. 그들은 전혀 몰랐겠지만 결과적으로 기묘한 체험을 한 것이었다. 청제국의 수도 북경을 빠져나와 맞는 열하의 여름 별장은 낯선 곳이었다. 초원지대에 위치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티베트 불교 사원까지 커다랗게 만들어 놓았다. 조선 사신 입장에서는 수명천자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러 갔으나 황제의 민낯을 보고 당혹스러웠다고 할까. 초원 한가운데 황제가 만들어놓은 오랑캐 테마 파크를 어떻게 가뿐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으랴. 게다가 빤첸 라마라니.


어떻게 보면 <열하일기>는 조선인이 새로운 자리에서 국제적 위치를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물론 그들은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중화를 자처했고 열하의 기괴한 기물과 사람들은 모두 그 바깥에 있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관점을 돌려 청의 눈에서 생각해보자. 조선이 유교 탈레반의 국가를 아무리 자처한다 해도, 조선은 몽골, 준가르 등과 함께 대청제국이 획득한 지역이었다. 명으로부터 계승한 곳이 아닌. 이런 기묘한 불일치의 순간이 열하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질문을 바꿔야 하겠다. 조선말, 스스로 중화를 자처했다고 할 때 그 중화는 무엇이었는가? 명의 몰락 이후, 조선은 숭명 태도를 고수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들의 중화는 옛 것, 한인의 나라 명을 계승하는 것에 불과했을까? 설사 그렇다고 해도 번지수가 다른 믿음은 기묘한 혼종을 낳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이 땅의 재림예수 이만희처럼. 


조선 후기의 중화사상 역시 마냥 그저 과거에 얽매여 있었을까? 그들이 상상한 중국은 무엇이었고 그것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우리의 조상 조선의 씹선비들도 청나라 묻었다며 투덜거렸을까. 중화라는 것이 하나의 유구한 시원을 갖는 것이 아니라면, 더더욱 중화민족으로 수렴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그들이 생각한 중화가 무엇이었나 다시 질문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키메라의 제국> 이후에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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