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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리딩 R&D] 과학혁명의 구조 12, 13장2023-04-19 15: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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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혁명의 구조] 12.혁명의 완결 ~ 13.혁명을 통한 진보 

                                                                   2023. 04. 19 걷는이

 

 

자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먼저 개인이나 소수의 마음에서 나타난다. 그들은 옛 패러다임에 의해 결정된 세계관과 법칙들에 약하게 얽매여있기 때문에 과학과 세계를 다르게 보는 방식을 익히고 능력을 성숙시킬 수 있다. 정상과학에 종사하는 연구자는 퍼즐 풀이자일 뿐, 패러다임의 검증가는 아니다. 패러다임의 검증은 퍼즐 풀이에서의 거듭된 실패가 위기를 초래한 이후에 경쟁적 패러다임 사이의 경합의 일부로서 일어난다. 이론에 대한 입증은 자연선택과도 같다.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존재하는 실제적 대안들 중에서 가장 적합한 것을 뽑아낸다. 어느 주어진 시기에 당면한 퍼즐들을 모두 풀 수 있는 이론은 없다. 정상과학을 특징짓는 퍼즐들을 정의하는 것은 기존의 데이터와 이론의 일치가 충분히 결정되지 않았고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과학철학자들은 이론의 입증 여부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증거에 비추어 그 이론이 입증될 확률성을 묻게 된다. 칼 포퍼는 반증, 즉 부정적인 결과 때문에 정립된 이론의 폐기를 불가피하게 만드는 시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포퍼가 말한 변칙현상의 경험은 그것이 기존 패러다임에 대한 경쟁 후보들의 출현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과학에 중요하다. 경쟁적인 이론 가운데 어느 것이 사실과 더 잘 부합하는가를 묻는 것은 매우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패러다임 사이의 경쟁은 증명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는 종류의 싸움은 아니다.

 

새로운 패러다임들은 전통적 패러다임의 용어와 장치의 많은 부분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것들을 전통적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고,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 용어, 개념, 실험은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 혁명이라는 분수령을 가로지르는 의사소통은 부분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경쟁적 패러다임의 제안자들은 서로 다른 세계에서 연구를 수행하기 때문에 같은 방향, 같은 관점에서 보면서도 서로 다른 것을 보게 된다. 그들 사이에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려면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개종을 거쳐야만 한다. 경쟁적 패러다임 사이의 이행은 공약불가능한 것들 사이의 이행이기 때문에 게슈탈트 전환처럼 일시에 일어나거나 또는 전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다른 패러다임으로의 이행은 강제될 수 없는 개종 경험이다. 정상과학의 옛 전통을 신봉하는 이들의 저항의 근원은 옛 패러다임이 모든 문제를 풀어주리라는, 자연이 패러다임의 틀 속에 맞춰진다는 확신에 있다. 그 확신이 정상과학, 즉 퍼즐 풀이의 과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새 패러다임을 받아들이도록 유도하는 방식에는 미적인 것에 대한 개인의 감각에 호소하는 논증들이 있다. 새로운 이론은 보다 간결하고, 보다 적합하고, 보다 단순하다고 이야기 된다. 이런 미적 요소들을 통해 새로운 이론으로 이끌리는 과학자는 소수이긴 하지만 패러다임의 궁극적 승리는 그 소수에 의존한다. 통상적으로 결정적인 논거들이 전개되는 것은 새 패러다임이 발전되고 수용된 뒤의 일이다. 위기에 처한 영역에서 논증과 반대 논증의 균형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그 영역 밖에서는 흔히 균형은 전통 쪽으로 기울곤 한다. 위기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선택된 특정 후보 패러다임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 어떤 근거가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모두를 설득할 수 있는 단일한 논증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개종이라기 보다는 전문 분야의 신념의 분포에서 전이가 증대되는 것이다. 새로운 관점이 효과적이라는 점에 설득된 많은 사람들이 정상과학을 수행하는 새 방식을 채택하게 되면서 소수의 저항자들만이 남겠지만 그들조차도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거의 모든 경우 과학이라는 용어는 확실한 방식으로 진보가 일어나는 분야에만 쓰인다. 기술이나 방법 또는 이념에서의 어떠한 변화가 과학을 진보되도록 만드는가? 그것이 과학이기 때문에 진보하는 것인가, 아니면 진보하기 때문에 과학인 것인가? 과학자이건 비과학자이건 단일 공동체의 입장에서 볼 때, 성공적인 창의적 작업의 결과는 진보여야 한다. 혁명의 시기에는 반대되는 패러다임의 요소들이 채택되는 경우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의심이 표출된다. 공통된 패러다임의 수용으로 과학자 공동체가 최초의 원칙들을 재검토할 필요성으로부터 해방되면, 구성원들은 가장 미묘하고 비전적인 부분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그룹이 새로운 문제들을 해결하는 효율성과 능력을 증대시킨다. 과학만큼 배타적으로 개인의 창의적인 활동이 그 전문 분야의 구성원들에게만 공표되고, 그들에 의해서만 평가되는 전문가 공동체는 없다. 과학자 공동체의 격리는 과학자로 하여금 풀 수 있다는 믿음의 근거가 충분한 문제들에 집중하게 한다. 자연과학자들과는 달리 사회과학자들은 주로 해결책의 강구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견지에서 연구 문제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더 넓은 사회로부터의 격리의 영향은 비결을 전수하는 교육의 성격에 의해 강화된다. 자연계 분야의 학생들은 독자적 연구를 수행하기 전까지는 주로 교과서에 의존한다. 과학자 교육의 최종단계에 이르면 교과서를 가능하게 했던 독창적인 과학 문헌으로 체계적으로 대치된다.

 

혁명은 대립되는 두 진영의 어느 한 쪽이 전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종식된다. 그들에게 혁명의 결과는 진보여야 한다. 과학의 존재 의미는 어느 특별한 유형의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패러다임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는 것에 달려 있다. 과학자는 자연계의 거동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심을 쏟아야 한다. 그를 만족시키는 해답은 많은 사람들에게 풀이로서 수용되어야 한다. 그것들을 공유하는 그룹은 잘 정의된 과학자의 전문 동아리 공동체가 된다. 과학자 공동체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통해서 해결되는 문제의 개수와 정확도를 극대화하는 고도의 효율적인 장치라고 할 수 있다. 혁명은 과학자 공동체의 관심 영역을 좁히고, 전문성을 높이며, 일반인이나 다른 그룹과의 의사소통을 저해한다. 과학의 깊이는 깊어지지만 그 폭은 그렇게 넓어지지 못 할 것이다.

 

우리는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간에 패러다임의 변화가 과학자와 과학도들을 진리에 가깝게 인도하고 있다는 관념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과학의 발전이 무엇인가를 향한 진화의 과정이 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과학을 자연에 의해서 미리 설정된 목표를 향한 활동으로 간주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러나 과학에 그런 목표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가? 다윈 이전 시대의 진화 이론들은 진화를 목표지향적 과정으로 간주했고, 인간, 동물군, 식물군에 대한 개념은 신의 정신 속에 존재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 목적론적 진화론의 붕괴가 다윈의 이론에서 가장 의미 깊고 수용하기 곤란한 문제였다. 잘 적응된 신체 기관들도 원시적인 태초로부터 출발해서 어떤 목표도 향하지 않고 꾸준히 진행된 과정의 산물이다. 다윈의 이론에서 자연선택은 생존을 위한 유기체들 간의 단순한 경쟁의 결과이다. 혁명의 완결은 과학자 공동체 내에서 미래의 과학을 수행하는 가장 적합한 길을 찾으려는 갈등에서 빚어지는 선택의 과정이다. 그 발전 과정에서 연속되는 단계들은 명료성과 전문성의 증대라는 특징을 띠게 된다. 증거에 의한 과학의 성장과 양립할 수 있는 자연의 개념은 과학의 진화적 관점과도 양립할 수 있다. 진화적 관점은 과학적 삶에 대한 관찰과도 양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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