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장자강독] <장자열전> 및 <장자익> 서문2021-03-21 23:2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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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를 강독하면서 강독 텍스트 <장자익>의 글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사기열전>의 <노자한비열전> 가운데 장자에 대한 부분을 떼어놓은 <장자열전>과 <장자익>에 붙은 초횡과 왕원정의 서문입니다. 개인 브런치에 초역본을 올렸는데, 잘못 옮긴 부분, 어색한 내용을 수정했습니다. 가독성을 위해 번역을 위한 메모는 삭제했습니다. 


장자열전 

莊子列傳


장자는 몽蒙 지역 사람으로 이름은 주周이다. 장주는 한때 몽 지역의 옻나무 동산의 관리였다. 양혜왕, 제선왕과 같은 시대를 살았다. 


그의 학문은 두루 여러 방면을 다루었으나 핵심은 노자의 가르침을 따른다. 그러므로 십여 만 자의 글을 남겼는데 대체로 우화이다. <어부漁父>, <도척盜跖>, <거협胠篋>편을 지어 공자의 무리를 비판하고 노자의 학술을 주장했다. <외루허畏累虛>, <항상자亢桑子> 따위는 모두 사실과 무관한 헛소리이다. 


그는 글과 이야기를 지어 세상일을 논하는 것을 잘 하였다. 이를 가지고 유가와 묵가를 공격하였다. 당시 빼어난 학자라 하더라도 그의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터무니없고 제멋대로여서 제후나 대부에게 등용될 수 없었다.  


초위왕이 장주가 빼어난 인물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사신과 많은 재물을 보내 그를 재상으로 삼으려 했다. 장주가 웃으며 초나라 사신에게 말했다. 


"귀한 재물을 가져왔고, 높은 재상 자리를 제안하는 구려. 헌데 교제郊祭에 바치는 희생 소를 보지 못했소? 여러 해 동안 잘 먹이고, 비단 옷을 입혀서 태묘로 끌고갑니다. 그때 혼자 나뒹구는 돼지를 바란들 어찌 그럴 수 있겠소? 나를 더렵히지 말고 썩 꺼지시오. 나는 이 지저분한 곳에서 멋대로 즐기며 살지언정, 나라를 가진 자에게 끌려다니지 않겠소.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고자 하오."


莊子者蒙人也。名周。周嘗為蒙漆園吏。與梁惠王。齊宣王同時。其學無所不闚。然其要本歸於老子之言。故其著書十餘萬言。大抵率寓言也。作漁父。盜跖。胠篋。以詆訿孔子之徒。以明老子之術。畏累虛。亢桑子之屬。皆空語無事實。然善屬書離辭。指事類情。用剽剝儒墨。雖當世宿學。不能自解免也。其言洸洋自恣以適己。故自王公大人不能器之。楚威王聞莊周賢。使使厚幣迎之。許以為相。莊周笑謂楚使者曰。千金重利。卿相尊位也。子獨不見郊祭之犧牛乎。養食之數歲。衣以文繡。以入大廟。當是之時。雖欲為孤豚。豈可得乎。子亟去。無污我。我寧游戲污瀆之中自快。無為有國者所羈。終身不仕。以快吾志焉。


장자익서 


莊子翼敍


노자는 주나라 말기에 살았는데, 상하편의 책을 지어 도/덕의 뜻을 밝혔다. 관윤자, 양주, 열어구, 항창초, 장자는 모두 그의 제자였다. 


제자 가운데 양주만 글이 없었다. <열자>는 진晉 말기에 비로소 유통되었는데, 아마도 훗날 사람이 장자의 글을 모아 보충하여 책으로 엮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사공(사마천)은 열전을 지으면서 열자를 언급하지 않았다. <항창자>는 당唐 왕사원王士源이 지은 것이다. <관윤자>는 매우 허황하다. 아이, 선녀, 주문, 흙인형 따위에 대해 말하는데, 노자의 때에는 이것들이 없었으니, <관윤자> 역시 후세의 도를 안다는 선비들이 관윤자의 이름을 빌려 지은 것으로 진짜가 아니다.


옛날에 전해지던 <장자>는 53편이었는데 지금은 33편이 남아 있다. 외•잡편 가운데는 가짜로 지어낸 것처럼 여겨지는 내용도 있으나 내편은 확실히 장자가 아니면 지을 수 없는 글이다. 그러니 노자 제자 가운데 세상에 글로 전해지는 것은 오직 <장자>뿐이다.


앞서 나는 <노자익老子翼> 몇 권을 엮었는데, 다시 <장자의소莊子義疏>를 읽고 뜻에 맞는 것을 뽑아 이 책을 엮어 <장자익>이라 이름을 붙인다. 


공자에게 맹자가 있는 것처럼 노자에게는 장자가 있다. 노자와 공자는 같은 시대였고, 장자와 맹자도 같은 시대였다. 공자와 맹자는 노자와 장자를 비판하지 않았으나 세상의 학자들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소리가 적지 않다. 공자와 맹자가 있음(有)을 중시하고, 노자와 장자가 없음(無)을 중시했다고 하며 어찌 이들 사이에 다름이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아! 공자와 맹자가 없음(無)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 아니 거늘! 없음은 바로 있음에 달려있다. 공자와 맹자는 세속의 널리 알려진 것으로 없음을 설명하였는데, 바로 '일상의 것을 배워 고매한 것을 깨우침(下學而上達)'이 그것이다. 


노자와 장자는 당시 공자와 맹자 무리가 있음에 갇혀 깨우치는 자가 적다는 것을 알았다. 없음을 깨우친 뒤에야 있음에 대해 다룰 수 있다고 여겨, 이를 간략한 말로 설명하여 공자와 맹자의 부족한 부분을 돕고자 하였다. 인의예악과 같은 것들은 이미 공자와 맹자가 누차 이야기했거늘 또 쓸데없이 말을 덧붙여 무엇하겠는가. 이것이 노자와 장자의 훌륭한 뜻이니 억지로 고매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형체 앞에 있는 것을 도道, 형체 뒤에 있는 것을 기器라 이른다(形而上者謂之道。形而下者謂之器。)'라는 유가(孔孟)의 말에 대해, '도道/기器를 유有/무無라 하고 위아래로 바뀌는 것이 오묘하게 돌아간다'(易道器為有無。轉上下為徼妙。)라고 하는 것은 엉뚱한 풀이에 불과할 것이다.


엉뚱한 풀이라며 노자•장자의 뜻이 공자•맹자의 뜻과 같다는 주장을 비난하며 공격하는 자들이 있다. 이는 그들 자신이 잘못되었기 때문이지, 어찌 노자•장자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겠는가. 공자와 맹자 그리고 노자와 장자는 배우는 자들이 그 본성에서 어긋나는 것을 걱정하였다. 이에 글을 지어 그들을 깨우쳐 주고자 하였다. 제 본성을 돌아볼 줄 모르며, 같고 다름을 세세히 따지는 것 따위는 내 알 바가 아니다. 


만력 무자戊子(1588년) 인일人日 (음력 1월 7일)

초횡약후 쓰다.


老子在晚周。著書上下篇。明道德之意。而關尹子。楊朱。列御寇。亢倉楚。莊周。皆其徒也。諸子唯楊朱無書。列子在晉末。書始行。疑後人取莊子之文。足成之者。故太史公作列傳。不及列子。亢倉子唐王士源所蓍。關尹子書甚高。顧嬰兒。蕊女。呪誦。土偶之類。聃時尚無之。亦後世知道之士所託為。非其真也。莊子舊傅五十一篇。今存三十三篇。外雜篇間有疑其偽者。乃內篇斷斷乎非蒙莊不能作也。然則老氏門人之晝傳於世者。獨莊子耳。余既輯老子翼若干卷。復取莊子義疏讀之。采其合者為此編。亦名之曰莊子翼。夫老之有莊。猶孔之有孟也。老子與孔子同時。莊子又與孟子同時。孔孟未嘗攻老莊也。世之學者顧誻誻然沸不少置。豈㠯孔孟之言詳於有。而老莊詳於無。疑其有不同者歟。嗟乎。孔孟非不言無也。無即寓於有。而孔孟也者。姑因世之所明者引之。所謂下學而上達者也。彼老莊生其時。見夫為孔孟之學者。局於有而達焉者之寡也。以為必通乎無而後可以用有。於焉取其所略者而詳之。以庶幾乎助孔孟之所不及。若夫仁義禮樂云云者。孔孟既丁寧之矣。吾復贅而言之。則何為乎。此蓋老莊之雅意。而非其創為高也。不然形而上者謂之道。形而下者謂之器。此孔孟之言也。今第易道器為有無。轉上下為徼妙。其詞異耳。以其詞之異。而害其意之同。是攻之者之自病也。曾足以病老莊乎。孔孟老莊閔學者之離其性也。而為之書以覺之。不知反其性。而曉曉然異同之辨。非余之所知也。

萬曆戊子人日

焦竑弱侯書印



장자익서 

莊子翼敍


나는 일찍이 언영鄢郢과 오월吳越의 여러 명승지를 둘러보았다. 그 길에 세속을 떠나 사는 방외거사方外居士를 만났다. 문득 황로黃老의 일을 이야기했는데, 또 그 성품이 <장자>를 읽기를 좋아하였다. 


<장자>의 수많은 글은 모두 노자의 허무와 도道/덕德의 자연스러움을 이야기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처음 읽을 때는 멍하니 이해하는 게 없다. 오래 읽으며 그 뜻을 깊이 음미해보니, 그 뜻이 크고 넓어 종횡무진하며, 변화무쌍하고 미묘하게 통하는 바가 있다. 그 말은 마치 세상의 법도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나 '도'를 깊이 체득하고 있다. 


나는 장자의 속마음을 생각해보았다. 그는 사람들과 뒤섞여 어지럽게 지내면서도 홀로 자유롭게 노닐며 생사에 연연하지 않았다. 천지와 함께하고 신명과 아울리는 사람이라 하겠다. 이 어찌 헛된 말이겠는가!


그러므로 지금 <장자>를 읽으면 문득 몸과 정신이 자유로이 날아가고 마음이 넉넉하며 깨끗해진다. 티끌같이 지저분한 것 따위는 잊어버리게 된다. 이런 까닭에 위진시대의 여러 이름난 선비들은 말이 고아하고 맑으며, 뜻이 넓고 호쾌하였던 것은 모두 <장자>로부터 나왔다. 선도仙道를 닦는 이들의 말과 행동도 반드시 <장자>를 따른다. 


예나 지금이나 유가의 가르침을 외치는 자들은 장자의 뜻을 살펴보고는 기이하다고 여기지 않은 이들이 없었다. 그러나 이 어찌 세속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맹자는 힘써 이단을 배척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으면서도 한마디도 장자를 비난하지 않았다. 공자가 노자를 존경한 것처럼, 맹자도 장자를 인정하다. 공자와 맹자는 노자와 장자의 주장이 자신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어찌 의심할까. 


아! 후세에 장자를 풀이하는 자들이 수십 갈래나 되나 대체로 쓸데없는 것들 뿐이니 핵심을 파악하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이렇게 더 아리송한 말이 되었도다. 나는 매번 <장자>를 펼칠 때마다 이를 안타까이 여겼다. 지금 초횡약후가 두루 주注와 소疏를 취하고 장자와 합치하는 부분을 뽑아 <장자익>을 지었으니 훗날 <장자>를 읽는 이들은 이를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말을 함께 적어 서문으로 삼는다. 


만력 무자戊子(1588년) 청명일清明日

왕원정 맹기 쓰다. 


余嘗博遊鄢郢吳越諸名勝。遇方外士。輒譚黃老之事。且性嗜讀莊子。莊子數萬言。無非明老氏之虛無。道德之自然也。然初讀之。猶塊然無得。久之乃深味其旨。弘博縱恣。奇詭變化。而玄通微妙。語若不經。而深有得于道者。吾憶蒙莊胸次。則誠陋羣品。而遊獨化。外死生無終始。所謂與天地並神明往。豈虛語哉。故至今讀其書。輒形神飛動。襟度灑然。而有忘形塵垢之外者。是以魏晉間諸名流。雅尚清言。恣情曠達。咸自此出。而仙家者流語道業。必宗之。即古今以儒術鳴者。往往探其旨趣。未嘗以為異也。豈非有資于世教者哉。故子輿氏力排異端為事。當時未嘗一言非之。夫子輿之右漆園。猶大成之尊柱下。其不與吾道異也奚疑。嗟夫後之解莊子者。無慮數十家。率曼衍支離。多不得其要本。茲又寓言之寓言哉。余每撫卷惜之。乃今焦弱侯徧取注疏。誦述錄其與莊合者為莊子翼。庶幾後之讀者。其有所折衷乎。余故並刻而為之敘。


萬曆戊子清明日

王元貞孟起父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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