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겉핥기 중국철학사] 2강 일치일란 변화무쌍2019-12-26 19: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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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자료를 나눕니다.


1강: 기린은 사라지나 봉황은 날아오르고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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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를 새로 시작하자


시대가 인물을 낳는다는 말도 있고, 반대로 인물이 시대를 만들어 낸다는 말도 있다. 진왕 영정을 이야기한다면 정확히 후자의 말이 맞을 것이다. 


사마천은 그의 어머니가 여불위의 무희였다 전한다. 여불위는 당시 조나라에 볼모로 와 있던 자초를 진나라의 왕으로 만들겠다며 자신의 재산 태반을 쏟아붓는다. 자초는 여불위의 집에서 술을 마시며 여흥을 즐기다 한 무희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이에 여불위에게 그 무희를 달라고 조르는데, 그가 나중에 영정의 어머니가 된다. 사마천은 <여불위열전>에서 그때 임신한 상태로 자초의 아내가 되었다 말한다. 그러니까 영정의 진짜 아버지는 여불위인 셈.


실상을 알 수는 없는 일이지만 이 이야기는 후대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훗날 진시황이 되는 그가 저런 출생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니. 한편 이는 영정이 어린 나이에 왕에 올라 숱한 정적을 해치우고 정점에 오르는 과정을 극적으로 묘사하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영정이 해치워야 했던 정적 가운데는, 그의 어머니와 어머니의 정부情夫로 노애, 그리고 당시 상국相國의 지위에 올라 권력의 최정점에 있던 여불위도 있었다. 전설을 따르면 그는 어머니, 아버지를 해치우고 진나라의 권력을 손에 넣고, 나아가 유일무이한 제국의 통치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반역의 통치자가 되어 버린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영정이 진왕이 되었을 때 진나라에는 여러 나라에서 몰려든 인물이 많았단다. 그중에는 진나라에서 성공해보겠다고 찾아온 이도 있었지만 첩자로 진나라 궁궐에 흘러들어온 자도 있었다. 정국이라는 자도 그렇게 진나라에 들어온 사람이었는데, 쓸모없이 대규모 운하를 파서(!) 국력을 소진토록 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단다. 다행히 그의 계책이 발각되어 쓸모없이 국력을 낭비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이 일로 진왕은 노하여 축객령逐客令, 즉 다른 나라 출신들을 모두 내쫓는 정책을 펼치는데 이때 진나라에서 쫓겨날 처지가 되었던 이사는 이런 글을 진왕에게 올린다.


"태산은 흙덩이를 마다하지 않아 그렇게 클 수 있습니다. 하해河海는 물줄기를 가리지 않아 그렇게 깊을 수 있습니다. 왕 노릇 하는 자는 뭇 백성들을 내치지 않아야 그 덕을 떨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면 사방의 구분이 없어지며 나라의 구별이 없으니, 계절의 운행이 아름답고 귀신이 복을 내립니다. 이것이 오제와 삼왕이 천하의 통치자가 될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太山不讓土壤,故能成其大;河海不擇細流,故能就其深;王者不卻眾庶,故能明其德。是以地無四方,民無異國,四時充美,鬼神降福,此五帝、三王之所以無敵也。)"


진시황은 이 글을 보고 축객령을 취소하였으며 이사를 자신의 곁에 두었다 한다. 태산이나 하해와 같으려면 어떠해야 하는가? 나라를 따지지 말아야 하며, 출신을 묻지 말아야 한다. 위대한 포용력을 가질 것. 새로 태어날 나라는 이 포용력을 바탕으로 한 나라여야 한다. 주나라가가 주왕실을 중심으로 한 커다란 가족이었다는 점을 기억하자. 이사의 비전에는 혈연이 없다. 천하를 구성하는 이름 모를 구성원들만 있을 뿐이다. 주나라의 낡은 체제가 천하'국가國家'를 중시했다면 새로운 통일국가는 '천하天下'국가를 중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저 모든 것을 수용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사가 말하는 것은 관계의 기술이 아니라 권력의 기술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목표를 잊지 말아야 한다. '成其大', 크게 이룩하고자 하는 것이 목표이다. 효과, 성과, 업적 등을 의미하는 '成'이라는 글자는 <노자>에서도 숱하게 등장한다. <노자>가 던지는 메시지는 보다 복잡하다. 


"끝내 스스로 크다고 하지 말아야 크게 이룰 수 있다. (以其終不自為大,故能成其大。)", "이런 까닭에 성인은 끝내 스스로 크다고 하지 않았기에 크게 이룰 수 있었다. (是以聖人終不為大,故能成其大。)" <노자>가 던지는 지혜는 진왕에게 크게 와 닿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너무 자신만만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궁궐의 암투속에 승리자가 되었다. 정적을 제거하고 탄탄한 권력의 기반을 닦았다. 한편 전국시대의 나머지 여섯 나라를 차례로 정벌하여 일통천하一統天下를 이루었다. 진왕이 보기에 이것은 단순히 커다란 업적을 세운데 그치지 않는다. 유래없는, 어떻게 가늠할 수 없는 업적을 세운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


중국의 역사는 임금이 세상을 떠난 뒤, 그를 부를 이름을 정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진왕이 보기에 이는 부당한 일이었다. 어찌 아들이 아비를, 신하가 임금을 평가한다는 말인가? 이에 그는 자신을 부를 이름을 새로 지었다. 왕王이라는 낡은 호칭 대신 황제皇帝라는 새로운 이름을 만들었다. 고대의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각기 호칭을 따 새로 만들었다. 그리고 시호를 붙이는 관습을 없애고 자신을 처음 황제, 시황제始皇帝로 시작하여 만세萬世까지 이르고자 하였다. 


그는 정말 자신으로부터 새로운 시대가 시작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역사가 어떻든 과거는 과거의 것으로 내버려 두고 지금 다시 시작하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시황제는 그 웅대한 꿈을 보여주는 호칭이었다. 자신으로부터 새로운 역사가 시작한다는 선언. 차후 유가儒家가 그를 그토록 미워한 것도 이 이유 때문이었을 테다. 진시황에게 전통이란 과거의 것에 불과했다. 현재에 걸맞은 이름과 제도를 만들 것. 이렇게 두 정신은 날카롭게 충돌할 수밖에 없다. 유래와 근본을 따지는 이들에게 진시황과 같은 존재는 엄청난 해악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어쨌든 진시황의 꿈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제국은 진시황의 죽음과 함께 무너진다. 그를 이어 이세二世황제가 자리에 오르나 그는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나라를 보고 유가는 허약한 근본 때문이라며 손가락질했을 테다. 그러나 <노자>를 애독하는 독자라면 너무 성급했기 때문이라 말할 것이다. "큰 도구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大器晚成)" 커다란 제국을 다스릴 방법이 채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이 진나라의 약점이었다. 비전은 있으나 수단이 없었다. 


진시황은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후 여러 차례 황궁을 비운다. 각 지역에 가서 자신의 위세를 내보이며, 현장을 관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노자>는 말한다. 통치자는 직접 움직이지 않고도 천하의 일을 알아야 하며, 일일이 직접 보지 않고도 명령을 내려야 한다고. 그렇게 몸소 행동하지 않아도 천하의 일이 돌아가야 한다.(聖人不行而知,不見而名,不為而成。)"



2. 황제 곁에는 누가 있어야 하는가?


통념의 역사가 진시황을 불경한 인물로, 즉 부모는 물론 전통도 싸그리 무시하는 인물로 그린다면, 이사는 권력에 눈먼 인간으로 그린다. 이사가 자신의 친구였던 한비자를 죽인 이야기는 유명하다. 진왕은 한비자의 재능을 알고 한비자를 자기 곁에 두고자 했단다. 이를 걱정한 이사가 일찍 손을 써 그를 옥중에 죽게 했다는 이야기. 그러나 몇 발짝 떨어져 보면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숱하게 반복되는 일에 불과하다. 지금이라고 별반 다르겠는가?

이사에 대한 이런 인상은 뒤에 벌어질 사건 때문이 큰 것 같다. 진시황이 평원에서 세상을 떠나자 이사는 환관 조고와 함께 진시황의 유언을 조작하기로 한다. 맏아들이 아닌 막내 호해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했다는. 이들은 이를 위해 수도 함양으로 돌아올 때까지 진시황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 먼 길을 오는 동안 진시황의 시체가 썩는 냄새를 막기 위해 수레에 생선을 가득 실었다 한다. 

이후 전해지는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는 환관의 꾀임에 넘어가 미혹에 빠지고 마는 군주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익을 탐하는 자에게 둘러싸여 아무런 힘이 없는 황제의 모습. 전하는 이야기는 주변 인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야기한다. 늘 그렇듯 나라가 어지러운 것은 현신賢臣, 능력과 덕을 갖춘 신하가 없기 때문이다. 능력과 덕 가운데 더 중요한 게 있다면 덕을 꼽을 수밖에 없다. 적어도 익숙한 해석에 따르면. 

그러나 거꾸로 진시황의 황망한 죽음과 그 이후의 상황을 보면 얼마나 진나라가 체계없이 굴러간 나라였는지 보여준다. 교과서는 진시황의 업적으로 너무 쉽게 '중앙집권화'를 이야기하지만 거꾸로 역사의 흔적은 그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기존의 익숙한 접근, 지나친 폭정으로 진나라가 쉬이 망했다는 평가에 대해서도 한 번쯤 되물어야 한다. 

진승과 오광은 계급이 타고나는 것이냐는 질문(王侯將相寧有種乎)을 던지며 세력을 키웠다. 한편 항우와 유방은 진시황의 행차를 보고 각각 이렇게 말했다 한다. "나도 저 자리에 오를 수 있겠다.(彼可取而代也。)", "아! 장부라면 저 정도는 되어야지!(嗟乎,大丈夫當如此也!)" 이들은 저마다 왕이 되었고, 그 가운데 유방은 끝내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이들 가운데 누구도 맹자가 바랐던 것처럼, 천명을 내세우거나 아니면 폭정을 끝내고 인정을 베풀겠다며 출발하지 않았다. 그들은 저마다 진시황을 하나의 실현 가능한 인간으로 보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진승과 오광, 항우와 유방은 각각 진나라에 반란을 든 인물로 손꼽히지만 이들이야 말로 진시황의 후예라 할 수 있다. 진시황이 무너뜨린 규범의 폐허 위에서 저마다 깃발을 들었기 때문이다. 진시황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이야기했지만, 이는 또한 과거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앞에서 본 것처럼 그를 시작으로 만세를 가겠다는 원대한 꿈은 시작부터 어그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선언한 과거로부터의 단절은 어떤가? 그의 후예들을 통해 충실히 계승되었다. 이제 누구든 천하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누군가는 공자를 신화의 시대를 끝내고 문명文明의 시대를 연 인물로 손꼽는다. 그는 실제로 이후 중국 역사에서 문명의 왕(文宣王)으로 여겨졌다. 그와 비슷하게 진시황도 평가할 수 있을 수 있다. 도덕의 시대를 끝내고 가능성의 시대를 열었다고. 

그러나 유가儒家, 공맹의 후예에게는 영 못마땅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이들은 전통으로 현재를 주조하고, 규범의 근본을 묻고 따지는 이들이 아니던가. 진시황은 자신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화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책을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파묻었다는, 분서갱유焚書坑儒의 고사보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가 더욱 커다란 충격이지 않을까. 책을 읽을 필요가 없고 도덕교사가 말을 들을 필요가 없는 시대. 

한고조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 이후 궁정의 혼란스러움은 유가에게 새로운 임무를 선물해주었다. 근본없는 이가 천하의 지배자가 되었고, 그를 따르던 시정잡배들이 이제 궁정신하가 되었다. 전장과는 다른 계통과 관계가 필요했는데 이를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이때 유가 지식인들이 나서서 싹 교통정리를 했단다. 황제에게 말을 가려서 하고, 행동을 제한하며, 상하위계를 정하는 일을. 유가는 그렇게 궁정의 질서를 부여하며 제국의 심장부에 자리를 잡았다. 

앞서 언급했듯 유방은 진시황의 계승자이며, 따라서 한나라는 진나라의 연속선 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한나라는 진나라의 많은 부분을 계승하였다. 치명적인 약점까지. 그렇게 한나라 초기의 혼란은 어떻게 황제의 지배 체제를 구축해가느냐 하는 숙제를 푸는 시간이기도 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적어도 한나라는 진나라와 한나라 초기의 유산 위에서 권력을 재조정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몇 차례 위기는 있었지만 진승과 오광 같은 인물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한무제에 이르면 제법 황제지배체제가 확고하게 완성된다. 이때 그는 전설의 성인들이 치렀다는 의식을 거행하고자 한다. 바로 봉선封禪. 천하의 지배자로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진시황이 시도했으나 하늘의 진노를 받아 실패했다는 데 이는 그의 불안한 권력의 기반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하겠다. 한무제는 자신만만하게 봉선 의식을 치렀고, 이때 도움을 주었던 것이 전통의 전문가들이었다. 탄탄한 권력은 신화적 서사 위에 있어야 한다는 점을 깨우치기 시작한 것이다. 전통은 그렇게 다른 식으로 제 자리를 찾는다. 

한무제는 "파출백가罷黜百家 독존유술獨尊儒術"을 천명한 인물로 유명하다. 즉 여러 학파를 내쫓고 오직 유가만을 남겨둔다는 의미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안정적인 제국이 선택한 철학이 바로 유가의 것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다른 학파의 철학에 근본적 무용성을 선언했다고 생각하지는 말자. 이것이 황제의 말이며, 무엇을 관학官學으로 선택할 것인가, 제국의 통치철학 특히 궁정의 철학으로 쓸모 있는 것인가를 선택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펑유란은 한무제 시기를 유가독존儒家獨存의 시대라 평한다. 유가만 남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유가가 제국의 통치철학으로 보편성을 획득하기까지는 아직도 한참이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또한 다른 철학의 흐름은 끊어지지 않고 저마다 다른 식으로 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훗날 주희는 한나라와 당나라 시대, 아니 맹자 이후를 싸잡아 유가의 암흑기라 평한다. 황제 가까이 자리를 마련하여 궁정 안에서는 맹위를 떨쳤으나 규범적 도덕, 개인적 실천의 영역에서는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3. 분열의 시대, 새로운 발견

삼국연의三國演義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한다. "천하의 큰 흐름을 이야기해보자. 나뉜 것이 오래되면 반드시 통일되며, 통일된 나라도 오래되면 반드시 나뉜다. (話說天下大勢,分久必合,合久必分)" 조금 맥락은 다르지만 일찍이 맹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일치일란一治一亂, 치세와 난세가 번갈아 나온다. 어떤 시대에 태어났느냐 하는 점이 많은 것을 결정했다. 치세의 윤리, 철학과 난세의 윤리 철학이 같을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자신의 시대가 치세임을 알았다. 오랫동안의 혼란이 끝나고 제국의 기틀이 바로 섰다. 황제는 이제 천하의 유일한 지배자로 당당히 인정받게 되었다. <사기>의 저술 동기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러한 융성한 문화의 정점에 있다는 자각이었다. "지금 한나라가 크게 흥하여 천하가 통일되었다. 지혜롭고 훌륭한 군주와 충성스럽고 의로운 신하들이 있으니, 태사太史로서 이를 기록하지 않으면 이 기록들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내 이것이 걱정되니 너는 유념하거라! (今漢興,海內一統,明主賢君忠臣死義之士,余為太史而弗論載,廢天下之史文,余甚懼焉,汝其念哉!)"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의 유언이다. 

그러나 사마천은 역사에 하나의 줄기만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연대기 순으로 전개되는 사건의 나열, 편년체編年體는 그 자체로 한계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건은 중의적 의미를 띠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건은 다른 무수한 사건을 낳는 출발점이 된다. 인물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하나의 사건, 하나의 시공간으로만 삶은 설명되지 않는다. 이에 그는 커다란 시대의 변화 속에 생생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기전체紀傳體의 발견으로 역사를 입체적으로 서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하나를 더 발견했는데, 혼란이 끝나고 제국이 기틀을 갖추면서 다양한 예외적 인물들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는 점이다. 협객에 대한 그의 애정, 가혹한 관리에 대한 경계심, 제왕의 편협한 욕망에 대한 가감 없는 기술은 그가 단순히 사관史官, 역사를 기록하는 '관리'에 그칠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그가 단순히 개관적 서술자에 머물 수 없었음 또한 보여주고 있다. "태사공은 말한다. 내가 황제로부터 태초 연간에 이르기까지 기술하였으니 모두 백삼십 편이다. (太史公曰:余述歷黃帝以來至太初而訖,百三十篇。)" 그는 기술하는 주체로서의 명확한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

진나라와 한나라, 제국의 성립은 춘추전국시대를 가로지르던 수많은 인물들, 다양한 철학적 실험에 마침표를 찍는 사건이기도 하다. 실제로 사마천 이후로 크게 주목할만한 인물을 찾아보기 힘들다. 다시 또 다른 난세를 기다려야 했다. 

후한의 혼란기는 역설적으로 또 다른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훗날 <삼국연의>로 이름을 떨치는 다양한 무장과 군벌들로만 이 시대를 기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 시기는 죽림칠현竹林七賢으로 대표되는 독특한 인물들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한쪽에서는 다시 천하의 향배를 두고 치열한 다툼이 벌어지는데 한쪽에서는 이와 전혀 무관한 인물들이 저마다 자유로운 삶을 향유했기 때문이다. 시대로부터 일탈한 인물들이라고 할까?

조금 더 좁게 보면 이 시기에는 새로운 종합과 창의적인 발견이 서로 어우러졌다. 몇 주석가들을 주목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안, 왕필, 곽상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하안은 대장군 하진, 바로 십상시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그의 손자였다. 그는 조조의 양아들로 자라나 일찍부터 궁궐에서 자랐다. 그러나 태자의 옷을 입고 활개치곤 해서 조비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이런 것이 그의 출신이나 성장배경에도 불구하고 오래도록 권력과 거리를 두게 된 까닭이 되었을 테다. 한편 그는 얼굴에 분을 바르기도 하고, 오석산이라는 기묘한 약을 복용하기도 했단다. 이런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기행과 가까운 인물이었던 듯하다.

그럼에도 하안이 철학사에 이름을 올려야 하는 것은 <논어>의 주요 주석가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전의 주석을 종합하고 당대의 해석을 더해 <논어집해論語集解>를 펴낸다. 이후 이 책은 약 천년 뒤 주희의 <논어집주論語集注>가 등장하기 전까지 <논어>의 표준 판본인 동시에, 표준 해석이 되었다. 즉, 하안 이전의 <논어>는 오늘날 우리가 읽는 <논어>와는 조금 달랐을 수 있다는 말이며, 그가 내놓은 주석의 방향대로 천년 넘게 <논어>를 읽고 해석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하안이라는 인물에 대한 역사 기록에는 <논어>와의 연관성을 별로 찾을 수 없다. 도리어 그는 <노자>나 <장자> 등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에 하안은 <논어집해> 편찬의 최종 책임자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그는 도가道家 사상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왕필과 깊은 교류가 있던 인물이었다. 

왕필은 중국 철학사의 손꼽히는 천재로 이야기되는데, 그가 주석을 단 책들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는 각각 <노자>와 <역경>에 주석을 달았고 왕필의 주석은 지금도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았으나 왕필이 <논어>에도 주석을 달았다는 기록이 있다는 점이다. 당대인들에게는 <노자>와 <논어>그리고 <역경>에 주석을 다는 것이 큰 모순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필은 공자를 최고로 쳤다. 이유인즉, 노자는 무無를 이야기 하나 공자는 무無를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왕필은 세계의 근원을 무無로 보았고 이를 체득해야 할 궁극적 가치라 생각했다. 왕필이 보기에 노자가 무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를 아직 체득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반면 공자는 무를 완벽히 체득하였으므로 무를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해석. 정말 그랬느냐 하는 것보다는 특정 가치를 체득하여 혼연일체가 된 경지를 추구한다는 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오래도록 권력의 중심부에서 빗겨나가 있던 하안은 어린 황제 조방이 제위에 오르자 조정의 실력자로 부상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대의 또 다른 거대한 실력자가 있었으니 바로 사마의였다. 사마의는 고평릉 사건을 통해 하안을 비롯한 조정의 실력자를 처치하고 위나라의 권력을 손에 쥔다. 하안과 깊은 교류가 있었던 왕필도 그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권력의 치열한 다툼에 염증을 느낀 이들은 <장자>와 같은 책에 주목한다. 곽상도 그런 인물 가운데 하나인데, 그는 제 분수를 지키며 자신의 자리에 만족하는 것을 귀한 덕목이라 보았다. 하안처럼 그도 <장자>를 정리하게 이에 주석을 달았다. 사마천은 장자를 10여만 자로 이야기했으며, <한서 예문지>에 기록에 따르면 52편에 달한다고 하나, 오늘날 전해지는 <장자>는 33편 약 6만 5천여 자 정도이다. 절반에 좀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삭제된 것이다. 

<삼국지>는 말 그대로 세 나라가 동시에 일어난 시기를 말한다. 위, 촉, 오 세나라에 각각 황제가 있었다. 본디 황제는 하나뿐이어야 하지만 어지러운 시대는 천하를 셋으로 나뉘어 놓았다. 이에 천하통일이라는 목적에 내달리는 여러 인물들이 다시 등장하지만 철학적인 면에서는 앞선 춘추전국시대에는 못 미치는 시대였다. 이들은 권력을 문제로 다루기보다는 자신들의 개별적 삶,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하는 초월적 지대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흔히 이 시기의 철학을 중현학重玄學이라고도 하는데, 중현重玄이란, <노자>에서 말한 도道의 형상 현玄, 아득하다는 표현을 더욱 밀어붙인 표현이다. "아득하고 또 아득하다 (玄之又玄)"는 말처럼 도는 초월적 대상인 동시에 말과 언어의 굴레를 벗어나 기묘한 존재양식을 갖는 무엇이 된다. '없음의 없음'이라는 식의 기존의 유무관을 뛰어넘는 독특한 사유가 이 시대 철학의 특징이다. 

이러한 철학이 등장한 것은 기존의 이쪽과 저쪽이라는 구분으로 현실의 어지러움을 해결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후세의 학자들은 이 시기 철학자들을 '염세주의적'이라 평가하기도 하는데, 현세를 부정하는 동시에 대안적 세계도 또한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닌 것. 아득하고 아득하기만 한 그 무엇. 흔히 '부정의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 한다. 이 말처럼 이런 부정의 논리를 그렇게 해석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고대 중국인들이 이 부정의 부정은 또 다른 개념을 통해 또 다른 개념을 창출해 내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바로 '공空'이라는 독특한 사유가 그것이다.


4. 불법佛法의 전래

불교의 전래는 오래되었다. 이미 한나라 시대에 불교가 전래되어 널리 퍼졌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불교가 중국에 단단한 뿌리를 내리는 데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전한前漢 시기 서역과의 교류 속에 청음으로 불교가 전래되었다. 그러나 사원이 세워진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뤄양 근교에 있는 백마사는 후한後漢 명제시기에 기록되었다 전해진다. 불교가 중국인에게 푹 젖어들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처럼 오래 시간이 걸렸던 것은 우선 불교의 사유가 중국인에게 낯설었기 때문이다. 고대 중국인은 자신들의 생각의 틀로 불교 교리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격의불교格義佛敎라 한다. 처음에는 서쪽으로 간 노자가 석가모니가 되어 다시 동쪽으로 돌아온 것처럼 여겼다. 석가는 고대 성인의 현신으로 여겨졌다. 그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다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했는데, 불가 경전이 번역되면서 비로소 가능한 일이었다. 

쿠마라지파(鸠摩罗什 344~414)는 한문으로 경전을 번역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오늘날 신장 위구르 지역 출신으로 장안長安에서 고대 산스크리트어로 된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했다. 한편 불경을 찾아 직접 천축국天竺國, 그러니까 인도로 가는 이들도 있었다. 현장(玄奘, 602~664)이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엄혹한 변경의 수비를 뚫고 서천 서역으로 떠났다 전해진다. 당시 황제였던 당태종은 국경을 넘는 것을 금했는데, 현장은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었다. 그 먼 길을 떠날 수 있었던 데는 그를 사로잡은 종교적 열심도 있었지만, 불교에 귀의한 이들이 그를 중간에 도와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돌아올 때 그는 융성한 대접을 받으며 다시 돌아오는데,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던 까닭이다. 현장은 귀국 이후 황제, 태종과 만나는데 만난 장소는 수도 장안이 아닌 낙양이었다. 당태종이 군대를 끌고 먼 길을 나서려 했기 때문이다. 바로 고구려 침략. 당태종은 현장과 만난 직후 고구려 정벌을 나선다. 결과는 모두가 아는 대로 당태종의 패배.

사실 중국의 황제들이 눈을 바깥으로 돌린 것은 한참 되었다. 이른바 오랑캐라 불리던 주변 민족들을 정벌한 것은 한무제가 처음이라 할 수 있다. 한무제 당시 곽거병은 수많은 군대를 이끌고 사막을 가로질러 흉노족을 정벌하였다. 그의 무덤 앞에는 마답흉노馬踏匈奴, 말이 흉노족을 짓밟고 있는 상이 있는데 이는 앓는 이처럼 근심거리였던 흉노족을 이겼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한무제는 흉노족을 정벌한 것은 사방 이민족에 자신의 위세를 떨치고자 했다. 조선 땅에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된 것도 이 한무제 때였다. 당태종 역시 그 충실한 후예였던 셈이다. 그러나 당태종의 정벌은 한무제 시대만큼 성공적이지 못했다.

'중국中國'은 말 그대로 천하의 중앙에 있다는 뜻이며, 자신들이 문명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는 자부심의 표현이기도 했다. 사방의 변두리에는 오랑캐들이 있고 그들을 동등한 문화적 존재로 대우하지는 않았다. 비록 무력은 강하나 문명의 차원에서 중국에 미치지는 못한다 여겼던 까닭이다. 그렇기에 서쪽 변경에서 넘어온 이질적인 종교, 철학을 쉬이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나라 시기에 이르면 불교는 이미 중국인의 마음을 완벽하게 사로잡기에 이른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남북조시기에 서천에서 넘어온 한 승려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낙양 남쪽 쑹산에 들어가 면벽하며 수련하였다 하는데, 그의 영향으로 불교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된다. 그가 바로 선禪불교의 시초로 불리는 초조初祖 달마이다. 그가 몸 담고 있으면서 독특한 수행을 가르친 곳이 바로 소림사少林寺이다. 선불교의 뿌리로 여겨지는 절을 대부분 무술의 본산으로만 알고 있다는 것이 흥미로운 점이기는 하다. 흔히 우리에게 익숙한 달마도, 달마의 그림에서 달마는 마치 신선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소림사에 있는 달마상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꼬불꼬불 수염이 덥수룩하며 얼굴이 커다란 전형적인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전래된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우리에게 익숙한 그 얼굴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달마 이후 중국의 불교에는 새로운 분파가 탄생한다. 교리보다는 깨달음을 중시하는 이 불교를 선불교라 하며, 이들은 이후 중국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여러 선사禪師 가운데도 육조 혜능(六祖慧能, 638~713)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서 '육조'란 달마를 시초로 삼아 여섯 번째 전승받은 인물이라는 뜻이다. 그는 법명처럼 꽤 빼어난 인물이었다 한다. 그가 전승받은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다. 그는 본디 일자무식으로 경전을 읽을 줄 몰랐단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경전을 듣고 단박에 깨우쳤으며, 결국 스승으로부터 전승의 상징인 의발을 물려받기에 이른다. 

의발을 물려주기 위해 스승이었던 오조 홍인은 제자들에게 계송, 즉 깨달음을 담은 시詩를 지어오라 명한다. 이때 홍인의 가장 빼어난 제자 가운데 하나였던 신수는 이렇게 지었단다. "몸은 보리수, 마음은 맑은 거울, 늘 털어내어, 먼지가 앉지 않도록 해야지. (身是菩提樹 / 心如明鏡臺 / 時時動拂拭 / 勿使惹塵埃)" 한편 혜능의 계송은 이렇다. "보리수는 나무가 아니고, 거울도 없거늘, 본래 아무것도 아닌데, 어디 먼지가 앉을 데가 있을까. (菩提本無樹 / 明鏡亦非台 / 本來無一物 / 何處惹塵埃)" 신수가 마음을 닦을 것을 이야기했다면 혜능은 마음이라는 대상조차 치워버린다. 이런 식의 접근이 선불교의 특징이며, 이에 혜능에게 의발이 전수되었다 한다. 다만 신수와 그의 제자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그 결과 중국의 선불교가 남북으로 나뉘는 계기가 되어 버리고 만다. 

누구의 말이 옳으냐에 상관없이 이런 식의 접근은 일대 사고의 변혁을 일으킨다. 언어와 규범에 대한 파괴, 거침없이 근거를 허물어뜨리는 시도. 이렇게 일종의 수수께끼와 같은 말들로 깨우침을 이야기하고 전하는 말을 공안公案이라 한다. 이를 기록한 책 가운데 <벽암록碧巖錄>은 악명을 자랑하는 책으로 손꼽힌다. 수수께끼 같은 말들로 가득 차 있어 난해한 책으로 유명하다. 중국의 여러 책들이 그러하듯, <벽암록> 역시 전승되는 수많은 이야기를 훗날 한 인물이 정리한 것이다. 이를 정리한 것은 원오극근(圜悟克勤, 1063–1135)이었다. 헌데 그의 제자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는 <벽암록>이 깨달음을 규정화하는 것이라 여겨 그 책을 불태웠단다. 깨달음은 언어는 물론 문자로도 남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간화선看話禪, 화두話頭를 붙잡아 깨달음에 이르는 방식을 주창한 인물이었다. 


5. 성인이 다시 되살아 난다 해도

스승을 찾아 먼 길을 떠난 인물이 있었다. 먼 길을 가느라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그는 단 두 권의 책을 몸에 지녔는데 하나는 대혜종고의 <서장書狀> 이었고 또 하나는 <맹자>였단다. 그가 바로 성리학의 창시자로 언급되는 주희(朱熹, 1130~1200)였다. 이 이야기를 두고 말이 많다. 훗날 성리학이 불교를 탄압했던 사정을 보면 성리학의 창시자가 불교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이 영 불편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 특유의 사유가 유가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야기의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성리학은 불교와 고대 유가의 결합이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철학에 어떤 원형이 있다는 것도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늘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특정한 사유 방식이 나타나기 마련이며, 이 사유 방식은 하나의 고정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이질적인 대상과 만나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앞에 언급되었던 선불교도 마찬가지이다. 달마의 이야기는 인도로부터 순수하게 전래된 무엇이 있는 것처럼 소개한다. 전승에 따르면 석가모니의 수제자 마하가섭 이후 달마는 28번째 전승자라나 뭐라나. 이 뿌리가 다시 중국에서 선불교라는 이름으로 꽃 피웠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반대의 이야기도 있다. 선불교는 인도 토착의 무엇과는 전혀 다른 중국식의 불교라고 할 수 있으며, 한층 더 나아가 비록 몸에 가사를 걸쳤으나 그 속 알맹이는 장자의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은 장자가 바로 선불교의 본모습이라는 주장. 

성리학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주장이 있다. 실상 속 내용은 불교의 것이며 개념과 겉 껍데기만 유가의 것이라는 것. 이렇게 보면 성리학이란 불교가 두루마기를 입고 관모를 쓴 것에 불과하다. 이런 관점에서 순수한 유가, 바로 공자와 맹자의 것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주장을 펼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원형이 있다는 것은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단지 옷을 바꿔 입었다는 것도 단편적인 주장이다. 복식의 변화는 곧 존재의 변화이기도 하다. 헐벗은 철학이란 없다.

물론 주희는 그저 옷을 바꿔 입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순수한 원형이란 없다는 주장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적통嫡統, 즉 순수한 단 하나의 후계자라 여겼다. 그러나 이 전승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한동안 끊어졌던 성인의 계보를 어렵게 다시 이를 잇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를 메시아처럼 여기지 않았다. 충실한 계승자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다행히 그의 스승은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남송시대 인물이었던 주희는 북송시대의 인물들이 자신의 스승이라 말한다. 가장 핵심적으로는 훗날 이정二程이라 불리는 정호, 정이 형제가 있다. 정호(程顥, 1032~1085)는 그의 이름보다는 명도明道라는 호로 유명하다. 정이(程頤, 1033~1107) 역시 이천伊川이라는 호로 유명하다. 후대 기록에 그들의 이름보다는 호가 더 유명하므로 편의상 호를 사용하기로 하자. 

정호, 정이 즉, 정명도와 정이천 형제는 생몰연대에서 볼 수 있듯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이 둘이 매우 가까웠던 데다, 서로 비슷한 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어 둘을 합쳐 이정二程이라 부르기도 한다. 성리학이 중심이 된 이후에는 이들에게 자子라는 호칭을 붙여 이정자二程子라 부르기도 하며, 이를 간략히 정자程子라고 하기도 한다. 따라서 후대 문헌에 '정자程子'라고 할 때에는 형과 동생 가운데 누구를 가리키는지 모호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도 동생 정이천이 더 오래 살았기에 보통 주희를 정이천의 후계자로 본다. 과연 이것이 적절한 접근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이런 식의 해석이 많은 것은 이 두 형제를 이후 성리학의 커다란 두 흐름의 원류로 설명하고 싶은 까닭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형 정명도로부터 왕양명의 철학, 양명학이 나왔고 동생 정이천에게서 주희의 철학 주자학이 나왔다는 해석이다. 

주희는 친구 여조겸과 함께 한 권의 책을 엮는다. <논어> 구절에서 제목을 딴 이 책은 <근사록>으로, 주희가 존경했던 북송시기 학자들의 글을 모아 묶은 책이다. 당연히 정명도와 정이천의 글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주돈이(周敦頤 1017~1073, 염계濂溪), 장재(張載 1020~1077, 횡거橫渠)의 글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 넷, 정명도 정이천 형제와 주렴계, 장횡거를 한데 묶어 북송사자北宋四子라 부르기도 한다. 북송시기의 이름난 학자라는 뜻이다. 

<근사록>은 <논어>의 '절실히 묻고 가까운 일을 생각하라(切問而近思)'는 구절에서 제목을 따왔다. 학문의 태도와 방향에 대해 말한 것으로 지나치게 심오하고 모호한 문제를 다루지 말라는 뜻이 숨어 있기도 하다. 사변적 탐구, 일상과 상관없는 주제를 학문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근사近思', 가까운 일상의 문제를 다루라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근사록>은 태극太極라는 주제로 시작한다. 

<근사록>을 펼치면 나오는 첫 글은 주돈이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태극도설太極圖說>이다. 태극도太極圖, 태극의 원리를 설명한 이 그림을 해설하는 글이다. 그 시작은 이렇다. "태극은 또한 무극이기도 하다. 태극이 움직여 양陽이 생겨나고 움직임 끝에 고요함이 일어난다. 고요하여 음陰이 생겨나고 고요함 끝에 다시 움직임이 일어난다. 이렇게 움직임과 고요함이 번갈아 서로의 뿌리가 되니, 음과 양이 나뉘어 양의兩儀(음/양)가 구별된다. 양陽이 변하고 음陰이 합하여 수화목금토 오행五行을 낳는다. 이 다섯 가지 기운이 순조로이 움직이며 네 계절의 변화가 일어난다. 오행이란 하나의 음양일 뿐이며, 음양도 하나의 태극일 뿐이다. 또한 태극은 본디 무극일 뿐이다. (無極而太極 太極動而生陽 動極而靜 靜而生陰 靜極復動 一動一靜 互爲其根 分陰分陽 兩儀立焉 陽變陰合 而生水火木金土 五氣順布 四時行焉 五行一陰陽也 陰陽一太極也 太極本無極也)"

이어지는 내용이 많으나 여기서 줄이자. 하나 하나의 개념을 설명하면 끝도 없으니 개념적 설명도 줄이자. 다만 여기서 볼 수 있는 독특한 점은 고대로부터 전승되었던 다양한 전통을 하나의 체계 위에 종합하려는 시도가 보인다는 점이다. 태극은 본디 <장자>에 나왔던 표현이며, 무극이란 본디 <노자>에 나왔던 표현이다. 한편 음양은 <역경>에, 오행은 <상서>에 나오는 표현이었다. 즉, <태극도설>은 다양한 경전에 등장했던 개념을 하나의 체계 위에 정리하고 있는 셈이다.

장횡거는 태허太虛와 기氣에 대해 이야기한 것으로 유명한다. 그는 모든 사물은 기가 응결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본래 우주는 텅 비어 있었다 말한다. 모든 것은 그저 일시적으로 응결되어 존재할 뿐이다. 응결이라 표현하는 것은 마치 기의 모임이, 물이 얼음이 되는 것과 같아서 존재의 사라짐을 기의 흩어짐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엇인가 새로 만들어지는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일시적인 존재 양식을 가질 뿐이다. 모든 개별적 사물들의 본래 모습은 그저 허무虛無일뿐이다. 

주희는 철학적으로 이들의 사유를 계승하여 또 하나의 체계적인 사유를 구축한 인물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도학자道學者라 불렀는데 이는 자신들이 도道를 탐구하고 논하는 사람들이라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한 도道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도道라는 근원적 개념을 탐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연구하고 구축한 체계 전체에 도道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기 때문이다. 

즉 도학자들은 도라는 이름의 커다란 솥을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전래된 다양한 전승, 사유전통, 시대적 배경, 또한 이질적인 사유를 종합하여 새로운 철학으로 주조해냈다. 이 주조과정은 물론 주조의 결과물을 총체적으로 도道라고 하자. 그중에서도 주희는 가장 큰 솥을 구축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혹자는 중국 철학사에서 딱 두 인물을 꼽으라면 공자와 주희를 꼽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주희야 말로 이후 천년의 사유를 지배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철학사는 그에 대항한 다양한 인물들을 소개한다. 그러나 그들 역시 주희와 똑같은 언어를 공유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주희가 만든 커다란 솥의 일부를 떼어 새로 주조했다는 뜻. 바야흐로 성리학의 시대가 그렇게 열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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