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애도의 애도를 위하여] 비판적 철학을 위하여2020-01-02 20: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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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문>과 <1장 '포스트' 담론의 유령들: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괄호 안 숫자는 책의 페이지이며, 내용에 따라 인용표기를 정확히 하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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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튼 생각. 새해 첫날, 책을 펼쳐 읽으면서 문득 어리석은 질문이 들었다. 왜 내가 이 책을 읽고 있는 걸까? 오랜만에 만나는 낯선 언어에 머리가 좀 어지러웠던 까닭이다. 한참을 읽다, 그것이 어떤 답답함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기억해냈다. 그 답답함은 지난 가을 조국을 둘러싼 논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오가는 말이 시끄러운데, 도무지 갈피를 찾지 못했다. 가장 의아했던 것은 페북 담벼락에 쏟아지는 이른바 깨시민들에 대한 비판이었다. 비판의 방향이나 내용보다도 사용하는 말들이 낡아 보였다. 이른바 식자층의 언어를 이용하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비판하는 데 별로 정교하지도 날카롭지도 않게 보였다. 분수령은 수십만이 모여든 촛불집회였을 것이다. 왜 우중愚衆들이 저리 많이 모였을까? 선동 혹은 광기의 결과일까? 직접 그곳에 나가보았지만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 책,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는 2019년 가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책에 묶인 글이 저마다 다른 시기에 쓰인 글이기는 하나,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라는 제목, 그리고 그 문제의식을 담은 서문은 2019년 가을과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최근 조국 정국은 2016~2017년 전개된 이른바 '촛불시민혁명'의 시효가 만료되었다는 점을 보여주었으며 또한 86세대가 도덕적•지적으로 파산했다는 점을 여실히 드러내어 주었다.(18)" 파산 이후에는 무엇이 있어야 할까? 아니, 무엇 때문에 그렇게 파산한 걸까? 이 책의 부제 '비판 없는 시대의 철학'이라는 제목은 이를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다. 바로 비판. 서문의 다른 표현을 빌리면 성찰(10)이 그 답이라 말할 수 있다. 


참고로 다른 데서 찾은 내용에 따르면 저자가 정한 제목은 '비판 없는 시대의 철학'이었다 한다.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는 편집자가 정한 제목이고. 덕분에 책을 읽는 독자는 비판 혹은 철학보다 애도에 더 주목할 수밖에 없는데, 서문의 내용을 볼 때 더 적합한 접근이라는 판단이다. 왜냐하면 애도, 그리고 그와 짝을 이루는 우울을 통해 주체라는 문제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1917년 발표된 프로이트의 <애도와 우울증>이라는 책에서 애도와 우울이라는 개념을 빌려오고 있다. 이 둘은 모두 사랑하는 사람 또는 대상의 상실과 관련된 반응이다. 차이가 있다면 애도란 상대 혹은 대상의 부재를 인정하는 감정이라면 우울은 그 부재를 받아들이지 않고 애착을 중지하지 않는 상황을 말한다. 이 맥락에 따르면 우울보다는 애도가 적합한 태도라 하겠으나 저자는 데리다를 인용하여 다시 논의를 새롭게 전개한다. 이 둘은 모두 '나르시시즘적인 주체에 대한 가정'이 놓여있다는 데 공통점을 갖는다. 이를 넘어서기 위해 데리다는 '애도에 대한 애도',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애도"(9)를 제안한다. 


데리다가 말하는 애도에 대한 애도는 "우리의 자율성의 애도,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에 대한 척도로 만드는 모든 것에 대한 애도를 뜻한다. 그것은 넓은 의미에서 (나르시시즘적인) 주체 중심주의에 대한 애도라고 할 수 있다."(9-10)


저자는 1990년대 '포스트 담론'의 유행이 마르크스주의와 민중, 민족 담론에 대한 애도였다고 말한다. 반면 마르크스주의자, 민중사 혹은 민중문학 넓게는 민족주의 담론을 추구하는 자들 가운데는 포스트 담론을 수용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자의 구도를 빌리면 이들은 일종의 우울증적 태도에 빠져있었다 평가할 수 있다. 애도와 우울, 서로 차이가 있으나 둘 모두 나르시시즘적 주체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같은 문제를 공유한다. 저자의 비판은 특히 포스트 담론을 더 향하고 있는데, 충분한 성찰 없이 포스트 담론을 수용하여 포스트 담론이 신자유주의적 전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정당화 담론으로 기능했으며. 이후 등장한 정치권력을 비판적으로 견제하지 못했다고 말았다.(10) 요컨대 오늘날 86세대의 한계와 현주소를 애도 포스트 담론의 수용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86세대의 파산에 이른 지금, 저자는 '애도의 애도'가 필요하다 말한다. 그 대상을 다시 요약하면 이렇다. "포스트 담론과 민족주의 담론, 그리고 마르크스주의"(11). 


서문에서 언급된 다양한 매력적인 주제가 있다. 포퓰리즘, 당파성에 기반을 둔 권력 투쟁(진중권의 표현을 빌리면 조국기 부대와 태극기 부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이중적 태도 - 계급 중심주의와 대중의 주체화에 대한 무관심 등. 이에 대한 논의는 짧게 줄이도록 하자. 아무래도 이런 주제는 앞으로 다른 부분에서 다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1장 <'포스트' 담론의 유령들>에서 더 언급된 부분만 다루도록 하자.


1장의 제목 <'포스트' 담론의 유령들>은 데리다의 책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빌려온 것이다. 데리다는 이 책에서 유럽을 떨게 한, '마르크스라는 유령' 그리고 '마르크스를 괴롭히는 유령' 모두를 이야기한다. 그렇기에 제목이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다. 포스트 담론도 이와 비슷하다. 우선 포스트 담론이 유령 혹은 허깨비로 존재했다. 이는 포스트 담론의 출발점과 그 기능을 명확히 검토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한편 포스트 담론 역시 그 자신의 유령에 얽매여, 자신이 청산하고자 하는 타자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즉 포스트 담론이 제기한 문제에 대한 적합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는 뜻이다. 


국내에는 포스트 담론에 대해 크게 두 가지 평가가 있었다. 우선 새로운 시대적 흐름 또는 시대의 표상으로 보는 관점이 있었다. 여기에는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이행이 보편적 역사의 흐름이라는 전제가 있다. 다른 한편에는 포스트 담론을 자본의 이데올로기 내지 허상으로 간주하는 입장이 있다. 이들은 포스트 담론이 경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면서 문화 영역에 갇혀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저자가 보기에 포스트 담론은 '애도의 담론'으로 이해해야 한다. 90년대 이후 포스트 담론이 급속히 수입되었다. 흔히 이에 대해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 소련 등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연쇄적인 몰락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 설명 만으로는 부족하다. 오히려 저자는 그 급속한 수용이 일종의 애도의 표현이라는 가설을 제안한다. 마르크스주의(또는 민중민주주의) 및 민족담론이라는 사랑하는 대상이 현실성 검사를 통해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던 까닭이다. 그렇기에 1990년대 많은 고백의 서사와 전향의 담론이 있었다. 


1990년대는 실로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시기였다. 1) 소련 및 동구권과 함께 역사적 마르크스주의가 종말을 고했으며, 2) 새로운 세계 질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출현한 시기였다. 저자는 1)에 대한 애도가 2)에 대한 망각을 초래했다고, 또는 2)에 대한 망각 내지 청산의 욕망이 1)에 대한 애도를 과잉 규정했다고 말한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질문이 충분히 다루어지지 못했다.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이라는 '현실' 앞에서 새로운 종류의 계급투쟁, 새로운 종류의 적대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왜 마르크스주의는 이러한 적대와 갈등을 설명하지 못했고 또 여전히 설명하지 못하는가?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이론적•실천적 해법들이 모색되어야 하는가? (40)


저자는 위에서 언급한 상황을 '애매성'이라 표현하며 그 결과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 담론 모두 이론적으로 무력하게 되었다 평가한다. 마르크스주의는 본질주의, 계급 환원주의, 경제주의, 유럽 중심주의로 환원되었고 포스트 담론은 개인적인 욕망과 문화적 유희에만 몰두하는 무책임한 담론으로 비판받았다. 저자는 여기에서 포스트 담론이 '미국제 담론'임을 인식해야 한다 주장한다. 포스트 담론은 '미국 학계의 놀라운 생산성과 지적 활력을 보여주는 사례'(43)이다. 이를 인식해야 하는 이유는 그 담론이 생산된 맥락을 더 정확히 이해해야만 그 담론의 강점과 한계를 더 명확히 파악할 수 있기 때문(45)이다. 또한 번역의 한계도 생산 맥락과 수입처를 명확히 알아야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번역서가 부족하며 그마저 있는 번역도 오역 투성이인 상황은 포스트 담론 수용을 위한 이론적 원천으로 프랑스 철학을 사용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 결과 포스트 담론은 주로 상투 어구의 반복, 짜깁기, 획일화의 대상(47)이 되었다. 그 결과 등장한 것은 개념어들이 무비판적으로 뒤섞인,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포스트 담론이라는 비빔밥(51)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포스트 담론에 고유한 통찰이 있으며 이를 발굴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보편에서 보편들로, 주체에서 주체화(들)로, 단일한 정치에서 복수의 정치로.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또 다른 자세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특히 발리바르가 중요한 사상적 원천일 텐데, 이에 대한 문제는 미뤄야 할 듯싶다. 어쨌든 '애도'에 혹은 '애도에 대한 애도', 책 뒤표지의 표현을 빌리면 '포스트 담론에 대한 애도'에 집중하자.


다시 허튼 생각. 새해라고 신년 토론회를 보았다. 한쪽에는 어용 지식인을 자처하는 이가 있었고, 한쪽에는 가오가 없냐며 교수 자리를 박차고 나온 이가 있었다. 어용 지식인이야 그 목적과 태도가 분명하니 제각기 판단할 일이지만, 궁금했던 것은 한때 논객으로 이름을 떨치다 교수가 되었고, 다시 들판에 나온 이의 주장이었다. 헌데 그의 말이 크게 실망스러웠다. 사실을 모르고 환상에 사로잡힌 대중, 지식인이나 언론인의 권위가 무너진 현실에 대한 개탄. 그가 미학자라는 사실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무엇에 대한 애도이건, 어느 정도건, 다시 애도가 필요한 시대인 것만은 맞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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