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리딩R&D] ‘실재’에 대한 과학학의 논의가 매력적인 이유2022-06-14 15: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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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딩R&D_판도라의 희망_0615 발제_아라차



‘실재’에 대한 과학학의 논의가 매력적인 이유



살면서 이런 질문을 해 본 적이 있는지. 실재는 무엇인가? 실재를 어떻게 알 수 있나? 실재를 믿는가? 고대로부터 이 질문은 한 번도 속시원하게 해결된 적이 없다. 질문에 답하기 위해 많은 이차 도구들이 발명됐을 뿐이다. 신, 정신, 이성 등이다. 데카르트가 절대적으로 확실한 답을 내기 위해 무리수를 뒀다는 사실은 많이들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 신을 통해야 도달할 수 있는 바깥 세계가 있다는 것이고, 신체의 어떤 지점에서 정신과 육체가 연결되고 있다고 예상했다. 데카르트의 방식이 너무 번거로웠던 경험주의자들은 지름길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경험주의자들 역시 바깥 세계를 응시하고 있는 정신이 주인공 역할을 하도록 했다. 경험주의자들의 방식은 마치 연결상태가 좋지 않은 텔레비전과 같아서(31p) 조정을 최대한 하더라도 흐릿한 선들의 애매모호한 집합들 이상을 생산하지 못했다. 


칸트는 애매모호하게 조합된 선들 대신에 고정된 조율 격자를 만들었다. 정신은 미리 설계된 범주들에 의해 고정되고 안정된 그림이 된다는 것이다. 칸트의 선험적 확실성은 절대적 확실성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보편성은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현명해 보이지만 좀 복잡한 술책이다. 정신과 바깥 세계는 여전히 평행선이고 실재에 도달하는 길은 더 구불구불해졌다. 다음 도구로 채택된 것은 ‘사회’이다. 신화적인 ‘정신’ 대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선입견, 범주, 전통, 관점, 패러다임들이 실재를 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면 브뤼노 라투르의 과학학이 주장하는 실재론과 가까워보인다. 하지만 단지 피상적으로만 유사할 뿐이다.


사람들은 이제 칸트의 선험적 범주 뿐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사회가 만들어낸 감옥에도 갇히게 되었다. 하나의 감옥이 아니라 각각의 감옥에 갇힌 것이라면 칸트의 보편성은 설 자리는 잃게 된다. 절대적 확실성도 선험적 보편성도 힘을 잃었다. 언어의 감옥에, 스스로의 독단적 시선에 영원히 갇힌 죄수들, 이것이 인간이 처한 현실이었다. 현상학으로 조금은 숨통이 트일 뻔 했다. 육체가 연결된 생생한 세계를 다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상학은 사물들이 어떻게 진짜로 존재하는지를 설명해주는 데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37p). 우리는 결코 인간의 지향성이라는 편협한 초점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상학자들의 복잡한 ‘생활 세계’ 대신에 자연학자들이 다루는 ‘물질 세계’로 실재를 연구하면 상황이 조금 나아질까? 아니었다. 물질 세계에서 발견된 특성들은 통속의 뇌가 바라본 세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여기서 잠깐, 정신과 세계는 정말 분리되어 있는 것이 맞나? 정신과 세계를 딱 분리해 놓고는 이 둘이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 애초에 둘을 분리시켜놓아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브뤼노 라투르의 다음 문장을 보자. “우리가 인간의 때가 묻지 않은 객관적인 객체라는 다른 비인간적인 자원에 의지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바로 비인간적인 군중들을 피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43p) 만약 “실재가 그때 그때 민중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되어버린다면 가장 두려워할 사람들은 누구일까? 만약 이성 대신 힘이 모든 것을 장악해 버리고 진리를 결정해 버린다면 말이다. 


“모든 것을 하찮고 무시무시하며 비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릴지도 모르는 폭민정치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인간이 아닌 기원을 가지며, 인간성의 흔적이 없는 것, 즉 순수하게 맹목적으로 그리고 냉정하게 도시(폴리스) 밖에 존재하는 어떤 것에 의지해야 한다. 인식론자들이 창조한 바깥 세계라는 개념은 도덕주의자들의 눈에는 폭민정치의 먹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피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이었다. 오직 비인간성이 비인간성을 억누를 것이었다.”(44p) 비인간적인 영역, 도달할 듯 하면서도 도달하지 못하도록 만든 세계의 발명은 수많은 민중들을 침묵하게 한 방법이었다. 


이제 ‘실재’에 대한 브뤼노 라투르의 답을 보자. 그의 과학학은 ‘사실’이 제조된다고 주장한다. 객관적 현실은 누적된 정보와 과학자들과 사회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과학자들에게도 철학자들에게도 반갑지 않은 주장이다. 객관의 영역을 책임지고 있는 과학에서 하나의 이론처럼 ‘사실’이 만들어진다면 지고의 영역에 올려둔 ‘실재’조차 대단치 않은 것이 된다. 그때 그때 만들어지는 힘의 작용, 힘의 배치가 달라지면 다른 ‘사실’이 도출된다. 이러한 과학학이 ‘실재’를 더 멀어지게 만들었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분명 ‘실재’는 더 풍부해졌다. “우리는 과학학의 성취에서 과거의 이성의 정치, 즉 인식론과 도덕론, 심리학, 신학 사이의 오래된 합의로서의 정치로부터 과학을 자유롭게 할 방법을 최초로 찾았다. 또한 우리는 아마도 최초로 객관성의 정치로부터 비인간들을, 주관화의 정치로부터 인간들을 해방시켰다.”(58p) 


과학학은 사람들에 대항한 ‘우월한 힘’이나 세계에 대한 ‘접근’을 상실할까봐 두려워하는 ‘정신’이 필요없다. 절대적 확실성도 갈구하지 않는다. 애초에 확실성이 결핍되지도 않았고,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꿈도 꾼 적이 없다. 당연히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니다. 브뤼노 라투르는 ‘팩티쉬factish’라는 개념은 제안한다. 팩티쉬는 ‘사실fact’과 ‘물신fetish’의 결합으로 ‘지식’과 ‘믿음’의 쌍둥이다. 그리고 ‘저 바깥’의 실재와 ‘저 안’의 정신 그리고 ‘저 아래’의 군중이라는 세 기둥 대신 ‘집합체collective’ 개념을 제안한다. 집합체는 잡종적 세계를 지시한다. 우리는 신, 사람, 별, 원자, 핵발전소, 시장이 하나로 이루어진 잡종적 세계를 살고 있다. 애초에 분리되지 않았고 분리할 수도 없다. 브뤼노 라투르는 인간과 비인간을 대칭적으로 다뤄야 한다고 주장하며 비인간도 행위자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인간이라 불렸던 사물은 이제 어떤 통제불가능한 혼돈의 세계에 던져진 듯한 기분이 든다. 사실 처음부터 그랬을 것이다. 잘 포장된 합의를 계속 유지할 수 없게 됐을 뿐이다. ‘실재를 믿느냐’는 가련한 질문 대신에 적극적으로 혼돈의 세계를 직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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