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애도의 애도를 위하여] 전복과 실천의 유령들을 애도하며2020-01-09 10: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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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애도의 애도를 위하여 2, 3장 발제.hwp (29.5KB)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 제2장 좌파 메시아주의라는 욕망, 제3장 시간과 정의

 

몇 년 간 미셸 푸코라는 프랑스 철학자의 책을 읽고 있다. 이 책의 저자가 포스트담론의 대표주자로 거론하는 바로 그 푸코이다. 푸코의 이름을 처음 접한 시기는 90년대 후반, 대학에 막 입학해서 읽은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이라는 책에서이다. 검색해 보니 지금도 많이 팔리고 있는 책이고, 저자는 영국인이다. 그 책에서 푸코는 그람시, 알튀세르 등과 함께 논의되었다. 마르크스주의나 모더니즘, 구조주의도 잘 모르는데, 무려 후기마르크스주의와 후기모더니즘, 후기구조주의까지 독해해내야 하는 난감한 책이었다고 기억한다. 기억을 떠올릴수록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의 저자가 말하는 90년대 상황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거의 아는 이가 없었던 학자들이 갑자기 대유행이 되어버리는 상황 말이다.

 

내가 푸코를 읽게 된 이유도 그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포스트담론의 대표주자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질 들뢰즈, 자크 라캉 등이 2000대에도 우리나라의 인문학계에서 높은 위상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어딜 가나 푸코, 데리다, 들뢰즈, 라캉을 읽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정말 그랬나? 2000년대에도 이들의 책은 대부분 번역되지 않은 상태였고, 번역되었다 해도 번역의 질이 좋지 않았다. 대부분은 원전에 대한 이해 없이 해설서에 의지해야만 했다. 이름은 많이 언급되는데, 정작 담론이 만들어질 여지는 없었다. 제대로 읽지 않았으니 비판이라고 해봤자 맥 빠지는 비판뿐이다. 내용이 사변적이라거나, 실천과 연결되지 않는다거나 하는. 포스트담론이 우리나라에 수입된 맥락을 파헤치고자 하는 이 책의 저자가 하는 비판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개인적으로 ‘요약해서 읽기’는 철학공부의 함정이라고 느낄 때가 많다. 빠른 시간에 누군가의 철학을 요약해서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론은 요약이 가능하다 해도 스타일은 그렇지 않다. 모던을 이해하지 않고, 포스트모던을 이해하는 일도 불가능하다. 불가능하기만 하면 괜찮을 텐데,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하면서 서로 그것이 가능하다고 속이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대학에서 공부하는 이들이 몇 년의 기간 동안 가능한 많은 이론을 접하기 위해 원전을 제대로 읽지 않고 해설서나 논문으로 공부를 채운다. 각주만 주렁주렁 달린 채 어떤 관점도 독특하게 제시하지 못하는 텍스트들이 그렇게 생산된다. 이 책의 형식은 신뢰하기 어려웠지만 저자에게는 미지에서 비롯된 신뢰가 남아있었는데, 여기서는 들뢰즈가 언급한 ‘비역질’의 기운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어쨌든 길고 긴 이야기가 반복되는 책 속으로 돌아가 보자. 포스트담론이 제대로 소화되지도 못한 채 우리나라 인문학 시장의 좌판에서 마구 팔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아뿔싸, 신상품이 또 나와 버렸다. ‘포스트-포스트담론’의 등장이다. 슬라보예 지젝,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조르조 아감벤, 자크 랑시에르, 알랭 바디우 같은 사람들이다. 우리나라의 인문학 시장도 그전보다 커진 상태라, 이젠 거의 아이돌급 인기를 구가한다. 이중에는 자유민주주의를 거부하고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민주당 지지자도 진보라 말하는 나라에서 이런 사람들이 인기 있는 현상을 저자는 도통 이해하지 못한다.

 

그 현상을 설명하려고 애써보는 게 이 책의 2장과 3장의 주된 내용이랄 수 있다. 저자가 보기에 포스트담론은 우리나라에 와서 비판적이고 급진적인 잠재력이 거세된 가운데 ‘문화적 교양을 과시하기 위한 지적 클리셰’로 애호되고 있었다. 이렇게 문화적·미학적으로만 소비되던 포스트담론은 곧 보다 급진적인 해방담론을 자처하는 ‘포스트-포스트담론’으로 대체 혹은 변화되었다. 문제는 이 ‘포스트-포스트담론’들이 포스트담론을 경유하면서 비판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고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해 없이 포스트담론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소화되지 못한 포스트담론은 다시 ‘포스트-포스트담론’에 대한 몰이해와 과장을 키웠다.

 

저자는 그 소화되지 않는 이유를 ‘포스트-포스트담론’의 특성에서 찾으며, ‘포스트-포스트담론’을 ‘바깥의 정치’라고 개념화한다. 이 개념화는 ‘포스트구조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에 저자가 가한 혹평만큼이나 부주의한 개념화이다. ‘바깥’이라는 관념적인 출구는 결국 메시아주의와 연결된다. 혁명을 통해 급격한 단절과 전복을 기대하면서 주체화에 집중할수록 ‘메시아에 대한 열망’은 커질 수밖에 없다. 저자의 지적대로 메시아주의는 전체주의나 파시즘과 무관하지 않다. 나치에 쫓기던 벤야민이 품었던 혁명에 대한 열망은, 그의 스승이며 나치 부역자이기도 했던 칼 슈미트의 열망과 이론적으로 무관할 수 없다. 메시아주의의 한계가 뚜렷하다면, 이를 돌파할 방법이 문제이다.

 

그 한계를 돌파해나가기 위해 저자는 데리다를 소환한다. 저자의 바람과는 달리 또 다른 메시아의 등장이다. 이 책의 제3장은 벤야민과 하이데거, 데리다에 대한 장이라고 설명되어 있지만, 실은 데리다가 독해하고 비판하는 벤야민과 하이데거에 대한 장이다. 나아가 저자가 데리다의 이론을 통해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을 모색하는 장이다. 저자는 데리다가 ‘메시아주의 및 종말론에 맞서 단절의 가능성, 사건을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데리다가 이야기하는 어긋남과 초월과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소화하지 못하는 채로 멍하게 읽다보면, 문득 저자가 포스트담론에 가한 비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사변적이며, 실천과 연관되어 있지 않다는.

 

저자는 사변적이며 실천과 연관되어 있지 않다는 비판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향수와 무관하다고 변명한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그럴 수 있겠다. 그러나 정서적으로도 그럴 수 있을까. 마르크스주의나 메시아주의는 이론을 넘어선 일종의 정서적 반응이기도 하다. 무려 개인 차원의 정서가 아닌 한 시대나 계급의 정서이다. 86세대와 같은 나이이지만 정서적으로 공감하지 못한다는 저자가 사용하는 ‘국가’, ‘변혁’, ‘진보’, ‘실천’ 같은 단어들에서 느껴지는 정서들은 어떤가. 여전히 권력을 계급이나 대의정치와 관련하여 사유한다는 점에서 이 정서들은 충분히 공허하고 낡았다. 저자가 언급하듯 정치적 진보는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이룩되지 않는다. 진보를 논의하기 이전에 일단은 진보에 대한 강박부터 버려야한다. 파국을 봉합하려는 ‘역사의 천사’를 꼼짝 못하게 밀어붙이며, 뺨따귀를 내려치는 게 바로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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