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푸코] 성의 역사 1: 제3장 발제2019-09-26 13:49:57
작성자
첨부파일성의역사1_제3장 발제.hwp (19.5KB)

성의 역사 13.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

 

고백을 중심으로 대동단결하는 권력과 지식의 의지    

 

서양에서 성을 중요하게 만든 메카니즘을 역사적으로 추적한다

 

푸코는 성 억압가설이 폐기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억압만을 말하기엔 지난 세 세기(17-19C)동안 성에 관한 지식과 담론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잡다한 성 생활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공고화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오히려 억압가설을 확증하는 현상으로, 억압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반응들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의학과 과학은 성 자체보다는 성 영역에서 일어나는 예외적이고 기묘한 현상, 병적 현상에 집중함으로서 성 규범과 질서를 강화하는데 일조했으며, 위생의 문제와 연결시킴으로서 공포를 조장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어느 시대 어떤 사회도 성과 관련된 금지와 규제가 없지 않았다. 또 그러나 그러한 일련의 억압에 대해 서양에서 지난 세 세기 동안 벌어진 것과 같은 방식의 대응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푸코가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은 어째서 서양에서는 이토록 성이 중요한 것이 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그러니까 억압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왜 서양에서는 성에 관한 진실을 막무가내로 생산하는 거대한 장치를 구축시키는 방식으로 나아가게 된 것일까 하는 점. 푸코는 이런 방식을 가능하게 만든 메카니즘을 역사적으로 고찰하고자 했다.

 

스키엔티아 섹수얼리스와 고백의 관계

 

성의 진실을 생산하는 방식에서 동양에서는 아르스 에로티카(성애의 기술)를 중시했던 데 반해 서양에서는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성의 과학)을 수립했다. 아르스 에로티카는 쾌락의 강도, 쾌락의 특별한 속성, 쾌락의 지속기간, 육체와 영혼에 미치는 쾌락의 반향 즉 쾌락 자체에 대한 기술에 관련된 것이다. 이 기술은 비의적 방식으로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전승되며, 이 기술의 효과로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육체의 완벽한 통제, 독특한 기쁨, 시간과 한계의 망각, 장생의 영약, 죽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극복까지 나아간다.

 

서양에서 성의 진실이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로 확립된 데에 푸코는 기독교의 고백의 체제를 중요하게 지적한다. 고백은 종교권력과 세속권력 모두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다. 자신의 행위와 생각을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하는 고백은 권력에 의한 개별화 과정의 핵심이 다. 고백을 통해 고백하는 자는 죄와 자신을 막고 있는 무엇으로부터 해방되는 동시에 사제와 사법 권력에 예속된다. 고백은 권력의 소재를 자기로부터 외부 권력으로 이동시킨다. 자기로부터의 해방은 주체를 만들지만 그 주체는 신민(臣民)적 주체다. 고백의 작업은 주체-신민이라는 작업을 동시에 완수하는 것이다.

 

권력과 지식이 관계 맺으며 발전되어 올 수 있었던 것도 고백의 역할이었다. 고백의 특별한 소재였던 성의 경우, 고백의 관례 아래 성의 담론화와 잡다한 성생활의 산포, 강화가 이루어졌다. 이는 고백 담론이 갖고 있는 특징에 의한 것인데, 고백은 말하는 주체가 언표의 주어와 일치하는 담론의 관례다. 고백은 권력관계 안에서 전개되는 관례, 진실이 표명되기 위해 제거되어야 했던 장애와 저항에 의해 정당성이 입증되는 관례다. 고백은 고백하는 사람의 내부적 변화가 언술 자체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관례다.

 

고백의 담론에 내재하는 권력구조 때문에 고백의 담론은 고백하는 자, 즉 아래로부터 생겨난다. 고백의 담론이 전제하고 있는 은밀성은 고백의 담론이 내보이는 막연한 친숙성이나 전반적이 천박성과 깊은 관계가 있다. 고백의 담론이 갖는 진실은 (스승의 권위나 스승이 전하는 전통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하는 사람과 그가 말하는 내용 사이의 관계, 이 양자가 모두 본질적으로 담론에 귀속한다는 사실에 의해 확보된다.

 

고백-진실-과학 담론 생산의 메커니즘

 

고백은 성에 관한 참된 담론의 생산을 지배하는 일반적 모태였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렇다. 고백은 점차 관례적이고 배타적인 장소를 벗어나 확산되었고 일련의 모든 관계에서, 가령 자녀와 부모, 학생과 교육자, 환자와 정신과 의사, 비행자와 전문가 사이의 관계에서 활용되었다. 고백 절차의 확산, 고백 절차에 따른 속박의 다양한 국지화, 고백 절차가 자리 잡는 영역의 확장, 즉 성적 쾌락에 대한 엄청난 기록이 점차로 이루어졌다. 축적된 자료는 이후 의학, 정신의학, 교육학에 의해 수집되기 시작한다.

 

쾌락의 표본도감이 작성되고, 쾌락의 분류법이 확립되었으며, 일상의 흔해빠진 결함이 병적인 이상이나 증상의 악화로 묘사되었다. 죄와 구원, 죽음과 영원에 관련되었던 담론들이 19세기 정신의학자들에 의해 육체와 생명에 관한 담론, 진실이자 과학인 담론 안에 포섭되었다. 즉 과학-고백, 고백의 관례와 내용에 의존하는 과학, 다양하고 집요한 고백의 강요를 전제로 하고 고백할 수 없는 고백된 것을 대상으로 갖는 과학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고백이라는 오래된 사법적-종교적 모델에 따른 진실의 생산과 과학담론이 어떻게 맞물릴 수 있었을까, 양자 사이에는 넘치도록 많은 간섭이 존재했다. 성과 관련된 지식의 의지가 고백의 관례를 과학적 규칙성의 도식 속에서 작동하게 한 방법을 살펴보자.

 

1) “말하게 하기의 임상적 체계화에 의해: 즉 고백의 과정을 과학적으로 수용 가능한 관찰의 영역을 편입시키기 위한 그만큼 많은 수단이 강구되었다.

2) 확산된 일반적 인과율의 가설에 의해: 19세기 의학은 거의 모든 질병과 장애를 성과 인과관계로 엮어 놓았는데 따라서 성과 관련된 조사(고백)는 더욱 완전하고 꼼꼼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고백은 과학이론에 필수적인 이면이 된 것이다.

3) 성생활에 내재하는 잠복성의 원칙에 의해: 성의 작동방식은 불분명하고, 포착하기 어려우며, 성의 에너지와 메커니즘은 감춰져 있고, 원인으로 여겨지는 성의 영향력 역시 부분적으로 감추어져 있다. 고백하는 자도 모르기는 마찬가지. 따라서 성은 고백하는 자와 질문하는 자가 과학적 실행방법에 의해 함께 끌어내야 하는 것이 되었다.

4) 해석의 방법에 의해: 진실은 고백과 듣는 사람이 그 내용을 해석하는 것으로 완성된다. 19세기는 고백을 증거가 아니라 징후로, 성생활을 해석해야 할 것으로 만듦으로써, 고백의 절차를 과학 담론의 정상적 형성에 작용하도록 만들 가능성을 갖게 되었다.

5) 고백효과의 의학화에 의해: 고백의 획득과 고백의 효과는 치료 활동의 형태로 코드화된다. 고백이 진단에 필요하고 그 자체로 치료에 효과적인 것으로 의사들에 의해 요구된다.

 

서양사회는 오랜 고백의 절차를 과학 담론의 규칙에 맞춤으로써 성에 관한 참된 담론의 생산을 계속했다. 19세기부터 발전한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는 역설적으로 의무적이고 철저한 고해라는 특이한 의례를 핵심으로 간직한다. 고해의 의례는 16세기부터 고해성사로부터 떨어져 나왔고, 영혼의 인도와 영성 지도 쪽으로 이를테면 교육학, 가족관계, 의학과 정신의학 쪽으로 옮겨갔다.

 

이제 서양에서 성 생활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라는 담론 실행 방법과 함께 출현하게 된다. 담론의 고유한 기술, 담론의 작동에 필요한 요소, 담론이 이용하는 책략, 담론의 기반이 되고 담론이 전달하는 권력효과에 상응하는 성 생활만이 존재한다. 결국 성의 역사는 담론의 역사라는 관점에서만 기록될 수 있다.

 

성 담론의 역사는 서양에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두 가지 과정으로 전개되어왔다고 볼 수 있다. 먼저 고백의 과정 즉 심문하고 문제시하는 과정은 성에 대해 진실을 말하라고 요구되는 과정이었다. 다음으로 합리적 영역으로의 통합이라는 과정, 이를 위해 우리는 성에게 요구한다. 우리의 진실을 말하라고. 우리에게는 감추어진 부분이 있다, 성을 통해 드러나는 징후가 우리 자신의 진실을 말해줄 것이다. 이를 위해 철학을 포함한 다방면의 학문이 여기에 몰두했다. 그 결과 주체에 관한 지식은 주체의 존재형태에 관한 것이기보다는 주체를 분할하는, 주체를 주체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 되었다.

 

주체의 과학을 확립하려는 기획은 성을 중심으로 기독교적 고백, 사법적 자백의 오랜 역사, 고백이라는 지식-권력 형태로 이어져 왔다. 주체 안에서의 인과관계, 주체의 무의식, 지식을 손에 쥐고 있는 다른 사람에 의해 결정되는 주체의 진실, 주체 자신이 무엇을 알지 못하는가에 관해 다른 사람이 소유하는 지식, 이 모든 것이 성에 관한 담론 안에서 전개된다. 그러나 결코 성 자체의 어떤 고유한 자연적 속성 때문이 아니라 이 담론에 내재하는 권력의 책략에 따라 그렇게 된 것이다. 성의 역사는 주체의 역사와 맞물린다. 그렇다면 주체의 역사 역시 담론의 역사라는 관점에서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푸코의 꼴레쥬 드 프랑스에서의 마지막 강연록 주체의 해석학은 이런 관점 하에서 말해진 것들이다. 수 세기에 걸쳐 이어져온 고백의 관례와 과학이란 이름하에 집착적으로 연구된 주체에 관한 과학은 주체를 오히려 주체와 분리시켜온 역사다. 따라서 말년의 푸코가 주장한 자기윤리는 자기에 대한 자기의 관계에 간극을 줄이는 것이다. 담론 속에서 구성된 성과 주체는 허구이다. 각자의 성생활이 있을 뿐이고, 인식되고 해석될 필요가 없는 살아가고 있는 자기가 있을 뿐.


지식의 의지-쾌락

 

성을 쾌락의 기술 차원이 아니라 성 지식으로 확립한 서양에서 그렇다면 그들에게 쾌락의 영역은 전무했는가? 푸코는 성에 대한 지식의 의지에 함축되어있는 혹은 지식의 부산물같은 쾌락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 어조는 심히 시니컬하고 조소하는 듯하다.

 

서양에서의 성적 쾌락은 직접적 성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즐거움 즉 쾌락의 진실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 쾌락의 진실을 알고 설명하고 드러내고 알아차리고 황홀해 하고 말하고 쾌락의 진실에 의해 다른 진실을 포착하고 제어하고 쾌락의 진실을 몰래 털어놓고 술책을 써서 쾌락의 진실을 엄폐물 밖으로 끌어내는 즐거움, 쾌락에 관한 참된 담론에 특유한 즐거움이라는 것.(성생활 자체의 관점으로 본다면 이렇게 변태적일 수 없는.)

 

이래서 푸코는 성 억압가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성 자체는 말해진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성은 성적 쾌락이 아니라 다른 특유한 쾌락, 즉 진실을 집착적으로 알고자하는 쾌락을 위해 간판처럼 걸려있었을 뿐이다. 성은 문제가 아니었다. 푸코의 문제의식은 성을 그렇게도 중요하게 만든 메커니즘, 지식의 의지, 이 의지의 쾌락 메커니즘이었다. 지식을 생산하고 담론을 증가시키고 즐거움을 유발하고 권력을 낳는 실증적 메커니즘. 푸코의 작업은 요컨대 지식의 의지에 내재하는 권력의 전략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 다시 말해 성생활이라는 구체적인 사례를 대상으로 지식 의지의 정치경제학을 구성하는 것이다.


댓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