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리딩 R&D] 과학을 관찰하는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 (판도라의 희망 2장 발제)2022-06-24 19:4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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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판도라의 희망 2장 발제.hwp (80KB)

판도라의 희망: 과학기술학의 참모습에 관한 에세이2장 순환하는 지시체

 

우리에게 과학학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 브뤼노 라투르는 마치 자식을 직장에 데려가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부모처럼 자신의 연구 과정을 상세하게 보여준다. 당황스럽게도 라투르의 현장은 아마존의 숲이다. 다행히 전문가들은 아마존의 숲을 문자와 사진이 나열된 텍스트로 옮겨올 줄 안다. 그 기술 덕에 우리는 아마존의 숲을 연구하는 과학자들과 함께 다시 이 과학자들을 연구하는 철학자 라투르를 집안에서 편하게 책으로 만난다.

 

과학자들의 목표는 세계를 언어화 혹은 기호화하는 데 있다. 세계가 실재라면 거기에 대응하는 단어를 만들고 간극을 없애는 것이 과학철학자들의 목표다. 실재를 그대로 재현하는 언어를 찾는 셈인데, 언어로 실재를 재현하는 일은 과연 가능할까? 라투르는 이 목표의 전제인 세계(실재)와 언어라는 존재론적 이분법 자체를 불신한다. 그런 존재론적 구분이 없으니, 당연히 대응이나 간극도 없다. 단지 순환하는 지시체만이 있을 뿐이다.

 

이 순환하는 지시체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우리는 부모의 직장을 참관하는 아이처럼 라투르를 따라나선다. 라투르는 아마존의 숲을 연구하는 한 무리의 과학자들과 함께 일한다. 라투르의 역할은 아마존의 숲을 연구하는 이 과학자들을 관찰하는 일이다. 마치 원시부족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인류학자처럼 말이다. 라투르는 토양학자, 지리학자, 식물학자인 전문가들이 아마존의 숲과 토양을 기입하여 데이터로 만드는 과정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기입은 과학자들이 세계를 정복하는 방식이다. 기입된 데이터를 가리키는 색인이 바로 지시이다. 과학자들은 세계를 기입하고 재현하여, 세계 그 자체가 아닌 지시체를 연구한다. 라투르가 보는 과학은 실제적인 동시에 구성적이고, 직접적인 동시에 매개적이다. 과학의 확실성은 언제나 다른 지시체가 보장해주어야만 성립된다. 과학은 무에서 탄생하지 않으며, 표시하고 기입하는 행위를 통해 시작되어 다음 작업으로 이어진다.

 

과학자들이 현장에서 채취한 표본은 지시대상으로써 대표성을 지니며 연구의 증거가 된다. 이 표본은 아마존의 숲을 동시대의 통일된 시선 안에 드러나게 한다. 표본을 통해 과학자는 이동과 재결합이 가능한 숲의 일부를 가지게 된다. 또 표본을 분류하면서 쉽게 패턴을 발견한다. 지식의 혁신은 이 패턴의 발견과 함께 이루어진다. 과학자들은 표본을 채취하여 숲을 떠나면서 숲을 잃고, 동시에 실험실에서 숲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는 모순에 빠진다.

 

과학자들이 지식을 획득하는 과정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패턴의 발견은 수집과 함께 무언가를 간과하면서 가능해진다. 모든 것을 보려 하면 곧 혼란에 빠진다. 어떤 것을 보는 동시에 무시해야 한다. 과학자가 데이터의 범람에서 벗어나려면 속도가 증가해야 한다. 지식은 이런 빠른 이동에서 만들어진다. 또 과학자들은 다양한 학문의 관점에서 지시체를 포갠다. 양립 가능해진 지시체는 이제 주어진 데이터가 아니라 성취된 서블라타가 된다.

 

우리가 세계를 알 수 있으려면, 먼저 세계를 실험실로 보아야 한다. 지형은 지도가 되고 식물은 표본이 되지만, 지도와 표본은 측정이라는 경험으로 가능해진다. 세계는 정신이 아닌 경험으로만 측정된다. 동시에 탐사의 성패는 그 측정을 기록한 텍스트인 업무일지에 달려있다. 업무일지는 각 프로토콜에 호환성을 부여하고, 공간과 시간에 대해 연속성을 부여한다. 사물은 기호화되며, 기호 안에서 사물은 서로 횡단하고 비교 가능해진다.

 

측정과 기호화를 돕는 사물도 등장하는데, 이 책에 등장하는 토양비교분석기가 그 예이다. 토양비교분석기는 데이터를 번역하거나 수송하는 취급법을 통해 과학자가 패턴을 발명하도록 돕는다. 과학자는 이 발명을 해석하면서 마지막 변형의 과정을 거친다. 최종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학자는 기호들의 각 단계에서 연속성이 드러나도록 노력한다. 라투르는 이 연속성과 함께 각 단계에서 숨길 수 없는 균열과 함께 불연속성을 발견한다.

 

지시는 단순히 가리키거나 보존하는 행위가 아니라, 연구의 각 단계에서 조절된 변형과 번역을 보장하는 행위이다. 지식은 외부세계를 모방하여 이해하는 일이 아니며, 일관성과 연속성을 보장하면서 내부 세계를 반영한다. 유사성은 사라지고, 변형만이 남는다. 과학자들은 이 변형들 속에서 유지되는 불변을 포착하려 한다. 자신의 인식능력을 신뢰하지 않는 과학자들은 변형을 통해 보편 혹은 진리에 도달하려 한다.

 

철학자들은 진리의 기준으로 단어와 사물의 대응을 찾지만, 과학자들은 연속적인 층위의 변형과 이동을 수행한다. 물질과 형식은 분리되는 게 아니라 재탄생을 거쳐 도약한다. 과학자는 어떤 관점에 서 있다기보다 매번 다른 관점으로 이동한다. 지식은 주체(정신)와 객체를 나누는 이분법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정신이 객체를 마주할 때 모든 단계는 조작을 거치며 유사성은 마모되어 버린다. 지시는 지성과 존재의 일치를 뜻하지 않는다.

 

실재가 텍스트로 기호화될 때 나타나는 변형은 감소뿐만이 아니다. 재현을 통한 변형에는 획득하거나 회복하는 환원 또한 존재한다. 환원이 다른 지식과 연결될 때 증폭이 일어난다. 서구의 철학 전통에서는 현상을 사물과 인간 이해 범주 사이의 접점으로 이해해왔다. 라투르는 이런 시각을 부정하며, 변형의 가역적 연쇄를 따라 일어나는 순환이 현상이라고 말한다. 라투르의 입장에서 지시체는 점점 더 극단으로 밀려날 뿐 접점에서 만나지 않는다.

 

연구자들은 떠날 준비와 돌아올 준비를 동시에 한다. 지시체는 양방향으로 확대되고, 연구는 다음 연구로 이어진다. 라투르의 연구를 따라다니며, 이제 우리는 과학이 세계의 정확한 복사본을 그리는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세계와 그대로 대응하는 단어는 없다. 유사성을 잃어버린 자리에는 정렬과 변형과 구성이 남았다. 변형은 긴 연쇄를 통해 확장되고, 지시체는 계속해서 순환한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실재를 포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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