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마오] 중국의 붉은 별 5~7부 발제2019-01-23 09: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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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다과회가 아니다

  

《중국의 붉은 별》 5부 대장정 ~ 7부 전선으로 가는 길에

 

5부 대장정

 

홍군의 지지기반은 농민들이었고, 이유는 분명했다. 홍군이 가는 곳마다 토지를 재분배하고 조세가 경감되었으며, 협동조합과 같은 집단적 기업이 설립되어 경제활동을 도왔다. 실업, 아편중독, 매춘, 미성년 노예 제도, 강제결혼이 사라졌다. 빈농의 생활은 크게 개선되었고, 대중의 교육과 문화수준도 향상되었다. 마오쩌둥은 “혁명은 다과회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곳곳에서 지주와 계급의 적들을 대상으로 적색 테러가 일어났다. 에드거 스노는 이 적색 테러들에 대해 언급하기보다 1934년 홍군의 총퇴각과 대장정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대장정은 1934년 10월 16일 시작되어, 1935년 10월 20일에 마무리되었다.

 

장제스는 제5차 초공전에 90만의 병력을 동원하고, 가능한 모든 병기와 자원들을 쏟아 부었다. 도로망이 봉쇄되자 연료와 식량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1934년 10월 16일 장시에서의 퇴각이 신속하게 결정되고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장시에 남은 농민들은 국민당의 복귀가 지주의 복귀임을 알고 있었으며, 죽을 각오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국민당 기관지는 국민당이 장시 소비에트를 탈환하는 과정에서 1백만 명이 살해되었거나 굶어죽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퇴각하면서도 홍군은 계속 싸웠고, 전위대가 봉쇄된 길을 뚫었다. 성별과 연령, 공산주의자와 비공산주의자를 가리지 않고 홍구의 농민들이 계속하여 행군에 가담했다. 후방에서는 2만의 부상병과 6천 명의 건강한 정규군이 목숨을 걸고 싸워 장제스 군대의 추적 속도를 떨어트렸다.

 

약 1년 간 주력부대의 평균 행군 거리만 96,000킬로미터에 달했다. 차량통행이 불가능한 세계에서 가장 험난한 길의 일부, 눈 덮인 고산지대, 유명한 대하를 보잘 것 없는 장비와 무기로 가로지른 홍군들은 어느새 대서사시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신이나 죽음도 그들에게 패배를 말할 수 없었다. 장제스 군대는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는 홍군의 움직임을 거의 예측할 수 없었다. 실제로 홍군의 노선은 여러 번 신속하게 변경되었다. 대량수송으로 인해 기동력이 떨어져 구이저우 성에서 발이 묶이게 되었을 때, 홍군은 남쪽으로 급선회하여 윈난성으로 돌입했다. 다시 쓰촨성으로 넘어가 다두허를 건널 때는 호전적인 독립국의 도움을 받았다. 이때 공산당은 소수민족이 중국(장제스) 군대에 가지는 분노를 이용하고, 소수민족에게 자치권을 부여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목숨을 걸고 다두허를 건너는 홍군 부대는 가히 미친 사람들로 보였고, 달아나던 쓰촨의 백군 병사들은 돌아와 홍군에 가담하기도 했다. 대부분이 농민 출신이었던 이 병사들은 사실 서로를 죽일 이유가 크게 없었는지도 모른다.

 

다두허를 건넌 뒤에도 홍군은 대설산과 대초원을 지나며 여정을 계속했다. 행군 중에도 홍군은 농민들을 무장시켜 유격대를 조직하고 정규군을 남겨두어 적을 괴롭혔다. 농민들도 지방 군벌들도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잘 몰랐으며, 소비에트를 사람 이름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농민들은 홍군을 해방군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유목민족들은 홍군을 반기지 않았다. 쓰촨에서 둘로 갈라진 홍군의 일부는 적대감과 굶주림 속에서 대초원을 행군했다. 행군은 이미 전략적 후퇴가 아닌 항일전선으로의 진군으로 의미가 변해 있었다. 선전 효과가 큰 찬란한 정치전술은 행군을 영웅적 장정의 성공적 귀결로 이끌었다.

 

6부 서북방의 붉은 별

23세의 젊은 미국인 에드거 스노가 중국에 처음 와서 본 서북방의 대기근은 큰 충격이었다. 농민들의 무기력함과 무저항 역시 충격의 일부였다. 스스로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선전여행’이라 평한 대장정을 접하면서 에드거 스노는 중국 농민들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된다. 중국 농민 역시 지도력과 무기가 있다면 싸울 것이며, 중국에서 ‘공산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고. 서북방의 야만적인 수탈과 농민들의 비참함은 혁명이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조건이었다. 혁명은 타도해야 할 것이 있을 때 나타난다.

 

에드거 스노가 본 이들의 공산주의는 마르크스주의라기보다는 ‘농촌평등주의’에 가까웠다. 기계공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물적 조건의 한계 때문이었다. 홍군의 존재는 ‘공업화’가 중국에 미친 충격의 산물이었다. 중국의 공산주의는 외국 조계지의 산업기지에서 기초를 마련했다.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토지 분배를 혁명 완수로 여기지 않았다. 토지 분배는 민중적 기초를 만들고 사회주의적 변화를 실현시키기 위한 투쟁의 한 단계에 불과했다. ‘노동자·농민’을 대상으로 하는 소비에트 정부를 지향하였으나, 현실은 농민 중심이었다. 제약조건에도 불구하고 각 촌락에서는 상향식의 대의제 구조가 구성되었다. 가족 이외의 모든 조직과 규율을 혐오한다고 알려진 중국인들도 공산당의 조직이나 사회활동을 싫어하지 않았다. 불만이 없지는 않았지만, 농민들 대부분이 소비에트를 ‘우리 정부’라고 불렀다. 중국 공산당의 기본정책이 토지 재분배였기 때문이다.

 

공산당이 정의한 지주는 타인에게 임대해 준 토지에서 자기 수입의 더 큰 몫을 벌어들이는 자였다. 공업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 중국에서는 지주와 고리대금업자, 토호들이 부르주아 취급을 받았던 것 같다. 소비에트는 토지 재분배를 농민들의 ‘가장 긴박한 요구’로 보았지만. 토지 소유의 ‘평등화’에 대한 시도는 없었다. 소비에트의 법 중에서 눈여겨 볼만한 것으로 혼인법을 들 수 있다. 시부모 횡포와 여성 매매 금지, 법정 결혼가능 연령 명시, 지참금제도 금지라는 과격한 법이었다. 홍군 장병 부부가 아니라면 이혼도 일방의 요구로 가능했고, 재산을 똑같이 분할하거나 자녀 양육 책임도 분담했다. ‘보편적·무료’를 표방하는 교육제도도 존재했다. 공산당의 이념교육은 문해교육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문자 해독이 가능해지면 곧 공산주의의 기본 투쟁이념도 파악하게 되었다.

 

소비에트 경제는 홍군에게 식량과 장비를 공급하고 빈농을 구제한다는 두 가지 과제를 주요기능으로 삼았다. 개인자본주의와 국가자본주의, 원시자본주의가 기이하게 혼합된 형태로 개인기업이 장려되는 동시에 토지 거래에 제한을 두면서, 전매를 하지 않는 국가기업이 존재했다. 산업이 원시적 규모에서 운영되기 때문에 가능했고, 오히려 각 기업들이 서로 상호보완의 역할을 했다. ‘개인자본주의에 저항하고 새로운 경제체제를 발전시키기 위한 도구’로 협동조합도 장려되었다. 백구와의 밀무역이 계속되었고, 소비에트 화폐도 발행되었다. 대외무역 적자는 극심했고, 대중에게 과세하지 않는 소비에트 정부의 재정은 몹시 열악했다. 사실상 약탈행위인 몰수가 홍군의 최대 수입원이었다. 소비에트의 관리들은 아주 적은 임금으로 이 시기를 버티고 있었다.

 

7부 전선으로 가는 길에

 

에드거 스노는 간쑤성 국경으로 이동하면서 농민들의 마을을 지났다. 공산당원으로서의 자부심을 은연중에 내비치는 농민들에게 나름의 환대를 받으면서, 홍군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농민들은 불만과 비판을 내비쳤으나, 곧 이전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이 나아졌다는 데 동의했다. 그들은 자진해서 자식들을 홍군에 보냈으며, 다시 백군이 진격해온다면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온도차는 존재했다. 차이는 빈부보다 연령에서 왔다. 청나라 말기에 태어났음이 분명한 가난한 노인은 빈민회 회장을 맡고 있으면서도, 아편을 구하고 싶어 했다. 젊은이들은 노인을 경멸하며 홍군이 바꾸어준 삶을 찬양했다. 홍군의 이념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였다.

 

바오안 서북쪽에는 ‘공업 중심지’ 우치전이 있었다. 과거에는 전기의 존재도 모르는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었다. 공산당은 장시에서 공장을 번창시켰던 경험을 살려 서북부의 공업을 살려보려 노력했다. 산업은 아직 수공업 수준이었고 전력이나 기계설비도 부족했지만, 모인 인력들은 중국 내 최고급이었다. 여성들은 공장 내에서 임금차별을 받지 않았고, 소비에트 지구들에서 노동자는 다른 사람보다 경제적 우대를 받았다. 숙식 제공, 무료 의료혜택과 상해보장, 산 전·후 4개월 유급휴가, 탁아소가 운영되었으며 양육수당도 있었다. 1일 8시간, 1주 6일 노동제가 3교대로 실시되었다. 공산주의 이상향에서는 멀었지만, 궁핍한 소비에트에서 이 조건들이 실현되고 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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