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로자]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상> 1~3장 발제2019-03-25 23:44:07
작성자
첨부파일로자룩셈부르크의 사상 1~3장 발제.hwp (35KB)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상》 1장 ~ 3장

 

1장 로자 룩셈부르크의 간략한 전기

 

1871년 폴란드에서 태어난 로자 룩셈부르크는 16살에 ‘프롤레타리아’라는 혁명적 정당에 가입했다. 1882년 창립된 ‘프롤레타리아’는 러시아의 혁명운동보다 앞섰으며, 큰 규모를 자랑했다. 1886년 지도자들의 처형과 대량투옥 이후에는 활동능력이 축소되어 소규모 그룹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1889년 로자는 경찰의 체포를 피하고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스위스 취리히로 갔다. 2년도 되지 않아 스위스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의 이론적 지도자로 인정받았다. 1894년 ‘프롤레타리아’는 ‘폴란드왕국사회민주당’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이후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왕국사회민주당’이 되었다. 로자는 죽는 날까지 이 당에 속해있었다.

 

1893년 22살의 로자는 폴란드 사회민주당을 대표하여 사회주의인터내셔널에 참가해 폴란드 사회당의 유명지도자들과 논쟁했다. 로자는 폴란드 사회당이 민족주의적이며, 노동자들을 계급투쟁에서 이탈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했다. 폴란드 독립 슬로건을 반대한 로자는 이후에도 많은 비난을 받았다. 당시 국제 노동운동의 중심지였던 독일로 옮겨간 로자는 가장 중요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지에 기고하며, 마르크스주의 권위자들과도 논쟁했다. 당시 독일은 개혁주의(수정주의) 경향과 혁명적 경향으로 나뉘어 개혁주의 경향이 더 우세했다. 개혁주의 경향의 대변자는 엥겔스의 제자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이었다. 한편 칼 카우츠키가 ‘마르크스주의 교황’으로 불렸다는 데서 마르크스주의가 얼마나 교조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는지도 알 수 있다.

 

1899년 프랑스에서는 사회주의자 밀랑이 자본가 정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로자는 이를 관찰하고 분석해 프랑스 노동운동의 전반적 상황과 연립정부 문제를 다루는 뛰어난 글들을 발표했다. 영국의 맥도널드 정부,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 프랑스의 1930년대 민중전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립정부들이 모두 실패함으로서 로자의 연구와 주장이 아직 유효함을 알 수 있다. 1903 ~ 04년에 레닌과 당 문제와 관련한 논쟁을 벌였고, 1904년에는 황제모독죄로 옥살이를 했다. 1차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1905년에 여러 논문과 소책자를 통해 연속혁명 개념을 발전시켰다.

 

로자는 혁명에 대해 생각하고 쓰고 말하는데 만족하지 않았다. 로자의 좌우명은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였다. 1905년 12월 러시아령 폴란드로 밀입국한 로자는 사회민주당 기관지를 비밀리에 인쇄하다 체포되었다. 4개월 후 석방되어 독일로 추방된 후에는 노동자들의 대중파업에 대해 고민하고 이론으로 정교하게 다듬었다. 1907년 제2인터내셔널에 참여해 제국주의 전쟁과 군국주의에 대한 혁명적 태도를 주장했다. 1905년 ~ 10년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와 불화가 깊어졌고, 1910년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 문제를 두고 카우츠키와 완전히 멀어졌다. 이후 독일 사회민주당은 세 경향으로 나뉘었다. 점차 제국주의 경향을 받아들인 개혁주의자들, 의회투쟁방식으로 기울어진 마르크스주의 중간파(카우츠키 중심), 혁명적 경향의 로자가 각각 세 경향을 구성했다.

 

1913년 로자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저작으로 꼽히는 《자본의 축적: 제국주의에 대한 경제적 설명》이 출간되었다. 1914년 로자는 병사들의 반란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법정에서 전쟁과 살상에 관한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1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즉시 수감되지는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애국주의 물결에 휩쓸리고 1914년 8월 4일 전쟁공채 발행을 단체로 찬성했다. 훗날 로자와 같은 날 살해당한 칼 리프크네히트만이 양심에 따라 반대표를 던졌다. 이날 로자는 소수의 사회주의자들과 모여 반전투쟁을 결의했다. ‘스파르타쿠스동맹’의 시작이었다.

 

1917년 2월 러시아에서 전쟁 반대와 제국주의 정부 타도 투쟁이 일어났다. 이에 열광한 로자는 감옥에서 러시아혁명의 교훈을 끌어내고자 노력했다. 1918년 11월 8일 독일혁명으로 로자는 감옥에서 풀려났고 더욱 혁명에 매진했다. 사회민주당 우파 지도자들과 독일제국 장군들은 함께 혁명적 노동계급을 탄압했다. 노동자 수천 명이 학살되고 있는 동안, 1919년 1월 15일 로자도 한 병사에게 맞아 숨을 거뒀다.

 

2장 개혁이냐 혁명이냐

 

로자의 저작 전체는 개혁주의(수정주의)와의 투쟁이라 부를 만하다. 《개혁이냐 혁명이냐》는,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게 아니라 수정하는 것으로 노동운동의 목표를 축소해 버린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에 대한 비판이다. 베른슈타인은 노동운동의 기본성격을 사회혁명이 아닌 ‘민주적 사회주의 개혁’으로 재규정했다. 카르텔과 트러스트, 신용제도가 체제의 무질서를 조정함으로서, 마르크스가 예견한 공황과 불황이 반복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베른슈타인은 중간계급의 생존력과 주식회사를 통한 자본 소유권 분배의 민주화가 사회 모순을 완화한다고 보았다. 사회주의 정당의 목표도 노동계급의 조건 개선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자는 베른슈타인의 견해를 비판하며 신용제도가 자본주의의 위기를 막기는커녕 더 심화시킨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의 모순은 생산력의 무한한 확대경향과 제한된 소비력의 간극 사이에서 온다. 모순을 막으려면 생산력이 줄어들거나, 소비력이 무한히 늘어나야 한다. 신용제도는 일시적으로 모순을 은폐할 뿐이며, 결국에는 자본주의 경제의 불안정을 심화시킨다. 이미 사회주의를 추상적 유토피아로 상정한 베른슈타인에게 노동조합은 자본주의를 약화시키는 무기이다. 반면 로자에게 노동조합은 임금수준에 영향을 주지만, 자본주의 임금법칙을 자리 잡게 하는 도구이다. 노동조합 활동을 ‘시시포스의 노동’에 비유한 로자에게 독일 노동조합 관료들은 분노했다. 노동조합 투쟁이 노동자들의 생활을 보호할 수는 있지만 노동계급의 해방을 대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관료들은 인정할 수 없었다.

 

로자와 베른슈타인은 의회민주주의에 대해서도 입장을 달리 했다. 베른슈타인에게 노동조합이 사회주의를 이룩하는 경제적 수단이었다면, 의회민주주의는 정치적 수단이었다. 의회를 초계급적 제도로 본 것이다. 반면 로자는 ‘국가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를 대표하며, 오늘날 국가는 계급국가’라고 주장한다. 로자에게 의회는 사회주의적 요소가 아니며, 부르주아 계급 국가의 특수한 형태이다. ‘의회주의 방식으로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독일에서 논쟁하고 있던 1899년 6월 프랑스에서 사회주의자들이 포함된 연립정부가 구성되었다. 로자는 이 연립정부가 노동계급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손발을 묶어버렸다고 비판했다. 오히려 혁명은 기회주의자들이 ‘비생산적 반대’라 부르는 반대정책(반자본주의 투쟁)을 통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로자는 부르주아 사회에서 사회민주당이 집권하지 않고 야당의 역할을 해야 하며, 부르주아 국가가 무너진 뒤 집권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로자는 ‘부르주아적 합법성’ 자체를 불신했다. 부르주아 국가에서 폭력과 살인, 약탈은 국가의 법 테두리 안에서 합법적 폭력, 징벌, 병역, 과세로 탈바꿈한다. 법 테두리 안에서 정당화된 부르주아적 합법성은 지배계급이 의무 규범으로 승격시킨 계급 표현의 폭력에 불과하다. ‘부르주아적 합법성’으로서 의회 역시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폭력이 표현된 특수한 사회적 형태이다. 당연히 이 법률적 형식이 자본주의를 대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자본주의의 타도는 혁명적 폭력(부르주아적 합법성을 벗어나는)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로자는 폭력의 사용이 노동계급에게 결정적 수단이며, 혁명은 단지 마음뿐 아니라 몸도 움직일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다고 해도 혁명 시기의 끔찍한 폭력은 로자를 괴롭게 했다. 로자는 희생자들의 피를 보존해야 한다고 말하며 덧붙인다. ‘자유로운 혁명적 에너지와 다양한 인간의 감정이야말로 사회주의의 진정한 활력이다.’ 로자는 인간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희생을 줄이기 위해 개혁을 주장하는 자들에게 로자는 개혁과 혁명이 어떻게 다른지를 분석해 보여준다. 개혁과 혁명은 계급과 계급사회 발전의 서로 다른 요인들이다. 서로 영향을 미치고 보완하는 동시에 서로 배타적이다. 법체계는 모두 혁명의 산물이며, 개혁을 위한 노력은 혁명이 창조한 사회형태의 틀 안에서만 수행된다. 장기간의 개혁이 혁명이 될 수도 없고, 혁명이 개혁의 압축이 될 수도 없다.

 

3장 대중파업과 혁명

 

1891년과 1893년에 벨기에 노동자들이 선거제도 개혁을 요구하며 대중파업을 벌였다. 이 파업에 강한 인상을 받은 로자는 혁명적 성격을 띤 정치적 대중파업이 노동계급의 특별한 무기라고 보게 되었다. 로자가 보는 대중파업은 노동자 권력을 위한 혁명 투쟁의 중심요소였다. 1905년 러시아혁명을 지켜보며 대중파업에 대한 로자의 통찰은 더욱 예리해졌다. 부르주아 혁명에서 부르주아 정당이 혁명 대중에 대한 교육과 지도를 수행했다면, 이제 노동계급은 혁명 과정에서 스스로를 교육·조직·지도해야 한다.

 

로자는 혁명 시기에 경제투쟁이 정치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고,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중요한 정치적 대중행동은 일련의 경제적 대중파업을 야기하며, 정치투쟁이 확산됨에 따라 경제투쟁도 확산되고 조직되며 강화된다. 경제투쟁은 운동을 하나의 정치적 초점에서 다른 초점으로 이어주는 요인이다. 정치투쟁은 주기적으로 경제투쟁의 토양을 비옥하게 만든다. 로자는 1905년 러시아에서 있었던 대중파업에서 경제적 요소와 정치적 요소가 서로 분리되거나 부정되지 않음을 확인했다. 대중파업은 계급의식을 고양시킨다. 봉기의 절정은 불완전한 봉기들의 정점으로서만 실현된다. 노동자들은 오히려 가장 힘겨운 투쟁의 기간에 생계에 대한 걱정을 잊고 혁명적 주도력을 보여주면서, 자신들이 끔찍한 결핍에 얼마나 면역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로자는 혁명 속에서 자신의 신념과 노동자들의 이상이 결합되는 과정을 끝까지 고통스럽게 지켜보았다.

 

댓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
error: 글 복사가 불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