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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차이나] 만주국, 민족을 추구하는 국가의 스토리2021-06-08 08:4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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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과 순수성2장 만주국

 

만주국의 성립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만주라는 지역의 역사를 조망해볼 필요가 있다. 만주는 중국 내륙을 마지막으로 지배한 청 황제들의 본향이었다. 이 지역은 오랫동안 중국 내륙과 문화적으로 다른 정체성을 가졌고, 청 왕조의 경우처럼 내륙 지배를 위한 발판 역할을 했다. 청의 황제들도 만주를 여전히 내륙과 분리된 영토로 여겼다. 만주에 대한 황제의 통제는 점점 약해졌고, 여러 민족이 섞이면서 다양성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이 지역의 풍부한 자원은 중국 내륙을 지배하는 데 중요했고, 변경으로서의 중요성도 강화되었다.

 

1890년에서 1942년 사이에는 약 8백만 명이 만주로 이주하였다. 초기에는 한족의 이민을 막았던 청 조정에서도 점차 제한을 완화하였다. 이 지역을 넘보는 러시아와 일본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한족 이민이 늘어나면서 만주는 중국 북부의 촌락처럼 변해갔다. 만주의 촌락들은 내륙보다 인구가 희박하고 규모가 작아서 현 소재지에 집중되었다. 인구가 소재지에 집중되면서 촌락에 대한 정부의 통제력도 커졌다. 권력은 점점 집중화되는 경향을 보였고, 이런 상황은 군벌 체제가 만주국 정부로 이어지는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1895년 청일전쟁과 1904~5년 러일전쟁, 1910년 일본의 조선 합병 후 만주의 정치적 상황은 더 급박해졌다. 러일전쟁 이후 포츠머스 조약은 이론상 만주에서 청의 주권을 허용하였으나, 이때부터 일본은 러시아를 대체하여 이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만주는 본토의 난징이나 베이징보다 더 근대적인 도시가 되었고, 일본과 중국 본토의 이권도 증대되었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내륙 진출을 위한 발판이었던 만주를 포기할 수 없었고, 이 점이 오히려 러시아와 일본에는 만주가 일종의 개척지로 보이도록 만들었다.

 

만주는 일종의 분쟁적 변방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 책의 저자 프래신짓트 두아라는 변방이 전근대의 개척지나 근대 국민국가의 경계와는 다르다고 설명한다. 변방은 외세의 줄다리기 속에서 불분명한 경계가 되는 역사적 공간이었다. 만주의 최고 군벌이었던 장쭤린을 비롯한 많은 인물이 이 줄다리기에 가담했다. 일본은 만주를 장악하기 위해 지역의 인물이 필요했고, 장쭤린은 중국 내륙 군벌들과 경쟁하기 위해 일본의 도움이 필요했다. 1911년 신해혁명 등으로 급속히 이루어진 만주의 자치가 이루어지는 상황을 일본은 반겼다.

 

장쭤린의 베이징 점유가 실패하자, 곧 일본은 그를 제거했다. 장쭤린이 황제가 되고 싶은 왕조주의자였다면, 그의 아들 장쉐량은 내셔녈리즘에 더 가까웠다. 아버지가 죽은 뒤 장쉐량은 일본에 적대하며 국민당 정부와 손을 잡았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931918일 관동군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하고, 19323월 만주국을 건국했다. 만주국은 국제연맹이 평화적으로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가에 대한 첫 시험대였다. 일본의 팽창주의에 제동을 걸긴 했지만, 이 과정에서 국제연맹은 수많은 문제와 한계들을 드러냈다.

 

국제연맹은 진정 내셔널리즘의 이익을 대변했는가? 아니면 제국주의 파워들의 위장도구였는가? 근대 영토국가의 팽창적 충동으로 형성된 내셔널리즘 자체의 한계들을 지적했는가?’ 저자는 제1차 세계대전이 낳은 인류 반성의 유산 국제연맹에 이런 문제들을 제기한다. 또한 만주국 역시 비슷한 문제들을 제기한다고 지적한다. 영국은 국제연맹에 반대했고, 미국은 불참했으며, 일본은 자기들 입장이 관철되지 않자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국제연맹은 만주를 재구성하라고 요구했으나, 이 요구는 새로운 갈등과 분쟁을 낳았다.

 

국제연맹과 일본, 중국이 만주국을 둘러싸고 벌인 논쟁들에는 국가와 민족, 주권 등에 대한 논의가 포함된다. 국가와 민족, 주권은 엄밀한 개념이 아니었고, 전쟁과 영토에 대한 분쟁 속에서 만들어졌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 중국이 논거로 유구한 역사를 내세우지 않았다는 점이다. 중국은 자신들이 근대적 국가로 국가와 민족, 주권을 성립해가고 있는 과정임을 강조했다. 법적 해석이나 국제법, 국제적 선례가 근거로 제시되었다. 중국이 영토적 범위의 근거를 역사 속에서 재구성하기 시작한 일은 더 최근의 일이다.

 

중국이 역사 안으로 만주를 끌어들이는 일은 중국 주권을 거부하는 일본과 적대하는 맥락 속에서 나타났다. 저자는 이런 현상에 대해 침략당한 사람들을 지키자고 환기하는 정통의 내셔널리즘이 무조건적 충성을 요구하는 어떤 본질주의 - 다른 역사들을 의도적으로 망각하면서, 동시에 동질적, 배타적, 위계적인, 그리고 방어와 침략을 구분할 수 없는 로 전환되지 않을까라고 묻는다. 민족적 충성심은 역사적 조작을 통해 만들어진다. 이 민족적 충성심은 외부의 침략에 자극받아 생겨나며, 민족 자체도 비슷한 방식으로 재구성된다.

 

만주국을 흔히 말하듯 괴뢰국이라 부르면 만주국의 새로운 제도적 장치들을 포착하기 어렵다. 만주국은 통치성을 강조하는 비교적 근대적인 국가형식에 속한다. 전근대 국가들이나 19세기 식민국가들과도 달랐다. 관동군을 중심으로 하기에 군사적으로는 파시스트였으나, 파시즘의 동질화에는 반대하여 다문화적 성격을 보였다. 반제국주의 내셔널리즘의 수사를 고안하고 전개하였으며, 일본 학자들을 중심으로 유토피아적 이상을 구현하려 하기도 했다. 만주국은 흔한 식민지 군사국가가 아니라, 형식적으로나마 주권적이며 문민적인 국민국가였다.

 

일본이 국제연맹을 탈퇴한 뒤에도 만주국이 독립국으로 남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만주국은 분명히 일본의 기존 식민지 통치 관행에서 벗어나 있었다. 당시 일본의 아시아주의는 만주의 전략적 자립체와 경제적 블록같은 아이디어들로 연결되었다. 서양 제국주의와 차이를 두기 위해 아시아 민족들의 공식적 평등이라는 수사가 동원되었다. 물론 이 평등에는 일본인의 우월함이나 아시아가 일본의 영도를 수용할 필요가 전제되어 있었다. 만주는 일본의 혁신 관료들이 자국에서 실현하지 못하는 낭만이나 이상을 펼칠 기회를 얻는 공간이었다.

 

일본은 만주국을 통해 잔인한 폭력과 수탈의 역사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근대적 발전국가의 기록도 함께 남겼다. 만주의 통치성은 꼼꼼한 인구조사와 토지계획, 보건의료, 교육, 상수도, 피난처 건설, 강제 접종 등으로 나타났다. 이런 통치성은 양차 세계대전 사이 모든 비민주적 체제들에서 나타났으며, 중국의 국민당도 이를 모방하려 했다. 저자는 만주국 통치성의 특징을 국가형식과 파시스트 체제의 특별한 조합으로 설명한다. 1차 세계대전 이후 통치성은 주권의 요구와 함께 민족 담론 속에서 주로 나타났다.

 

저자는 만주국의 스토리를 민족을 추구하는 국가의 스토리로 본다. 국가는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근대성을 수행한다. 통치성의 형식에서 국가권력이 특징이 드러난다. 제임스 홀스턴이 말하는 대로 사람들을 모으는 예언자처럼 근대국가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민족과 그들이 나중에 속하게 될 정치체를 창조한다. 그리고 예언자처럼 종종 상상의 대안적 미래를 만들고, 그것에 맞는 새 주체들과 정체성의 외양을 만들 능력을 보여주는 공공사업을 통해 이런 발명을 해낸다.’ 만주국은 독특한 맥락에서 동아시아적 근대가 전개된 공간이었다.

 

서구 제국주의의 희생자라는 자의식은 일본의 아시아주의를 부채질했고, 일본의 침략은 조선이나 중국의 내셔널리즘을 강화했다. 1919년 조선의 반제국주의 운동인 31운동의 내셔널리즘은 일본의 팽창주의를 재고하도록 만들었다. 내셔널리즘은 다시 내셔널리즘의 역풍으로 이어졌고, 만주국은 그 틈바구니에서 새로운 근대국가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 형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날 패권국의 지배를 받는 우방 약소국이나 위성국 현상의 전조에 가깝다. 만주국을 통해 우리는 민족과 국가의 관계를 다시 본다. 민족이 국가의 기초라면, 국가는 민족을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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