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에세이][홍루몽] 뭐가 진짜인들2019-12-23 04: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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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적 사유의 특징이라는 게 있다면 평면 위의 세계라고 해야겠다. 저 세계와 이 세계, 천상과 지상, 혹은 이상과 현실로 구분된 세계관이 있다면 중국적 세계관은 오직 하나의 평면만 존재할 뿐이다. 설사 상하의 위계가 있다 하더라도 현재 이 세계를 초월해 따로 독립된 세계란 없다. 하여 세속의 인간이 우연히 천계를 경험하기도 하며, 우연히 지하 저승의 세계로도 굴러 떨어지기도 한다. 당연히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일도 없다. 


옥황상제든 염라대왕이든 하다못해 용왕이든 다 세속의 세계의 권력자를 닮아있다. 이들은 초월적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서유기>의 손오공에 쩔쩔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황제에게 특출 난 능력이 있는 건 아니지 않나. 대요천궁大鬧天宮, 손오공이 그토록 떠들썩하게 천계를 흔들어놓았지만 상제의 권능에 조금도 흠집을 내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록 반란을 일으키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황제는 황제일 뿐이다. 손오공이 천계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용궁을 뒤집어 놓으며, 저승에 가서 명부를 찢어버렸어도 옥황상제는 옥황상제이며, 염라대왕은 염라대왕이고, 용왕은 용왕이다. 


따라서 저 세상으로 훌훌 날아오르는 신선을 꿈꾸는 것이란 다 부질없는 짓에 불과하다. 정양하고, 단약을 먹고, 수행을 한다한들 신선이 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도리어 상승의 욕망을 끊어야만 또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 이 세속의 세계와 무관한 별세계는 어디도 존재하지 않는다. 제천대성齊天大聖이라며 모든 것을 멋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던 손오공도 부처님 손바닥 위에 노닐 뿐이었다. 생사의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해 서천서역으로 긴 여행을 떠나야 했다. 


<홍루몽>은 영험한 돌의 이야기이다. 저 옛날 여와가 하늘을 땜질할 때 돌을 썼는데 그때 돌 하나가 남았단다. 쓸모없는 돌멩이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출신이 남다른 까닭에 이 돌은 새로운 힘을 얻는다. 바로 풍진세상의 인간사를 경험하는 것. 그래서 옥을 물고 태어난 가보옥으로 이 돌멩이는 태어난다. 


그러나 돌이 옥이 되어도 돌은 돌이다. 설사 보배처럼 진귀한 존재라 하지만 돌은 돌이다. 돌멩이가 원숭이가 되어서도 인간사의 번뇌를 끊지 못했던 것처럼 가보옥으로 태어난들 다를 것이 무엇 있겠는가? 다만 차이가 있다면 원숭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야생에 던져졌지만 가보옥은 나라에 으뜸가는 귀족 가문에 태어났다는 점이다. 금수저, 아니 옥수저, 아니 옥돌을 물고 태어난 인물답다.


가보옥에게는 모든 것이 풍족하다. 재물의 부족함을 느껴본 적도 없다. 귀한 집 자식으로 태어나 집안의 권력을 손에 쥔 할머니가 애지중지 하는 바람에 모든 것이 제멋대로이다. 그가 순 망나니였다면 영 다른 글이 되었겠지만 <홍루몽>의 가보옥은 좀 독특한 인물이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그가 여성을 숭배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얼굴에 수염 난 것들은 모두 너저분한 존재라는 자각. 오로지 여성들이야 말로 아름답고 숭고하다는 생각. 게다가 그는 시녀들도 동등하게 사랑한다. 가보옥은 자기 누이는 물론 주변의 시녀까지 살뜰히 아끼는 인물이다. 


이 가보옥을 중심으로 대관원이라는 거대한 저택에서 벌이는 사건이 <홍루몽>이다. 여와가 버린 돌멩이는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 세상을 경험하는 데, 그 주무대가 바로 대관원이다. 따라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 폐쇄된 세상, 대관원의 대저택 안에서 경험하는 인간사를 참된 경험이라 할 수 있을까? 대관원 안의 제한된 경험에 불과할 뿐인데. 진짜 인간사를 경험하려면 돌멩이는 다시 환생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또 생각해보면 무한히 윤회해야만 할 것이다. 모든 인간사를 두루두루 경험하려면 끝이 없으니.


그러나 <홍루몽>을 읽은 독자는 이 가보옥의 일생이 하나의 특수한 인간사에 그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역시 충실한 하나의 인생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뿐이다. 이는 가보옥의 생애가 어떤 보편성을 획득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도리어 보편과 특수라는 구도에서 <홍루몽>이 빗겨 나 있는 까닭이다. 이 이야기는 가보옥이라는 혹은 조설근이라는 <홍루몽> 작가의 고유한 이야기도 아닐뿐더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모두의 이야기도 아니다. 이것은 그저 이야기일 뿐이다. 연대도 지역도 상관없는 이야기.


"가짜가 진짜 되면 진짜 또한 가짜요,  假作眞時眞亦假 

 무가 유가 되면 유 또한 무가 된다.   無爲有處有遷無"


가보옥을 둘러싼 가씨네 집안 이야기가 <홍루몽>의 핵심인데 이때 가씨는 거짓을 의미하는 가假와 음이 같다. 한편 <홍루몽>을 읽다 보면 저 어딘가 가보옥, 가짜 보옥이 아니라 진보옥, 진짜 보옥이라는 인물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렇다면 진짜 이야기로 눈을 돌려야 하나? 그러나 <홍루몽> 세계에서는 중요하지 않다. 가짜가 진짜가 되기도 하고 진짜도 가짜가 되기도 한다. 진짜냐 가짜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모든 것이 진짜이기도 하고 가짜이기도 하다. 진짜 감별사 혹은 가짜 감별사는 <홍루몽>에 전혀 필요하지 않다.


To be, or not to be. 사느냐 죽느냐? 아니,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홍루몽>에 중요한 질문이 아니다. 없음이 있음이 되고, 있음이 없음이 되기도 하지 않는가? 유무有無의 구별은 중요하지 않으며, 무엇이 유이고 무엇이 무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어찌 보면 하나의 역설. 


그러나 이 역설 덕택에 <홍루몽>은 하나의 실제성을 획득한다. 이 이야기가 철저히 가짜라는 까닭에 어디엔가 있을 법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실상 꿈이 그렇지 않나. 꿈이란 실상 허망한 것이다. 그러나 꿈은 힘이 세다. 설사 꿈속에서 꿈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하더라도 꿈은 제 이야기를 계속 끌고 나간다. 꿈에서 깨어 꿈꾸는 것이 가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홍루몽>에는 이야기 속에 드문드문 두 도사가 등장한다. 도사는 이야기 속의 인물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을 어디론가 홀연히 데리고 가버린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자. "나도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고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다오. 그저 잠시 다리를 쉬고 있을 뿐이오." 거듭 강조하지만 그 무책임, 혹은 솔직함이야 말로 <홍루몽> 저자 자신의 말이다. 이야기의 배경과 연대를 저자도 알지 못한다. 저자는 <홍루몽>의 화자이기도 하면서 이야기를 낳은 구체적인 경험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다만 명확히 구별되지 않는다. 다만 재미난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추함과 절름발이. 두 도사의 외모를 보면 이 이야기는 정확히 <장자>를 빌린 것이리라. <장자>에서 깨우침을 얻는 사람의 모습이 그렇다.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버릴 정도로 기이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 불구의 신체를 가지고 있다. 때로는 월형刖刑을 받아 절뚝거리며 등장한다. 결여된 신체, 못난이의 초상, 그리고 알 수 없음. 그렇게 모든 것이 흐리멍텅하며, 초점을 잃고 말아야 큰 깨우침을 얻는다. 


이들을 따라 <홍루몽>의 인물들이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이들이 어디 이세계로 이동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찾을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래서 <홍루몽>의 인물들은 사라진 이들을 찾지 않는다. 사라짐이란 존재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를 가리키는 말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가 <홍루몽> 전반에 걸쳐 있어 재미를 더한다. <홍루몽>은 이야기를 진지하게 끌고 가지 않는다. 진정성 있게 사건을 추적하지도 않는다. 어느 사건에 대한 서술이 어느 정도 무르익으면 이렇게 끝내고 다른 사건으로 넘어간다. '이 이야기는 그만하기로 하자'. 그렇게 <홍루몽>은 세계에 다양한 이야기가 복수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어디서건 사건은 계속 끊임없이 벌어지며, 그런 까닭에 이야기는 하나의 줄기를 가지지 않는다. 물론 <홍루몽>에 기록된 이야기는 개별 사건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 사건 밖에도 어디선가 또 다른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깨치게 된다. 모든 이야기를 다 담을 수 없다. 모든 사건을 샅샅이 알 수 없는 것처럼.


이런 관조적 태도, 혹은 무책임하게 보이는 태도야 말로 <홍루몽>의 가장 큰 매력이다. 저자는 이야기를 늘어놓을 뿐이다. 독자는 저마다 이야기를 읽는다. 흔히 작가를 창조자의 위치에 놓곤 한다. 전능한 능력으로 멋진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이다. 독자는 때로는 작가의 충실한 수용자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작가가 지은 실타래를 풀어내는 것을 자기 의무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홍루몽> 식의 이야기는 좀 다르다. 별도 개별적인 작가의 자리가 없다. 따로 떼어져 있지도 않으며, 감춰져 있지도 않다. 그냥 별로 중요하지 않을 뿐이다. 누구의 이야기인들, 작가 누구인들 뭐가 중요하겠는가? 작가란 그저 이야기 이후에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존재일 뿐이다. 마치 뭐가 진짜인들 중요하지 않듯이. 


가보옥賈寶玉이 진짜 보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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