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에세이][마오] 독모독모讀毛讀矛2019-12-23 01:3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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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0년은 기념비적인 해로 기억되어야 한다. 그해 6월 김대중은 평양공항에 내려 김정일을 만났다. 수많은 북한 사람이 김대중을 환영하였고, 김정일이 직접 나와 그를 맞았다. 둘이 손을 맞잡고 눈을 맞추었다. 나는 학교 구내식당에서 TV로 그 장면을 보았다. 마치 SF처럼 낯설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었다. 김일성의 사망 소식을 듣고 전교생이 환호성을 친 것이 불과 몇 년 전이었다. 무찔러야 하는 수괴의 얼굴이 TV에 나타나다니. 적잖은 충격이었다. 


다음 달, 2000년 7월 나는 처음으로 중국 땅을 밟았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모든 것이 낯설었다. 칙칙한 회색과 강렬한 붉은색이 기억에 남는다. 도착 전 창밖으로 붉은 지붕의 회색 건물이 줄지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넓은 시멘트 바닥의 활주로에 내렸더니 붉은 글씨로 새겨진 공항 이름이 우리를 맞았다. 칙칙한 회색만큼 모든 것이 갑갑하게 느겨졌다. 그러나 모든 것이 위험해 보이기도 했다. 새빨간 글씨들 보다 더! 낯선 이국 땅에 온 것이 아닌 것 같았다. 형용할 수 없는 기묘한 느낌이었다.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아니 존재하면 안 되는 곳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외계인을 만나면 이런 기분일까?


약 2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그런 이질감의 정체는 공포에서 출발했던 건 아닐까 질문해보곤 한다. 붉은 땅, 붉은 구호가 덕지덕지 붙은 거리, 오색홍기가 펄럭이는 그 나라는 존재 자체로 불온한 세계였다. 한편 그곳은 야만의 세계이기도 했다. 문명의 화려함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낡았고 더러웠다. 


무사히 생환하는 것이 목표였다. 훗날 내가 중국에 살 거라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중국을 공부하리라는 것도. 돌이켜보면 생각지도 못한 인연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상세한 인연을 이야기하지는 말자. 다만 인연이라는 말처럼 두서가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처음에는 그저 중국어가 재미있었고, 그 호기심이 <논어>로 이어졌다. <논어>에 대한 관심은 사상사에 대한 관심으로, 나중에는 장자와 루쉰에 대한 관심으로, 그리고 2019년에는 마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마오라니! 누군가에게는 불온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지독히도 낡은 인물에 불과할 것이다. 그를 읽는다는 것은 그저 순수한 호기심 그 이상은 아니지 않을까? 그러나 나에게 그는 여전히 꽤 매력적인 인물이다. 몇 달에 걸쳐 꾸역꾸역 읽어낸 몇 권의 책을 곱씹어보아도 그 판단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매력적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몇 개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2.


<중국의 붉은 별>을 쓴 에드가 스노는 무언가에 영혼을 빼앗긴 인물이었다. 그는 소문을 좇아 적도赤都, 중국공산당의 심장부인 옌안延安으로 향한다. 목숨을 건 여행이었다. 옌안은 서쪽 변방에 위치한 까닭에 중간에 어떤 일을 겪을지 예측할 수도 없었다. 들판 한가운데서 소리 소문 없이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공산당과 국민당의 전쟁통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옌안에 모여든 이들은 잔혹하고 무도하여 어떤 범죄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이들이라는. 


황야를 가로질러, 전선을 뚫고 옌안에 간 것은 에드가 스노가 붉은 심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공산당에 대한 열렬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동양의 변방을 탐험하는 최초의 서방 기자라는 자부심도 그를 거기까지 이끈 중요한 동력이었다. 그의 아내 님 웨일즈가 조선의 혁명가 김산을 만나 <아리랑>을 쓴 것도 비슷한 이유였을 것이다. 어쨌든 에드가 스노는 '중국의 붉은 별'을 만났고, 그 만남을 글로 남겼다. 


에드가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을 읽는 것은 매우 즐거운 경험이었다. 활극처럼 펼쳐지는 그의 모험 자체도 매력이었지만 그 속에 그려지는 어떤 생생함이 나를 사로잡았다. 에드가 스노가 본 옌안은 황량하고 척박한 변방의 작은 도시가 아니었다. 기묘한 열정이 숨 쉬는 곳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당시 대장정을 겨우 마치고 옌안에서 세력을 추스르는 중이었다. 어쩌면 사지에 몰린 상황이었지만 에드가 스노는 전혀 그런 모습을 읽지 않았다. 도리어 대장정이라는 승리에 도취된 인간들이, 도래할 혁명에 취한 인간들이 있을 뿐이었다. 작가도 인물들도 모두 붉게 취했고, 아마 그 두꺼운 책을 읽는 독자도 붉은 기운에 살짝 취해버렸는지도. 


어쨌든 에드가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은 기념비적 작품이 되었다. 중국 공산당을 최초로 서방 세계에 소개했기 때문이다. 또한 훗날 중국의 붉은 별 가운데서도 영롱하게 빛나는 가장 붉고 찬란한 별, 마오를 직접 만나 기술했기 때문이다. 에드가 스노의 명확한 편향성, 어쩔 수 없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마오와 만나 남긴 기록은 꽤 중요하다. 그때도 그렇고 그 이후에, 지금까지도 마오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에드가 스노는 저널리스트로서 마오를 만났지만 중국 사상사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마오에 관심을 두기도 했다. 예를 들어, <공자, 인간과 신화>를 쓴 크릴이 있다. 지금도 손꼽히는 명저, <공자, 인간과 신화>(1949)를 쓴 뒤 그는 마오쩌둥에까지 관심을 확장한다. <Chinese Thought from Confucius to Mao Tse-tung>(1953)가 그 결과물이다. 벤자민 슈워츠의 순서는 반대였다. 1951년, 벤자민 슈어츠는 <Chinese Communism and the Rise of Mao>를 쓴다. 약 30년 뒤 <중국고대사상의 세계>라는 명저를 남긴다. 중국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1950년대의 마오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1949년,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는 것이 큰 숙제였다. 



3. 


1949년 10월 1일 마오는 후난 방언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알린다. '동포들 중화인민공화국과 중앙인민정부가 오늘 세워졌습니다!' 당시 이미 마오는 50이 넘었다. 1976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토록 오래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리라는 것을 광장에 모인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또 다른 혁명이 도래하리라는 것도.


필립 쇼트의 <마오쩌둥>을 읽은 것은 특징적인 인물로, 사건적인 인격으로 그에게 주목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공산국가를 수립한 건국 영웅에 그치지 않는다. 중국 혁명을 완성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문화대혁명'이라는 또 다른 혁명에 불씨를 지핀 인물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단순하다. 세계사적 대혼란을 불러일으킨 장본인. 살육과 파괴를 이끈 선동가. 중국 한정으로는 국가 영웅일지 모르겠으나 세계사적으로 보자면 학살자의 명단에 오를만한 인물. 


중국공산당의 유명한 평가를 빌리자. '공칠과삼功七過三', 공적이 열 가운데 일곱이오, 과오가 열 가운데 셋이다. 그러나 아무도 만족하지 않을 성적표이다. 누구는 그의 과오가 십중팔구라 평가할 것이며, 정반대로 그에게 과오를 묻는 것은 지나친 트집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마오 자신도 물론 이 성적표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 그 누구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평가의 어려움, 이는 그를 해석하는 각자의 편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마오쩌둥이라는 인물 자체의 복잡함에서 연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이론가이기도 했지만 전략가이기도 하다. 공산당의 노선 투쟁에서 그는 때로는 이상주의를 때로는 현실주의를 따르는 인물이었다. 아니, 양쪽 모두를 비판하는 인물이었다. 극좌공론주의도 우익기회주의도 모두 비판의 대상이었다. '모순'이야말로 그를 설명하는 적절한 표현일 테다.


필립 쇼트는 본질적으로 모순적이면서도 생존에 특화된 그의 모습을 세밀하게 그려냈다. 그는 언제든 권력을 두고 누구와도 다툴 수 있는 인물이었다. 과거의 혁명 동지는 물론, 가족과도. 그러나 그는 이것이 순수한 권력에 대한 욕구, 탐욕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한다. 마오쩌둥은 늘 혁명 속에 살았던 인물이었고, 그에게는 모든 것이 전장이었다. 정치도 전장의 일부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거점 없는 부대, 그러나 모든 곳을 자신의 근거지로 삼을 수 있는 유동성과 주동성을 지닌 부대. 유격대야 말로 그의 전장과 정치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 아닐까?



4. 


'문화대혁명', 문혁이란 금기어이다. 오늘날 인터넷에서는 중국을 조롱하는 말로 '천안문 사건'을 종종 예로 든다. 삭제된 역사로 천안문 사건을 기억하는 중국의 사상 통제를 비꼬는 것이다. 그렇게 천안문 사건은 끊임없이 소환된다. 그러나 다시 던지는 질문. 과연 사람들의 열망처럼 천안문 사건이 중국을 허물어뜨릴 수 있을까? 나는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이 근본적으로 '혁명'보다는 '개혁'을 위한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천안문 사건의 결말이 달라졌다 해도 국가는 허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과는 조금 다르겠지만 결과적으로 얼마나 크게 다를 것인가 묻는다면 쉬이 답하기 어렵다. 


개혁개방 이후 40년이 지났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변하는 나라가 되었고, 가장 급속한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이루는 나라가 되었다. 그래서 중국을 둘러싼 민주주의의 문제와 이 변화의 양상은 앞으로 여러 해석을 낳을 것이다. 요컨대 이렇게 물어보자는 것이다. 이른바 '민주주의의 부재'는 개혁개방의 변화를 방해하였는가 아니면 가속하였는가? 민주주의가 없었기에 지금의 발전과 변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개혁개방, 중국이 서방과 손잡고 이른바 주자파走資派, 자본주의 노선을 선택하기로 하면서 민중을 배제하기로 한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중국에 도래할 민주주의가 있다면, 그 모습과 과정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문혁은 박제가 되었다. 공칠과삼이라는 고정된 성적표처럼. 문혁은 누구도 평가할 수 없고 평가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비단 중국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중국 밖에서는 삭제해야 할 역사, 언급할 필요도 평가할 필요도 없는 사건으로 치부되곤 한다. 삭제되고 배제된 사건이라 해야겠다. 감당할 수 없는 광기의 시대였기에 그렇다. 국가는 물론, 공산당도, 마오라는 혁명의 우상도. 하여 가장 불온하고 위험한 것이 있다면 바로 문혁의 유산일 것이다. 중국이 무너진다면, 분열과 혼란의 시대가 도래한다면 그것은 문혁과도 같은 또 다른 식의 열정과 광기가 중국을 가로지를 때일 것이다.


개혁개방 20주년을 앞두고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었다. 누군가는 이를 '반환'대신 '이양'이라 평가할 것이다. 돌려준 것이 아니라 넘겨준 것이라고. 아편전쟁 이후 영국이 점령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것이 서구 제국의 침략을 보여준 하나의 사건이라면 '반환'이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까. 반환이건 이양이건 주고받는 대상이라는 것이 홍콩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개혁개방 20년 즈음 홍콩은 하나의 선물이었다면 다시 20년이 지난 지금은 앓는 이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마오는 반제반봉건이 당시 중국의 현실이라 보았다. 제국주의의 침략에 저항해야 하며, 전통의 구습으로부터 탈출해야 한다. 중국도 제국의 얼굴을 가지리라는 것을 그는 생각했을까? 권위주의 정치체제라는 낡은 전통이 면면이 이어지리라는 것을 알았을까? 누군가는 이런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다 생각할 것이다. 마오야 말로 제국의 설계자이며 권력을 손에 쥔 신중국의 새로운 황제 아닌가. 


그런 평가도 옳다. 그러나 그의 본질, '모순'이라는 특성을 생각하면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그는 서방세계를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가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이야기할 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는 해석에 자유로운 인물이었고, 거꾸로 그렇기 때문에 또 다른 혁명의 초상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는 분명 서구의 것과는 다른 민중, 인민을 호출해 내었다. 또한 중국 전통의 민란과는 다른 사건을 만들어 내었다. 그는 누구보다 단호한 전통의 파괴자였으며 또한 철저한 중국인이기도 했다.


마오는 <실천론>에 다음과 같은 부제를 달았다. '论认识和实践的关系—知和行的关系' 인식과 실천의 관계 - 앎과 행동의 관계에 대해 논하다. 마오는 구체적인 인식과 구체적인 실천을 주장했던 인물이었다. 인식은 늘 특수한 현실을 대상으로 삼아야 하며, 실천은 특수한 현실에 적합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허한 담론을 낳을 것이고, 반동적 결과를 낳는 행위에 불과할 것이다. 


중국은 현재도 변화 중이다. 어찌 비단 중국만 그럴까. 세상사 많은 일이 그렇다. 돌이켜 보니 마오를 읽으며 적잖이 변하기도 했다. 지식이 담론을 낳는다는 것, 정당한 행위가 변화를 이끌어 낸다는 것. 나는 그런 말을 믿지 않는다. 적합한 인식과 적합한 실천. 현재와 현실에 적합한 앎과 행동이 필요하다. 말은 그렇게 하나 그 구체적인 내용은 여전히 수수께끼이다. 


마오는 실상 모든 것이 모순이라 말했다. 그러나 모순이기에 동력을 낳는다. 모순이기에 변화가 가능하다. 이 주장만 보면 낡은 변증법적 유물론자에 불과하겠지만 나에게는 그 자체가 모순이었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이는 한마디 말로 포괄할 수 없다는 복잡함의 다른 표현인 동시에, 어떤 예외적 특징을 발견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는 단면으로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그에게서 광기와 폭력을 읽어내는 것도 맞는 말이며, 생성과 변화의 가능성을 읽어내는 것도 맞는 말이다. 그에게 열쇠를 찾을 수 있을까 여부보다 그에게서 찾은 열쇠가 무엇인지가, 어떤 문을 열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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