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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중국] 흘러가기와 날아가기─그리고 (여전히) 가져오기2020-11-05 01: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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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가기와 날아가기그리고 (여전히) 가져오기

에레혼

물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 보니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이번에는 책에 쉽게 마음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이미 서문에서부터 사라 알란의 팬이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사라 알란의 글쓰기가 마음에 든 까닭은 중국에 대한 독특한 접근 방식 때문만은 아니다. 공자와 노자, 그들은 물에서 무엇을 보았는가(이하 ‘공자와 노자’)는 거창한 제목과 달리 큰 욕심을 부리지 않는 책이다. (번역을 하면서 이렇게 ‘사람 낚기 좋은’ 제목이 나왔겠구나 생각할 수 있겠지만, 영어 제목도 만만치 않다. The Way of Water and Sprouts of Virtue”라는 원제는 "물의 도 그리고 덕의 발단"쯤으로 직역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소박한 발상이 책의 목소리에 더욱 주목하게 만든다. 사라 알란은 물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중국 철학의 계보를 그릴 생각은 없다고 밝힌다.

물과 식물의 성장이 중국인들의 개념구조의 뿌리 은유라고 설정한 가정이 옳다면, 이 책에서 논의할 이미지들은 방대한 범위의 철학적ㆍ문학적ㆍ심미적 표현들 속에 반영되어 있을 것이며, 그 중 어떤 표현들은 같은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넓은 범위의 관찰을 시도하기보다는 범위를 좁혀서 철학적 언어를 형성시켜 그 후의 철학적 토론 용어들을 확립하는 데 공헌했던 유가와 도가의 근본 서적들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다. (본문 28)

흔히 어떤 개념을 해체하고 원류를 파헤치는 작업은 많은 학자들을 시험에 들도록 한다. 근원을 찾는 단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개념에서 파생된 새로운 계보를 만들고자 하는 유혹. 내가 계보화 작업만 그럴듯하게 성공하면 대가가 될 수 있으리라는 유혹. 사라 알란은 《공자와 노자》에서 그런 유혹을 배제하며 논리를 이어 나간다.

그렇지만 사라 알란의 책 속 주무대인 춘추전국시대는 지금으로부터 너무나 먼 과거이다. 또한 앞서 말한 것처럼 《공자와 노자》는 고대의 ‘뿌리 은유’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과감하게 생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권의 독자들은 물을 중심으로 한 논지 전개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반응은 지금까지도 동아시아 사람들이 세계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물이라는 매개체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증명하기 위해 공자와 노자까지 거슬러 갈 필요도 없고, 《시경》을 읊을 필요도 없다. 《공자와 노자》를 읽으면서 새삼 깨닫게 된 것인데, 내가 지금 듣고 있는 노래 속에도 물에 대한 이야기가 참 많이 등장한다. 이센스의 <비행>이라는 랩 가사의 맨 처음 부분을 살펴보자.

알약 두 개, 없이 삼켜. 머리가 좀 아파, 인생이 어째 편한 적 없이 흐르는 것 같네. 도 내리고 갑자기 천둥도 치고 물길 거세지고 흙탕물에 흰 거품, 콸콸콸.

다섯마디 남짓 되는 이 힙합 가사에도 물과 관련된 표현이 연쇄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가사에서 등장하는 ‘시간이 흐른다’는 표현은 단독으로 들었을 때 큰 의미를 발견하기 어려운 관용적 표현이다. 하지만 이 말은 앞 뒤에 배치된 물과 연관된 단어들 사이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시간이 흐른다’는 말 역시 ‘물의 흐름’에서 유추한 표현이라는 사실.─새삼스러운 표현이 전혀 새삼스럽지 않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이왕 힙합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서양의 시간에 대한 표현 역시 힙합으로 풀어보려 한다. 영어 힙합 가사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표현이 있다. Funny how time flies” 우리말로 하면 ‘우습게도 시간이 정말 빠르게 (날아)’ 정도 되려나. 물론 ‘시간이 날아간다time flies’라는 말은 굳이 힙합 가사가 아니더라도 서구 문화권 사람들이 관용적으로 쓰는 말이다. 시간이 흐른다고 하는 지구 반대편 사람들과 시간이 날아간다고 하는 또 다른 반대편의 사람들이라니! 시간을 통해 직관적으로 동서 문화권의 차이를 설명하는 사라 알란의 시도는 익숙한 것을 낯선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시간은 은유적 모델을 필요로 하는 지적 개념이다. 즉 시간 자체는 구체적 실체를 갖지 않으므로 시간을 개념화하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이미지나 모델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가 시간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은 우리의 사고가 근거하고 있는 은유의 결과이다. 라코프와 존슨이 지적하고 있듯이, 현대의 일상 생활에 비추어 보면 사람들은 시간을 제한된 자원이나 상품 정도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는 ‘시간은 돈이다’라는 속언을 익살정도로 사용하려는 사람들조차 사간을 절약, 소비, 투자, 예산, 빌림, 공유나 여분, 얻음이나 손실 등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행동한다. 시간을 개념화하는 데 사용한 뿌리 은유들은 중국과 유럽의 사유 체계에서 많은 차이를 보여주며, 이는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본문 34-35)

이런 문화적 차이를 가지고 있으니, 서구인들은 공자가 “오! 물이여, ! 물이여.” 하는 구절을 보고서는 과장된 표현이라 생각하는 것 아닐까? (본문 24) 동양 고대 문화에 대한 서양인들의 반응은 조소 내지는 무시로 나뉜다. 그들의 동양에 대해 가지고 있는 태도는 익히 알려진 것이라, 그리고 오랫동안 비판의 대상이었기에 이제는 불쾌하다는 느낌도 없다. 문제는 동양인이 스스로를 서구인의 시각을 이식하여 바라볼 때 발생한다. ‘타자화 된 시선’ 문제 역시 더 이상 지적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많이 언급되어 온 부분이다.

서구의 종교에 대한 동경, 동시에 그들에게 부족한 부분을 우리만의 종교(=유교)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차이나 리터러시에서는 지난 6주동안 한결 같은 주장을 했던 한 노학자의 강의에 시달려왔다. 그런데 이어서 사라 알란의 책을 접하니 ‘언어 능력과 연구 능력은 별개’라는 학술계의 아포리즘이 절로 떠오른다 ‘종교가 없을 수도 있지, 그리고 종교가 없는 부분에 다른 게 있었겠지.’ 지극히 당연한 접근 방식을 서양 저자의 책에서 만나니, 즐거운 기분이 들기는 하지만 뒷맛이 영 씁쓸하다. 

한 세기 전, 중국의 지식인들은 자기 국가가 봉건사회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고 진단했다. 이 축제 분위기에 찬물을 뿌린 사람은 바로 루쉰이었다. 그는 중국이 아직 내보내는送去 일을 할 게 아니라 밖에서 가져오는拿来 일에 몰두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라는 자아가 비대해지려 할 때마다, 그리고 이렇게 사라 알란처럼 지당한 말을 하는 ‘바깥’의 저자를 만날 때마다 루쉰의 찬물 끼얹는 소리가 떠오른다. 《공자와 노자》를 읽으니 이번에도 루쉰이 연전연승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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