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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플라톤의 '국가] 0924 내용정리 :: '정의란 무엇인가'2019-09-27 00: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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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 괄호 안 숫자는 <천병희 역, 숲>의 페이지입니다.



1. 소크라테스 : "어제 내가 말야..."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 아주 상식적인 이 접근은 <국가>를 펼치면 의문의 대상이 된다. 이유인즉 플라톤의 저작 <국가> 안에서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관계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플라톤의 저작에서도 동일하게 보이는 점인데, 플라톤은 그의 글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따라서 철학사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 저자 플라톤과 등장인물 소크라테스. 


<국가>는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거대한 대화의 묶음이다. 마치 희곡과도 같이 제한된 공간에서 여러 인물이 긴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소크라테스의 대화 상대는 계속 바뀌는데, 읽다 보면 소크라테스의 대화 상대가 누구인지 쉬이 까먹곤 한다. 소크라테스야 워낙 명성이 있는 인물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그와 대화를 나누는 인물은 온통 낯설기만 한 까닭이다. 


그러나 깊이 읽는다면 그의 대화 상대가 누구인지 곰곰하게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 소크라테스와 함께 여행을 한 '아리스톤의 아들 글라우콘'은 플라톤의 형이다. 글라우콘의 형 아데이만토스도 등장하니 플라톤의 형제 둘이 등장하는 셈이다. 그밖에 케팔로스나 폴레마르코스, 타라쉬마코스 등등이 있다. 이들 모두 당대에 이름난 인물이었다 한다. 하여 플라톤의 글을 읽는 당대의 독자는 매우 흥미진진하게 글을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름난 사람들이 심오한 대화를 주고받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구체적인 배경과 달리, 이 책의 일차적인 독자는 누구인지 감추어져 있다. <국가>는 소크라테스가 여러 인물과 대화를 나누었던 경험을 회상하는 식으로 전개되는데,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듣는 청자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제 나는 아리스톤의 아들 글라우콘과 함께 페이라이에우스 항에 내려갔었네. 여신께 축원도 하고, 처음으로 선보이는 축제를 어떻게 치르는지 구경도 할 겸. 아테나이인들의 축제행렬도 훌륭하다고 생각되지만, 트라케인들이 보여준 축제행렬도 그에 못지않게 인상적이었네. ..." : 24쪽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을 빌리면 이는 텍스트의 열린 특징을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청자/독자가 누구인지 모르니 그 누구든 청자/독자의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 따라서 어떻게 보면 플라톤의 <국가>를 읽는다는 것은 소크라테스와 여러 인물이 나눈 대화에 간접적으로나마 초대받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쓰인' 텍스트의 한계로 소크라테스에게 질문을 던질 수는 없으나, 읽다보면 끊임없이 질문이 솟아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대관절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가? 



2. 케팔로스 옹 : "정의란..."


먼저 케팔로스와의 대화로 시작한다. 케팔로스는 죽음을 앞둔 '노년의 문턱'(27)에 이른 사람이다. 만년에 이른 상인인 그는 '미쳐 날뛰는 수많은 주인(28)'에게서 해방되었다며 감사를 표한다. 미처 날뛰는 주인이란 다양한 감정, 욕망 등을 의미한다. 나이가 드니 예전처럼 활력이 줄어든 것도 있지만, 거꾸로 이리저리 다양한 욕정에 흔들리지 않아도 되었다는 말씀. 


이에 소크라테스는 슬쩍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그대가 노년을 쉽게 견디는 이유는 그대의 성격 때문이 아니라 그대가 큰 재산을 모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 같소.(29)" 삶이 넉넉하니 그런 한가하나 소리를 하는 게 아니냐는 질문. 그러나 케팔로스는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자신의 마음을 편안한 것은 '정의롭고 경건한 삶(32)'을 살았기 때문이라 말한다. 누구를 속이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빚지지 않고 살았으니 말이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와 달리 물려받은 재산을 까먹지 않고 누구에게 빚지지 않고 살아왔다 말한다. 


결국 케팔로스와의 대화는 '정의正義'라는 주제로 이어진다. 케팔로스의 정의는 '진실을 말하는 것, 누구한테 무엇을 빌렸건 빌린 것을 돌려주는 것'(32)이다. 케팔로스가 상인이었다는 점을 기억하자. 상호 간의 신뢰를 지키는 것이 그에게는 정의였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정의에 대한 논의는 끝일까? 나이 든 케팔로스는 대화 자리에서 떠나고 이 논의를 시작으로 정의에 대한 검토가 이뤄진다. 케팔로스의 아들 폴레마르코스가 대화를 물려받아 이 정의에 대한 이야기를 끌고 간다. 


논의를 간단히 훑어보면 이렇다. 정의란 '친구끼리 마땅히 서로 잘해주고 서로 해코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34). '정의는 친구들에게는 이익을 주고 적들에게는 해악을 끼칠 수 있는 기술'(35). 케팔로스와의 대화에서 조금 나아가기는 했으나 이 역시 상인들 사이에 통용되는 논리이다. 즉 이러한 정의는 '계약'을 맺는데 필요하다.(37) 여기에 소크라테스의 질문. 그렇다면 정의란 돈이 쓸모없을 때, 즉 돈이 없어도 될 때 필요한 것이 아닌가? 정의란 외상을 가능케 하고, 어음을 발행하는 능력을 지녔나? "여보게, 그렇다면 정의란 중차대한 것은 못 되네. 만약 정의가 사용하지 않는 것들과 관련해서만 쓸모 있는 것이라면 말일세."


이 긴 대화는 정의에 대한 더 보편적인 의미를 찾는 방향으로 이어진다. 폴레마르코스에 의해 몇 가지 논의가 더 제시되나, 이는 모두 정의를 정의定義 하기에 부족하다는 결론으로 끝난다. 이것도 정의가 아니며, 저것도 정의가 아니고...


흥미로운 점은 상인들의 계약 관계에서 정의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리스라는 해양국가의 특성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정의란 상호 간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며, 서로의 신뢰에 기반한 것이라는 점. 따라서 누가 친구인가, 누가 나에게 이익을 주는 사람인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크라테스에 의해 이 전제가 폐기되나, 이런 출발점은 당대 그리스인들이 생각한 정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증표이기도 하다. 


그리스와는 다른 사회 구조위에 있던 고대 중국에서는 정의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룬다. 정의라는 표현을 명시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으나 무엇이 바른 것인가(正)라고 묻는다면, 일차적으로는 질서를 지키는 것이라 답할 것이다. 질서란 한 사회의 상하 위계를 어떻게 유지하느냐의 문제이다. 누가 먼저고 누가 나중인가 하는 그런 선후의 문제가 명확한 것, 이것이 올바름이며 거꾸로 이것이 무너진 상황 - 무질서야 말로 '사회적 악'이라 보았다. 그리고 이 질서가 바로 가족(家) 공동체에서 시작한다는 것이 고대 유가儒家 지식인들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고대 유가 지식인들(놀랍게도 이들은 플라톤과 동시대 사람들이다)에게 이 책의 시작은 매우 낯설었을 것이다. 



3. 트라쉬마코스 "헛소리를 길게도 하시네..."


겉도는 대화란 꽤 무료한 것이다. 별 관심이 없는 대화라면, 당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는 대화라면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한계가 있기 마련. 우리에게는 종종 술자리의 대화가 이런 상황이긴 한데, 그럴 때면 다른 대화 상대를 찾으면 될 일이다. 대화 상대를 찾을 수 없다면? 안주 거리를 집어 먹으며 시간을 보내는 수밖에. 아니면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거나. 그러나 안타깝게도 <국가>의 대화는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다. 대화의 스포트라이트는 오직 소크라테스에게만 있는 상황. 정의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식의 이야기가 지겨울 때 한 인물이 등장하여 판을 뒤엎는다.


"아까부터 두 분은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죠, 소크라테스 선생? 무엇 때문에 두 분은 바보스럽게 서로 양보만 하는 거요? 정의가 무엇인지 진실로 알고 싶다면, 묻기만 하다가 다른 사람이 무슨 대답을 하면 이를 반박함으로써 칭찬받으려 하지 마시오. 그대도 잘 알다시피 대답하는 것보다 묻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요. 그대가 대답하시오. 정의가 무엇인지 그대가 말하시오. 그리고 정의는 필요하다는 둥, 유익하다는 둥, 우리하다는 둥, 이익이 된다는 둥, 덕이 된다는 둥 말하지 마시오. 나는 그대한테서 그런 시시한 소리는 듣고 싶지 않으니, 그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해주시오."(46)


그러니까 핵심이 뭐냐고. 트라쉬마코스의 질문이 이렇다. 질문만 늘어놓으며 조심스럽게 접근하지 말고 네 생각을 말하라는 요청. 트라쉬마코스의 태도가, 그들을 '갈기갈기 찢으려는 듯 덤벼드는'(46) 태도가 매력적이기는 하다. 꾸역꾸역 고구마를 먹고 있는 데 사이다를 들이켜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플라톤의 글은 그의 이런 태도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흐른다. 미리 이야기하면 정의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끊임없이 이어지며 이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국가> 전체의 내용의 뼈대를 이룬다.


트라쉬마코스는 톡 튀는 인물이다. 일단 그는 소크라테스의 태도를 문제 삼는다. 끊임없이 질문하는 태도가 못마땅하다. 분명한 입장 없이 질문을 늘어놓으며 전제를 검토하는 것. 그가 보기에 이는 무식한 척하는 위선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는 소크라테스가 오기 전 이렇게 예언(!) 했단다. "누가 무슨 질문을 하면 그대는 대답은 하지 않고 대답을 회피하기 위해 무식한 척 무슨 짓이든 할 것이라고 말이오."(47)


과연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다. 트라쉬마코스의 말처럼 소크라테스는 이미 결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를 숨기고 모르는 체하는 걸까? 아니면 소크라테스 자신의 말처럼 그는 참으로 무지하며 지혜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인가. 


어쨌든 이 둘은 명백하게 지식을 대하는 서로 상반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한 명은 돌다리를 놓기에 앞서 세심하게 돌을 고른다. 한편 누군가는 경험에서 얻은, 주변에서 가져올 수 있는 무엇을 가져와 놓아 보자고 말한다. 한 명은 조심스럽고 한 명은 성급하다. 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를 생각한다면 전자의 방식을 따라야 할 것이다. 철학은 질문하는 것이며. 이 조심스러운 질문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지혜로운 태도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주 짧게 언급되는 트라쉬마코스의 질문을 그냥 지나쳐버려야만 할까? 그는 이렇게 비아냥댄다. "자기는 가르치려 하지 않고 돌아다니며 남들한테 배우되 고마워할 줄 모르는 것, 바로 이것이 소크라테스의 지혜라는 것이지."(49)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는 것, 이는 달리 말하면 책임지지 않는다는 말이며 지식으로부터 한걸음 물러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의 말에서 오늘날 창백한 지식인의 표상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주체와 지식은 늘 떨어져 있다. 스스로는 진리를 추구한다 말하지만, 거꾸로 이는 진리로부터 끊임없이 물러나려는 태도는 아닐까. 진리가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과 주체의 합치를, 흔한 말로 앎과 삶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길고 긴 질문을 던지는 이유가 올바르고 좋은 삶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길은 매우 멀고도 험하다. 일단 우리는 삶에 대한 이야기는 괄호 치고 정의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짊어지고 지혜의 여정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서야 다시 삶으로 돌아올 수 있다. 



4. 트라쉬마코스 "정의는 강자의 것"


<국가>는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것이니 하는 수 없이 소크라테스의 길을 따르는 수밖에 없다. 소크라테스의 길을 따르되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검토하도록 하자. 트라쉬마코스는 이전의 논의와 전혀 다른 담대한 주장을 펼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정의가 강자에게 유익한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오.'(50)


여기서 트라쉬마코스는 전혀 다른 배경에서 정의를 이야기하게끔 논의의 방향을 새롭게 제시한다. 바로 통치의 문제에서 정의를 논의하는 것이다. 그는 정의란 통치자들이 정하는 것이라 말한다. 권력자가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법을 제시하는 것. 달리 말해 '수립된 정권에 유익한 것'(51)이 그가 말하는 정의이다. 여기에는 어떤 냉소가 숨어있는데, 정의란 그렇게 기만적인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이 기만, 속임수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루도록 하자.


트라쉬마코스의 논의는 소크라테스에 의해 잘게 쪼개지고 세밀하게 검토된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기술'에 대한 논의를 토대로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반대한다.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기술은 대상에게 유익한 것을 제공하는 것이다.'(57) 따라서 "어떤 지식도 강자에게 유익한 것을 생각하거나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배를 받는 약자에게 유익한 것을 생각하거나 지시"(59) 한다. 즉, 트라쉬마코스는 권력을 손에 쥔 통치자가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 정의라고 말했지만, 소크라테스는 통치 그 자체는 통치의 대상 즉 약자를 위한 것이니 '통치자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는 전제가 틀렸다는 말이다.


지식/기술이 대상과 맺는 관계에서 보자면 소크라테스의 말은 일리가 있다. 소크라테스가 예로 드는 의술이 그렇지 않은가. 의술은 자신을 건강하게 하는가? 아니면 그 대상을 건강하게 하는가? 물론 여기서 누구는 의학이 신체를 소외시키며, 나아가 주체를 망각한다는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그렇다면 거꾸로 자신의 신체를 보양하고 다루는 의술도 있겠지. 허나 일단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따라가자.


이에 대해 트라쉬마코스는 양치기의 비유를 들어 반론을 펼친다. 통치자들은 피치자들을 양떼처럼 여기지 않는가? 양치기도 양을 이롭게 하기 위해 양을 치는가?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저마다 각각 기술은 다른 혜택을 제공한다는 전제를 들어 그의 주장을 깨뜨린다. 양을 기르는 기술과 품삯 획득술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 "엄밀히 말해 의술은 건강을 제공하고, 품삯 획득술이 품삯을 제공하네."(66)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 진정으로 훌륭한 사람들은 '돈이나 명예를 바라고 통치하려 하지는 않을 것'(67)이라 말한다. 즉 통치란 피치자들을 이롭게 하는 기술이며, 돈이나 명예를 획득하는 기술은 또 따로 있다. 설사 통치가 돈이나 명예를 획득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해도. 이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 이에 이어 소크라테스는 그 유명한 주장, 왜 훌륭한 이들이 통치자가 되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들 스스로 통치하기를 거부할 때 그들이 받는 가장 큰 벌은 자기들보다 못한 자들의 통치를 받는 것일세."(68)


이렇게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깨뜨린다. 그러나 또 여기에 의문이 남는다. 만약 통치의 기술이 있고, 품삯획득술이라는 기술이 따로 있으며, 마찬가지로 명예획득술이라는 기술이 또 따로 있다고 하자. 그렇게 기술을 나눈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인 문제는 여기서 다루어지지 않는다. 기술이 무엇인가를 유익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할 때, 주체 - 기술 - 대상의 삼각구도에서 기술이 대상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라면, 과연 품삯획득술이나 명예획득술은 무엇을 유익하게 하는가? 의술을 가진 의사는 남을 치료하지만, 상술을 가진 상인은 무엇을 하는가? 


만약 '권력획득술'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을 누구를 이롭게 하는가? 마찬가지로 '강자의 기술'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것이 설사 약자를 이롭게 하는 것일까? 주체 자신을 대상으로 삼는 기술이 있지 않을까. 오롯이 자신을 이롭게 하는 기술. 이렇게 질문을 던지면 정의란 철저하게 새롭게 구성돼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즉, 자신에게 유익한 것이 정의라고 한다면, 자신이 권력을 취득하며, 강자가 되는 것이 정의라고 한다면, 상대를 약자로 만들거나 상대를 지배하는 것을 부차로 두고, 그렇게 하는 정의가 있다면 소크라테스는 무어라 답할까?



5. 트라쉬마코스 "고매한 선의 혹은 융통성"


다루어져야 하는 또 다른 주제. 과연 정의는 이로움을 가져다주는가? 오히려 불의가 이로움을 가져다주지 않을까?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이렇다. '불의는 이득이 되고 정의는 이득이 되지 않는다'(70) 이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질문. 


"자네는 정의를 악덕이라고 부르겠다는 것인가?"

"아니요. 고매한 선의라고 부르겠소."

"그렇다면 불의는 악의라고 부를 텐가?"

"아니요, 융통성이라고 부르겠소." (70)


이 문제는 정의에 어떠한 '자질'(71)을 귀속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정의가 이로움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비판. 그래서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가 지나치게 순진하다고 말한다. 이런 비판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는 정의와 불의 가운데 무엇이 미덕인지를 다루고자 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올바른 사람은 불의한 사람을 능가하려 하지만, 자기와 같은 사람, 즉 올바른 사람을 능가하려들지는 않을 것이라 말한다. 반면 불의한 사람은 자신과 같은 불의한 사람을 능가하려 들지만 또한 동시에 올바른 사람도 능가하려 들 것이라 말한다.(72) 이러한 점은 지식과 무지의 특성과 일치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무지한 사람을 능가하고 싶어 할 테지만, 무지한 사람은 자기와 같은 무지한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과 다른 지혜로운 사람도 능가하고 싶어 할 것이라는.(75)


결국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미덕이며, 지혜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반대로 불의는 악덕이자 무지이다.(76)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둘이 서로 상반된 것으로 이야기된다는 점이다. 지혜의 부족이 무지가 아니라 지혜와 무지는 다르다. 마찬가지로 정의와 불의도 서로 다르다. 따라서 이 둘의 차이는 서로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가 제기한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의 답을 내놓고 있다. 왜 불의가 강한가 하는 것에 대해.


"그러니까 불의는 분명 두 가지 힘을 지니고 있네. 불의가 발생한 곳이 도시든 부족이든 군대든 다른 어떤 단체든, 불의는 첫째, 그 단체가 내분과 다툼에 휘말려 서로 협력할 수 없게 만드네. 둘째, 불의는 그 단체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올바른 것을 포함하여 자신과 반대되는 모든 것과 원수가 되게 만드네."(79)


따라서 불의 혹은 무지가 가져오는 결과는 정의 혹은 지혜가 가져오는 결과보다 더 크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대상에 대해서까지 해로움을 미칠 테니까. 그렇다면 정의는 지혜는 어떤 미덕을, 어떤 유익을 가져오는가?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신에게는? 이것이 앞으로 해결되어야 할 질문이다. 


소크라테스와 트라쉬마코스의 대화는 혼에 대한 이야기로 매듭짓는다. 각각의 기관이 가지고 있는 기능들, 저마다의 미덕이 있을 텐데 과연 혼에는 어떤 기능과 미덕이 있을까? 이에 대한 논의는 간결하다. 혼은 삶을 다루는 것이며 나아가 이는 삶을 관리하기 통치하기 기획하기와 같은 부분을 포함한다.(82) 그렇기에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올바른 혼과 올바른 사람은 잘 살겠지만, 불의한 자는 나쁘게 살 것이네."(83) "올바른 사람은 행복하고, 불의한 자는 비참하네." 


그러나 아직 논의되어야 할 것이 많이 남아 있다. "정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한, 정의가 미덕인지 아닌지, 정의를 지닌 사람이 행복한지 아닌지 나로서는 알기가 어렵기 때문일세."(85) 따라서 아직 새롭게 알 게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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