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차이나] 인민의 주체성을 믿습니까?2021-08-24 10:5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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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차이나리터러시_탈정치 시대의 정치_포스트 정당정치.hwp (97.5KB)

탈정치 시대의 정치세계 정치의 대표성 위기와 포스트 정당정치

 

탈정치 시대를 걱정하는 왕후이의 분석이 결론에 이르렀다. 물론 왕후이의 글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엮은 책의 구성상 이 부분이 꼭 분석의 결론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내용의 배치상 결론에 해당하리라고 우리가 짐작하고 기대할 뿐. 그 짐작과 기대에 따라 우리는 탈정치 시대를 분석하는 독특하고 명쾌한 왕후이의 견해만큼 명쾌한 결론도 원했다. 그런데 예상과 다르게 이야기는 좀처럼 끝이 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왜 왕후이는 한 권의 책 내내 반복되어 단물 다 빠진 이야기를 요약하고 종합하고 강조하고 반복하면서 이야기를 끝내지 못하는 것일까? ‘이론 논쟁은 실천에 대한 총결이라는 왕후이의 주장과 어긋나게 왕후이의 논쟁적 통찰이 실천이라는 결론으로 연결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왕후이는 탈정치의 징후를 정당의 대표성 상실로 읽어낸다. 중국혁명에서 공산당을 승리로 이끌었던 계급적 대표성은 정당(공산당)의 국가화와 함께 상실되었다.

 

정당은 계급의 대표성을 상실하고 관료화되었다. 시장화를 거치면서 정당과 자본의 유착도 심해졌다. 일당독재이기 때문이 아니다. 볼셰비키 시절부터 공산당은 유럽의 부르주아 정치를 넘어서는 새로운 정당 모델이었다. 공산당의 이론 논쟁이 사라지면서 정당은 정치와 멀어진 통치기구가 되었다. 이론 논쟁이 활발하던 시대에 벌어졌던 폭력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투쟁과 논쟁의 역할을 부정한다. 이 역시 탈정치화의 산물이다.

 

탈정치화의 해답은 재정치화이다. 탈정치화가 정당의 대표성 상실과 정치에 대한 수동적 참여로 나타난다면, 재정치화는 정당이 대표성을 찾고 정치가 활력을 되찾는 현상으로 이해된다. 왕후이는 다시 인민을 불러온다. 중국에서 공산당의 승리와 초기의 정치적 활력을 가능하게 했던 지점을 왕후이는 군중노선에서 찾는다. 군중노선은 다른 나라의 정당과 구별되는 중국 정치의 특수성으로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군중은 인민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소환된다.

 

왕후이는 공산당의 정치적 대표성을 가능하게 할 집단으로 인민을 꼽는다. 왕후이에게 대표성은 보편성으로 이해된다. 그는 국가를 공리적 입장에서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정당의 대표성 상실은 노동자 집단의 이익을 반영하지 못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물론 여기서 왕후이가 말하는 노동자 집단의 이익은 무척 모호하다. 미디어가 공공의 주장을 대변한다는 믿음이 순진한 믿음이듯 노동자 집단의 이익을 누군가 대변한다는 주장도 순진한 믿음이다.

 

인민은 태생부터가 정치적인 집단이다. 정치가 끊임없는 과정으로 이해된다면, 정치는 정치의 주체로서 어떤 집단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인민 역시 이 과정에서 역동적으로 소환되고 재구성된다. 문제는 이 인민의 정치적 주체성에 대한 믿음이다. 마오 시대의 하방 정책에 우호적인 왕후이조차 인민에게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명확하게 말하지 못한다. 인민을 정치적 주체로 소환하는 과정에서조차 왕후이의 말은 지식인들을 향할 뿐이다.

 

이미 정치와 자본이 깊숙이 결합되었다면, 인민과 자본 역시 강하게 결합되었다. 노동자의 임금이 높아지고 생활 수준이 개선된다면 혁명이 필요 없으리라던, 독일 사민당 베른슈타인의 말이 오히려 현실에 더 와 닿을 지경이다. 정치가 활력을 얻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이론 논쟁과 인민의 참여가 필요하지만, 인민은 과연 이를 원하는가. 물론 이를 원하지 않는 인민의 문제 역시 왕후이의 지적대로 탈정치의 결과로 읽어낼 여지는 충분하다.

 

문제는 계몽이라는 여과장치 없이, 인민을 다시 정치적 주체로 세우겠다는 또 다른 대상화의 이데올로기적 야심 없이 어떻게 재정치화를 꾀할 것인가 하는 데 있다. 대표성을 상실한 중국 정치에 대한 왕후이의 개탄은 어떻게 정치인들에게만 적용되는가. 어쩌면 전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인민의 무관심은 탈정치화의 결과만은 아니다. 인민은 수동적으로 정치에 무관심해지지 않았고, 능동적으로 정치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적극적으로 탈정치화를 이끈 인민이라는 전제에서 다시 논의를 시작하자. 인민의 정치적 주체성을 믿는다면, 그 정도 수고는 감수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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