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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포스트휴먼] 포스트휴먼, 인간의 미래를 묻는다2021-09-29 10:5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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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로지 브라이도티_포스트휴먼 1장 발제문 .hwp (100.5KB)

포스트휴먼서문 & 1장 포스트-휴머니즘: 자아 너머 생명

 

휴머니즘은 언제나 인간에게 좋은 사상이며, 인간에 대한 긍정일까? 휴머니즘과 인문학의 대상인 인간은 확고하게 정의된 존재일까? 생물체의 한 종인 인간은 어떻게 휴머니즘이라는 인식의 대상이 되었을까? 우리는 휴머니즘의 전통 안에서, 인간으로 이해되고 있을까? 인간으로 이해된다면 언제부터 인간이었을까? 휴머니즘에 대한 비판은 자명한 휴먼(인간)’이라는 개념에 대한 의심에서부터 시작된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나타나지 않았으며, 휴머니즘 역시 마찬가지다.

 

포스트휴머니즘도 휴머니즘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된다. 휴머니즘의 역사를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면, 그 역사가 무척 길어 보인다. 이 긴 역사는 휴머니즘의 정당성과는 무관하다. 유럽의 르네상스는 자기들 방식으로 휴머니즘을 재발명해냈지만, 그 안에 담긴 이상이 낡았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하기 어렵다. 인간은 휴머니즘의 대상으로 구성되었으며, 구성의 내용은 계속하여 변화되었다. 그러니 본질적인 인간혹은 인간의 본질이란 본질적으로 허구다.

 

휴머니즘을 인간의 고유한 본질적 이상이나 합리성에 대한 믿음으로 본다면, 그 이상이나 믿음은 오히려 차별과 배제의 도구로 기능했다. ‘인간이라는 범주는 언제나 편협했고, 지금도 충분하지는 않다. ‘인간이라는 범주와 휴머니즘이라는 이상은 타자들에게 인식적 폭력의 방식으로 다가간 경우가 많다. 서구의 휴머니즘은 그들의 제국주의적 이상을 부추겼고, 여성과 비서구는 여전히 휴머니즘의 타자이다. 모순은 이 타자에 대한 해방 역시 휴머니즘으로 온다는 데 있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휴머니즘을 양가적 은총’(27)이라고 표현한다. 휴머니즘은 그 복잡한 역사 덕분에 계속해서 생명을 연장한다.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언하고 푸코가 인간의 죽음을 예상한 이래 휴머니즘이 많은 비판과 도전을 받은 일도 사실이다. 68혁명 시기에는 서구의 전통적 휴머니즘과 그 대안으로 등장한 사회주의 휴머니즘 모두가 강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일부 유럽인들은 마침내 휴머니즘적 보편주의가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주체를 해체하고 휴머니즘에 반발하는 68혁명은 인간 본성이라는 허위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을 버리자, 지성사에서 인간은 점점 복잡하고 곤란한 문제가 되어갔다. ‘인간은 어떤 이상도 아니고 통계상의 평균도 아니었다. 오히려 사회적 약속이나 규범에 가까웠다. 인간이 서로 합의하여 보편성을 규정하는 게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이라는 규범이 정상성이라는 잣대로 살아있는 인간 존재를 차별하고 억압하는 상황이었다.

 

인간이라는 규정과 범주가 존재하는 한 기준에 맞지 않는 타자도 계속해서 생산된다. 문제는 휴머니즘에 대한 비판 역시 타자에 대한 휴머니즘적 가치로 지탱된다는 모순에 있다. 반휴머니즘은 이런 역설적 방식으로 휴머니즘을 옹호하게 된다. 휴머니즘을 완전히 버리자는 주장 역시 인간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휴머니즘의 기본 가정에 동의하는 셈이 된다.(44) 휴머니즘과 주체를 해체하자는 인식론적 주장은 타자들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포스트휴머니즘은 근대적 휴머니즘과 반휴머니즘의 대립이 끝난 지점에서 시작된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주체가 해체될 수 있다는 언어적 기반을 불신한다. 로지 브라이도티에게 정치적 행위성은 이론적으로 비판적이거나 대항적일 필요가 없다. 주체성도 자기 스타일을 형성하는 생성의 과정으로 이해된다. 물론 이 과정에는 지배 규범과의 타협이 포함되며, 다양한 설명책임의 형식들도 포함한다. 중요한 점은 우리 존재가 늘 과정 중에 있다는 점이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휴머니즘에 대한 반대를 넘어 자아에 대한 다른 전망을 찾으려고 한다. 들뢰즈에게 영향을 받은 로지 브라이도티에게 자아를 긍정하는 문제는 몹시 중요하다. 휴머니즘을 단순히 부정하거나 계승하려는 입장을 넘어 새로운 인간이나 자아, 주체성에 대한 긍정적 고민이 필요하다. 이제 로지 브라이도티의 논의는 휴머니즘이 아닌 포스트휴머니즘에 대한 논의로 넘어간다. ‘포스트휴먼은 새로운 인간과 자아에 대한 고민을 필요로 한다.

 

세기말의 많은 소설가나 대중문화의 생산자들이 우려했듯이 과학기술에는 휴머니즘적 행위성이 내재해 있지 않다. 로봇이나 인공지능처럼 현재의 인간혹은 생명범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곧 맞닥뜨리게 될 우리는 시급하게 휴머니즘을 넘어선 새로운 주체성을 고민하고 실험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적으로 가장 보수적 입장에 섰던 선진자본주의 옹호자들이 오히려 포스트휴머니즘의 잠재력을 먼저 파악하고 있었다. 서둘러야 할 때다.

 

포스트휴머니즘에는 여러 갈래가 있지만, 로지 브라이도티가 주장하는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은 특히 타자에 의존한다. 타자는 새로운 주체(혹은 비체)이다. 타자들의 저항은 권력의 작동방식을 역동적으로 새롭게 이해하면서 시작된다. 주체는 구조를 이해하는 동시에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며, 자신이 무엇을 행사할 수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억압당하는 동시에 억압하는 존재들이다. 권력에 대한 일방적 증오는 저항이 아닌 미시파시즘으로 연결되기 쉽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타자에게 주체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주체가 자기 자신을 생성하며 비판적으로 정교하게 만든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믿음은 그대로 타자들의 역량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로지 브라이도티도 인정하듯이 이 믿음 역시 휴머니즘에 기반한다. 사실 타자에 대한 믿음이 유럽을 새롭게 하고 사회 정의로 구현되리라는 그의 희망에, 타자로서 나는 회의의 시선을 던진다. 물론 자신을 긍정하면서 새롭게 구성하라는 응원만은 접수할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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