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SF 연대기] 현실에 발붙인 공상과학2022-06-29 10:3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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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연대기 7, 8] 현실에 발붙인 공상과학

에레혼

 

7장 새로운 목소리, 새로운 관심: 1960년대와 1970년대

장르적 권위의 형성과 하드 SF의 등장. 1960년대와 70년대를 가르는 SF의 키워드는 다소 무겁고 보수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이런 주류에도 반향을 일으키는 작품들도 존재했다. 이러한 SF의 조류는 6, 7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발생한 정치적 변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말콤 엑스, 뉴욕급진여성회, 레이첼 카슨 등 각각 흑인 인권 운동, 페미니즘, 환경보호주의에서 상징처럼 회자되는 인물이나 단체들이 활발하게 움직인 시기가 바로 1960년대이다.

SF에서 인종을 운운하는 일은 뒤떨어진 행동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많은 SF 작품들이 인종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미래 세계를 그려내기도 한다. 혹은 인종에 대한 인식이 SF에 간접적으로 발현될 때도 있다. SF 연대기』의 지난 내용에서 저자의 인종에 대한 관점이 외계인이나 최첨단 로봇으로 변환된 작품을 다수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인종 문제가 사회의 이슈로 자리한 60년대와 70년대에는 직접적으로 백인 우월주의와 식민주의를 비판하는 작품들도 상당수 나타났다. 하얀 연꽃과 같이 황화 시나리오를 그대로 백인들에게 돌려주는 이야기가 있었는가 하면 시간 속의 흑인처럼 시간여행을 통해 백인 우월주의자들에게 테러를 감행하는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도 발표되었다.

또한 이 시기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들이 주목을 받은 때이기도 하다. 샘 그린리나 줄리언 모로와 같은 작가들은 흑인이 백인 중심의 사회 구조를 뒤집는 서사를 구축하고, 이런 이야기 속에서 흑인들의 유토피아를 그려냈다. A. 윌리엄스의 작품은 이러한 전복적 서사에서 다소 벗어나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흑인 동지들을 지키고자 했을 때 반항을 포기해야 하는 아이러니를 말하거나(『나라고 외쳤던 남자』), 흑인이 권력 고위층에 올라갔을 때 여전히 차별이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을 짚어내기도 했다.(『블랙맨 대위』) 이처럼 60~70년대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들의 SF에는 대체로 전복적 플롯과 대체 역사라는 서사적 특징이 나타난다.

한편 1960년대 제 2의 물결 페미니즘이 부상하면서, 여성작가들의 SF 혹은 젠더를 다루는 SF에도 뚜렷한 변화가 감지된다. 이 시기에 페미니즘 정치학이 반영된 작품의 주요 특징으로는 먼저 여성 위주의 사회를 묘사한다거나, 남녀 사이의 대립 구도를 설정한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특이한 것은 당시 많은 작품에서 남성이 절멸한 미래 사회가 나타난다는 사실이다.(『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 『그것이 변했을 때』, 『보이지 않는 여자들』) 이외에도 제 2 물결 페미니즘의 강령에 따라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젠더 차이에 주목하는 작품들도 등장하였다. 『비너스 플러스 X』의 등장인물 찰리가 거주자들의 성별/젠더를 판별할 수 없는 레돔 지역에 생경함을 느끼는 것, 『어둠의 왼손』에서 겐리 아이가 젠더 편견으로 인해 여러 가지 오인을 겪는 에피소드 등은 6, 70년대 SF의 젠더적 우화이다.

기술력의 발전도 여성을 다루는 SF 콘텐츠에 적극 반영되었다. 드라마 『600만불의 사나이』의 등장인물인 소머즈는, 해당 에피소드의 인기에 힘입어 단독 시리즈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600만불의 사나이』에서 소머즈는 기계 인간이 된 스스로의 처지를 비관하고, 자신을 받아주는 스티브 오스틴과 결혼하는 인물이다. (비록 『소머즈』에는 풍자적인 뉘앙스가 없었지만) 기술에 의해 여성이 억압되는 서사 구조를 벗어난 작품도 존재했는데,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는 과학 발전에 의한 유토피아를 그린 SF이다. 이 작품은 단순히 유토피아적 낙관주의를 이야기하는 작품이 아니라, 기술 발전의 이상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현재의 가부장 질서를 타파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1960년대와 70년대, 환경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SF에도 이러한 조류가 반영되었다. 기술 발전과 환경 문제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기에, 환경보호주의가 반영된 SF의 발달은 필연적인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환경 파괴에 대한 우려를 담은 디스토피아적 작품들도 존재했으며, 기술 발전과 생태 시스템 덕분에 이런 문제들이 해소될 것이라고 보는 유토피아적 작품들도 발표되었다. 『양이 쳐다보다』와 같은 작품들은 기술 발전으로 인한 환경 오염과 그에 대한 해결책이 한 묶음처럼 생성되는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를 비판한다. 작품의 결말부에는 ‘인구의 2억쯤은 지구에서 사라져야 환경 문제가 해결된다’는 자조 섞인 진단이 등장한다. 인구 과잉에 대한 경고는 『양이 쳐다보다』 이외에도 환경을 다루는 여러 SF 작품들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메시지였다. 『킨즈먼』처럼 새로운 삶의 터전을 지구 밖에서 찾는, 식민주의적 해결책을 논하는 작품들은 당시의 시대상을 잘 반영하는 SF였다.

 

8장 새로운 정치, 새로운 기술: 1980년대와 1990년대

히피 문화와 인권 운동의 시기가 지나고 1980년과 1990년에 접어들며 신자유주의의 서막이 오른다. 과학기술 측면에서 이 시기를 살펴보면 소형화라는 키워드를 빼놓을 수 없다. 컴퓨터가 사람들의 책상에 올라올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당시의 사회적 변화는 SF적 상상력을 앞지를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하드 SF가 다시 한 번 부상하게 된다. 이 현상의 이면을 탐구해보면 SF와 뉴라이트의 결탁이라는 키워드를 건질 수 있다. 하드 SF의 보수성은 이전 시대 SF가 ‘감히’ 인종차별페미니즘자본주의 등에 열을 올린 역사에 반발하는 움직임이었다. 해당 시기 미국의 군사 정책들도 하드 SF의 야망이 실현되는 장처럼 보였다. ‘스타워즈 프로젝트’라고도 불린 전략방위구상, 그리고 NASA의 우주 탐사 본격화는 과학 기술을 맹신하는 작가들에게 자극제가 되었다. 이처럼 전운이 감돌고, 정복이 당연시되는 분위기는 당시 등장했던 SF 작품들에도 영향을 준다. 당시 등장한 수많은 스페이스 오페라는 우주 활극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전쟁과 군사력 팽창을 반영하였다.

당연히 핵무기를 과시하는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작가와 제작자들도 존재했다. 이러한 비판의 목소리는 아포칼립스 SF 장르에서 주로 나타났다. 황폐화된 미래를 다루는 모든 작품의 교본이 된 『매드맥스』부터, 인간을 잠재적인 위협으로 간주하는 컴퓨터가 등장하는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군사적 낙관주의에 의문을 던진 작품들이다. 여기서 한 술 더 떠서, 『스레즈』나 『리들리 워커』는 핵전쟁 이후의 인류가 더 이상 고등문명체가 아닐 수 있다는 우울한 상상을 구현하였다.

고도화된 기술력과 미래에 대한 불안은 사이버펑크라는 하위 장르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사이버펑크의 장르적 법칙에 상당부분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진 『뉴로맨서』도 이 시기에 나온 작품이다. 이 장르에서 인류는 AI의 통제 하에 놓여있으며, 등장인물들은 악한에 가깝다. 그리고 책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많은 사이버펑크에서는 “일국 정부가 아닌 다국적기업이 지배하는 세계(하지만 일본이나 홍콩인 것이 분명한 공간)”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여성의 대상화 또한 사이버펑크 장르의 클리셰라고 부를 수 있는 요소인데, 이러한 점에서 여성 작가 팻 카디건의 작품들은 매우 소중한 예외라고 부를 수 있다.

문학 연구자들이나 평론가들에게 사이버펑크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극치로 받아들여졌다. SF 연대기』에서는 당시 사이버펑크가 각광을 받았던 상황을 장 보드리야르, 그리고 도나 해러웨이와 연관지어 설명한다. 사실 사이버펑크에서 사이버네틱스에 접속하고 육체가 더 이상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은 “시뮬라크르들과 시뮬레이션이 …… 원본을 대신하고, 세계의 강력한 모델이 …… 현실에 선행한다”는 보드리야르의 이론과 상당부분 맞닿아 있다. (워쇼스키 남매가 『매트릭스』를 제작하는 과정에서도 장 보드리야르의 저작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또한 “여신보다 사이보그가 되겠다”는 해러웨이의 선언은, 기술을 통해 육체에서 해방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나온 결론이다. 해러웨이의 이상은 사이버펑크 세계관과 한 끗 차이인 것처럼 보인다. 사이버펑크 작품들에서 젠더리스인 인물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단순히 클리셰라고 치부할 수 없는 이유이다.

1990년대까지 전개된 SF의 역사를 보면 더 이상 장르적 규칙이나 이론화 작업은 무의미한 것처럼 보인다. 하드 SF에서 사이버펑크까지 다양한 컨텐츠들은 분석틀로 담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다단해졌다. 하드 SF가 기술적 낙관론과 정복주의로 점철된 장르라면, 사이버펑크는 ‘카운터문화에 대한 카운터장르’라고 칭할 수 있다. 장르 생성 초기 사이버펑크 세계관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 우울감과 패배주의가 주된 정서로 자리한다. 이는 20세기 후반의 기약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작품에 반영된 결과이다.

그렇지만 모든 사이버펑크 장르들이 『블레이드 러너』나 『뉴로맨서』의 정서를 계승한다고 볼 수는 없다. 작가가 다르거나 시대가 변하면 동일한 소재를 다루거나 유사한 하위 장르에 묶인다고 하더라도, 전혀 다른 목소리를 내는 작품이 탄생하기 마련이다. 다원적 가치를 포용하는 시대의 SF를 살펴보는 이후 과정에서는 탈장르, 비규범이라는 말 자체가 구태의연한 수사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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