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포스트 휴먼] 존재권력 7장 정동 사실의 미래적 탄생2022-11-30 08:4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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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권력] 7장 정동 사실의 미래적 탄생 발제_아라차



실체가 없는, 미래의 정동적 작동



우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 실제로 일어난 일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어떻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 일어난 일보다 더 현실적일 수 있는가. 부시는 이라크에서 대량 살상무기 창고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이라크로 군대가 들어갔기 때문에 미국이 더 안전해졌다고 말했다. 위험이 존재했던 하지 않았든, 그 위협은 공포의 형태로 전해졌다. 물질화되지 않은 위협은 언제나 정동적 현실성을 지닌다. 실제 사실과는 상관없이 공포라는 정동 사실로 인해 선제행동은 항상 옳은 것이 된다. 부시는 사담 후세인이 그럴 능력이 없었지만 그가 “할 수 있었다면 했을”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옳다고 했다. 이중 가정이다. 실제 사실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 어떤 확실성, 이는 정동적 사실에서 나온다. 선제권력의 대상은 “아직 완전히 긴급하지 않은 위협”이다. 부시의 정책기조는 긴급한 위험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분명하고 현재적인 위험은 말할 것도 없다. 정책이 실제적 기반이 없는데 어떻게 정치적 정당성을 가질 수 있었을까? 실제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그것을 붕괴시킬 수는 없었나? 없었다. 부시는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일년 후 상황은 달라졌다. 아부그라이브에서 자행된 고문 이미지들이 퍼지면서 광범위한 대항-정동적 상황이 펼쳐졌다. 부시는 선제 논리에 다시 시동을 걸려고 시도한다. 알카에다가 침공 당시 이라크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제는 침공이 옳았다는 이유가 됐다. 알카에다가 거기에 있을 수 있었더라면 그들은 그렇게 했었을 것이라고. 선제행동은 스스로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일 없이 그 힘이 행사되는 대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 즈음 몬트리올의 한 공항에서 탄저균으로 의심되는 밀가루 봉투가 발견되고 미국의 특수기동대와 언론은 합작하여 재빨리 선제 조치를 취한다. 이 사건은 백색-분말화된 테러에 대한 정동으로 남아 있다. 이후에도 테러의 위협에 대한 선제조치와 공격을 정당화하는 사건들이 수시로 발생했다. 위협의 정동적 현실은 전염성을 가진다. 위협은 경보 메커니즘을 통하여 그것의 가정적 결정을 객관적 상황 위에다 덮어씌울 수 있다. 또 위협은 구체성을 지니고 있어서, 아무런 실체나 객관적 신빙성 없이도 구체성에 부응하는 정도로 확고한 선제행동을 취할 수 있게 만든다. 


부시 행정부는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잠재적 위협을 재차 상기시키려고 911사건을 지속적으로 되새겼다. 911은 동종 사건들의 반복적 시리즈에 속한다. 그 시리즈가 증식해가는 사이 실제 공격과 위협의 구분은 희미해진다. 테러리스트 위협 시리즈는 다른 시리즈들 속으로 섞여 들어간다. 실제로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위협을 포함하여 서로 이질적인 바이러스 류의 시리즈가 있다. 인간 전염 조류 독감, 사스, 밀레니엄 버그 등이다. 결국 주변에 퍼져 있는 위협의 성격으로 인해 선제적 권력은 환경적 권력이 된다. 위협의 환경적 권력에 생태학적 접근법을 채택할 필요가 있다. 권력의 생태학 속에 있는 각 권력체제는 자체의 작동논리를 가지고 있다. 


작동논리는 스스로에게 자기-원인됨의 권력을 부여하는 식으로 존재론을 인식론에 결합시키는 것이다. 작동논리는 일종의 권력에의 의지이다. 권력에의 의지는 비인격적이다. 다른 작동논리들과 영속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외부성의 영역에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위협이 하나의 작동논리일 경우 어떻게 분석해야 할까? 작동논리가 정동적이고 대체로 실제 사실과 별개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 말고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모두 알다시피 실제로 현재하지 않지만 그것의 효과 속에서 실재적으로 작용하는 실체가 있다. 바로 기호이다. 기호는 객관적으로 부재하는 잠재능력적 힘을 현재하는 것으로 느끼게 만든다. 


수행적 행위나 말은 항상 자동 실행되는 명령이다. 명령을 일으키는 지표적 기호는 아무것도 확실하게 말하지 못하지만 여전히 하나의 형태를 전달한다. 우리를 놀라게 해서 현실에 깨어 있게 하고, 계속 주의를 강제로 집중시킨다. 하나의 기호-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것이 실제 경험이며 ‘지각이 드러내는 것 이상’보다 더 많을 것을 포함한다. 잠결에 불이 나지 않았는데도 경보가 울리면 상황을 생각해 보자. 불이 나지 않았지만 불의 위협은 계속 남아 있고 또 변이한다. 그런 느낌, 그 갑작스러운 법석이 여전히 거듭 깨우는 경험의 세계를 가득 채운다. 하나의 추상적 힘이 어떻게 물질적으로 결정하는 힘을 가질 수 있는지. 이것이 바로 위협에 대한 기호론적 해석이다. 


퍼스는 몸이 자신의 “본능”과 기호의 구성적 수행을 구별할 수 없다고 했다. 몸과 환경 사이 혹은 그 둘과 그와 관련된 기호 사이에 어떤 경계도 없다. 꿈과 사건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구별은 그 모든 법석 속에서 어떤 이행이 일어난 후, 다음의 결정적 느낌 속으로 안착할 때 나타난다. 이때 전달되는 형식은 결정적 느낌을 품고 있는 한없는 활성화에 대해 느껴진 역동적 형식이다. 순수 정동이다. 이것이 바로 기호가 “보여주는” 바이다. 위협의 정치적 존재론을 이해하려면 이러한 지표적 경험의 정동적 새벽시간(중간지대)으로 사유를 돌릴 필요가 있다. 지각이 드러내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사유는 틀림없이 후안무치한 형이상학이다. 분명 그것은 결코 나타나지 않는, 다음에 나타날 것을 조건 짓는 식으로 확장되어 간다. 화이트헤드는 이를 “나타남의 실재”라고 명명했다.


선제성의 작동 논리와 정동 사실의 생산은 다양하고 증식하는 형태로 삶의 창발이 이루어지는 오늘날의 특징이다. 세계가 이런 식으로 사변적이 될 때, 현재의 역사는 동일한 사변적 지형으로 떠밀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권력의 ‘절대적 조건부’와 역사에 ‘내적인 이유’가 없다는 것. 왜 그렇지 않아야 하는지 필연적인 이유가 없을 수 있고 없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존재하는 유일한 지평인 생성 위에서 계속하여 교전을 벌일 필요가 있다. 일종의 정동의 정치학에 참여하여 다른 색깔인 정동 사실들을 생산하는 대항-정치를 실천해야 한다. 또한 창의적으로 도피할 필요가 있다. 도피는 부정이 아니다. 그것은 완전히 출현하지 않은 삶의 형태들로 가득 찬 날 활동에서 넘쳐흐르는 세계 잠재력의 또 다른 인정이다. 안착하지 않는다. 어긋난 시간 위에서 행동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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