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레드 마오] 12장 새로운 중국의 탄생2019-05-14 22:2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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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우內憂와 외환外患 사이에서

에레혼


  마오쩌둥은 1946년 8월 미국 기자 안나 루이스 스트롱과의 인터뷰에서 유명한 말을 남긴다. “모든 반동분자들은 종이호랑이입니다.(118쪽)” 이 구절에 관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마오의 통역가로 함께 한 위광성은 ‘종이호랑이(纸老虎)’라는 말이 서구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종이호랑이’는 원래 ‘허수아비(scarecrow, 稻草人)’로 번역되었다. 이것을 지켜본 마오는 ‘paper tiger’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며 번역을 수정했다고 한다. 마오가 인터뷰에서 ‘제국주의’로 분류한 대상들이 ‘언뜻 보기에는 무서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강조하려 했다면, 마오의 번역이 더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종이호랑이와 허수아비 중 어떤 표현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 말의 이면에서는 마오쩌둥의 자신감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자신감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새삼스레 질문을 던지기엔, 마오는 객관적으로 불리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줄곧 승리를 장담해왔다. 그렇지만 인터뷰가 진행된 1946년은 대장정, 항일시기 보다 더 공산당에게 불리한 시기였다. 국공내전 초기만 해도 장제스는 중국 영토 전체를 차지하는 데 3개월이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국민당은 인민해방군보다 세 배 많은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었다. 일본이 패퇴하며 버리고 간 무기도 모두 국민당군의 차지였다. 하지만 국민당은 자신들의 기회를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


  인민해방군은 홍군 시절부터 몸에 밴 전투 원칙을 국공내전에도 동일하게 적용했다. ‘(1) 인민해방군은 지는 전투를 피한다. (2) 상대가 국민당이더라도 항복한다면 아군으로 받아들인다.’ 여기에 전쟁에 대한 마오 특유의 관점이 더해졌다. 마오쩌둥은 징강산 시기에 들은 이야기를 응용하여 전쟁에서 싸우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적 주변을 배회하는 전략 역시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인민해방군과 확전을 벌일 수 없던 국민당군은 지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작전을 바탕으로 1948년 인민해방군은 옌안을 탈환했고, 대조적으로 국민당군은 끊임없이 약점을 노출했다.


  주목해야할 점은 국ㆍ공의 군사력 차이가 본격적인 전쟁 이후에 드러났다는 사실이다. 즉, 이런 객관적 지표를 나열하고 두 군대의 정황을 비교하는 것은 전쟁 초반부터 마오가 품었던 자신감의 원천을 파악하는 것과 연관성이 적다. 마오가 가장 신뢰한 것은 다소 비과학적으로 보이는 ‘대중의 집단적 의지(116쪽)’였다. 절체절명의 위기가 다가올 때마다 마오는 결과로 증명했고, 승리 이후에는 항상 인민 대중의 의지에 공을 돌렸다. 공산당의 실권을 잡은 이후부터 중국이 수립될 때까지 마오쩌둥이 줄곧 그려온 상승곡선을 보면, 당시에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반박을 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마오가 과거부터 줄곧 올바른 견해를 지녔기 때문에 미래에도 올바르지 않을까?(81-82쪽)” 인민해방군은 1948년 9월부터 불과 4개월동안 동북지역, 양쯔강 북쪽, 그리고 톈진과 베이징을 함락하며 승리에 쐐기를 박는다. 이번에도 마오가 옳았고, 공산당은 대륙의 패권을 쥐게 되었다.


  중국 수립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마오쩌둥은 모스크바로 향한다. 그만큼 중국 공산당은 장제스가 수행해온 외교 업무를 수정하고자 하는 야욕이 컸다. 스탈린도 마오의 방문 목적이 중소우호동맹조약 파기에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는 회담 자리에서 일부러 핵심 사안을 거론하지 않기도 하고, 의도적으로 마오와 접견을 피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구 언론들의 이목이 중소협정에 쏠리기 시작하면서 스탈린은 부담을 느꼈다. 무엇보다 소련은 회담 결렬로 인해 비위가 상한 중국이 서구권과 접촉하며 냉전 구도에 변동이 생길까 두려워했다. 중국의 패권을 쥔 이후 첫 시험대라고 할 수 있는 중소 회담은 마오의 의도대로 마무리되었다. 이렇게 1950년 여름이 다가오기 전까지, 국공내전으로 황폐화된 중국을 재건하는 사업은 무리없이 진행되는듯 보였다.


  중국에서는 한국전쟁을 ‘조선전쟁(朝鮮戰爭)’, 혹은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이라고 부른다. 전자는 중국에서 줄곧 한국을 조선이라고 불러오던 관습에 따른 표현이며, 후자는 미국과의 대결 구도를 상정하고 중국이 “위대한 승리(149쪽)”를 거두었음을 부각하려는 의도를 가진 용어이다. (중국 공산당에서 편찬한 공식 역사서인 《중국공산당역사》에서도 한국전쟁을 항미원조전쟁이라고 지칭한다.) 하지만 전쟁을 통한 선전은 추후에 의도된 것이고, 1950년 6월 25일만 해도 마오는 전쟁 참전에 있어 적극적 의지를 표명하지 않았다.


  필립 쇼트는 마오가 두 가지 이유에서 한국전쟁을 반기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첫번째로 중국의 입장에서 미국이 한국전쟁에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예측이 어려웠으며, 두번째로 당시 중국은 타이완으로 침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미국은 한국 전쟁에 깊숙하게 개입했으며, 사태가 급박하게 변화하자 마오는 (항일시기 장제스가 그랬던 것처럼) ‘내부를 먼저 안정시키고 외부의 적을 물리치는(安内攘外)’ 식의 문제 처리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이제 남은 일은 어떤 명목으로 참전하고, 언제 전쟁에 개입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북한을 돕기 위한 원정군은 ‘중국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도덕 개혁과 공산주의 단결을 기치로 내세웠다. 이런 명칭 뒤에는 중국의 군사 개입이 국가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었다. 그리고 중국은 전쟁 개입 시기를 “미국이 북한으로 진입하는 순간(141쪽)”으로 정했다. 스탈린의 전쟁 지원에 대한 소극적 태도, 공산당 수뇌부의 참전에 대한 토론 과정에서 참전 시기가 미뤄졌지만, 10월에 남한과 미국이 압록강까지 진격했을 때 중국이 참전한 것은, 대장정 시기에 ‘상대를 깊숙한 곳으로 유인한 이후에 공격하던’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남과 북이 38선을 마주한 채로 휴전 협상이 이뤄진 일은 마오의 입장에서는 미국과 전쟁에서 비긴 것으로, 더 나아가 “미 제국주의는 그렇게 무시무시 하지 않”고 중국이 “그들을 공연히 두려워할 필요가 없(149쪽)”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한국전쟁은 마오에게 있어 자국의 우수함을 세계에 알릴 기회처럼 이용되었으나, 소련과의 외교적 신뢰 관계를 재검토해야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또한 마오쩌둥은 자신의 아들 마오안잉이 한국전쟁에서 사망하는 개인적 비극을 경험하기도 한다. 


  한편, 전쟁으로 인해 외부 사정이 어지러웠던 1950년대 초반에 중국은 내부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마오는 내부의 안정과 외부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특정 문제에 우선 순위를 두지 않았을 뿐, 중국은 건국 초기에 내부 질서를 통제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실시했다. 국가 안정을 위해 공산당이 내건 구호로는 다양한 이름이 등장했지만 각각의 정치 운동이 작동하는 방식은 유사했다. 이 운동들은 기시감을 자아내고, 그리고 앞으로도 몇 번 반복될 중국 현대사 주요 사건들의 전조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중국 공산당은 갑작스럽게 광활한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고, 중국 수립 초기에는 티베트ㆍ몽골 등의 지역을 평정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각지에서 벌어지는 반란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전쟁은 이러한 분위기에 말 그대로 기름을 부었다. 1950년을 전후로 하여 중국 내의 외국인들에 대한 배타적 태도와 반미감정이 증폭되었으며, 마오는 민중들의 감정을 통치에 이용하고자 했다. 공산당의 정치적 개조는 농촌에서는 토지 개혁을 빌미로, 도시 지역에서는 부패 타도를 목적으로 이뤄졌다. 


  농촌에서 이뤄진 토지 개혁은 군중집회에서 지주를 처형혹은 구금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러한 교정이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것에 우려를 표명한 마오의 지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토지 개혁은 1953년에 중국 사회에 지주 계급 자체가 사라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도시에서는 51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삼반운동’ㆍ’오반운동’ㆍ’사상 개조 운동’이 실시되었다. 이 운동은 지식인 중에서 특히 유학 경험으로 인해 자산계급 사상을 품고 있는 인물들을 타겟으로 진행되었다. 52년에 마오는 자산계급을 투쟁의 대상으로 지목함으로써 지식인들 타도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극에 달했으며, 이른바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은 마오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사상을 고치기 위해 노력했다.


  내부의 분란을 잠재우려는 목적으로 외교적 문제를 끌어들이는 것은 지금까지도 활용되는 정치 전략이다. 마오 역시 한국전쟁을 자국 정치에 최대한 이용하여 국가 수립 초기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바로잡으려 했다. 12장을 읽다 보면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외부의 변수가 없었다면 중국에서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는 일이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을까?’ 필립 쇼트는 이 물음에 냉정한 대답을 내놓는다. 만일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여전히 지주를 없애고 지식인을 통제하려는 시도에는 변함이 없었을 것이라고.(158쪽) 즉, 마오가 자신의 정책이 실현될 수 있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 어떤 조치라도 취했으리라는 해석이다. 이런 독단적인 과정을 거친 중화인민공화국은 탄생과 동시에, 탄생이라는 표현에 걸맞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그럴듯한’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마오는 고작 ‘그럴듯한’ 모습에 만족하지 않았고, 중국이 더욱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고 믿었다. 이후 중국에서 벌어지는 사건들도─운동이든 혁명이든 대중이 함께 움직일 수만 있다면, 중국이 선진국 반열에 들어서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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