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시사] 정치적 올바름이 아닌 저마다의 올바름에 대하여2019-06-13 07:2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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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저마다의 올바름에 대하여.hwp (27.5KB)

개성 넘치는 네 명의 토론자가 토론을 마쳤다. 각자가 할 말을 대부분 했고, 심지어 같은 말을 반복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기본적인 용어상의 합의에도 이르지 못했다. ‘정치적 올바름은 과연 진보라고 할 수 있는가?’를 토론하기는커녕, ‘정치적 올바름’을 각자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조차 서로에게 이해시키지 못했다. 이 이해시키지 못하는 지점에서 진영은 나뉜다. 서로를 이해할 토대가 없으므로, 토론자들은 서로를 부정하고 무시할 수밖에 없다.

 

미셸 골드버그(이하 미셸)는 조던 피터슨(이하 조던)에 반대하기 위해 토론에 참석했다. 미셸이 조던에게 가지는 반감의 뿌리는 깊다. 미셸이 보기에 조던은 소수자들이 제기하는 모든 차별의 문제를 무화시키려 한다. 미셸은 조던이 계층구조에 대한 모든 도전과 문제제기를 ‘정치적 올바름’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본다. 조던의 입장에서는 그런 도전과 문제제기가 ‘정치적 올바름’이 아니라 폭력이나 무질서와 다름없다.

 

미셸이 정치적 올바름을 전적으로 진보라 믿는 것은 아니다. 미셸이 이해하는 정치적 올바름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이다. 사람들을 올바르게 인도할 수 있는 일종의 도덕적 지침 같은 역할을 거기서 기대한다. 표현의 자유 때문에 혐오 발언을 규제하지 않는 미국에서는 소수자들이 이런 보호나 지침을 기대하는 경향이 있는 듯 보인다. 미셸의 입장은 마이클 에릭 다이슨(이하 마이클)의 입장과 유사하다.

 

미셸과 마이클은 정체성 정치에 대한 조던의 비난 앞에서, 소수자로서 자신들이 개인으로 존재할 기회가 거부되었다고 말한다. 그 때문에 소수자들이 정체성 정치에 회의하면서도, 정체성으로 집단화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마이클은 지식이 개인에게 다르게 이해되는 근거를 육체에서 찾는다. 지식은 육체 안에서 차이를 만들어낸다. 흑인들이나 여성들은 그 차이를 느끼면서, 백인들이나 남성들도 그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차이를 감각하지 못하는 육체는 그런 요구를 불쾌하게 여긴다. 마이클이 조던을 ‘고약한 백인’이라고 조롱할 때, 조던은 조롱의 이유를 자신이 백인인 데서 찾지 않는다. 조던은 마이클이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무례한 행동을 했다고 여길 뿐이다. 당연히 마이클의 발언을 흑인에 대한 차별이나 저항의 관점에서 ‘미러링’으로 이해하지도 않는다. 비슷한 맥락으로 게이인 스티븐 프라이(이하 프라이)는, 이성애 관계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느끼는 폭력에 대한 불안을 이해하지 못한다.

 

‘도덕적으로’ 올바른 마이클의 주장대로, 우리는 신체에 따라 지식을 저마다 다르게 받아들인다. 모두에게 올바른 주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저마다에게 올바른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관건은 이해하려는 의지보다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의지의 문제이다. 조던은 ‘페미니즘’이나 ‘공산주의’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조차 거부한다. 거부하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존재를 부정해버리려 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거부와 몰이해와 부정의 입장은 그에 대립하는 입장을 구성하게 마련이다. 당연하게도 조던은 미셸의 공격대상이다.

 

저마다의 올바름이 서로 합의를 이룰 여지는 없을까? 각자 다른 신체는 서로를 모르는 채로, 알고 싶지 않은 채로 살아가야 할까? 하나 다행스러운 점은 우리가 처한 조건이 변하듯, 육체도 변한다는 점이다. 젊은이는 누구나 늙은이가 되고, 비장애인은 언제든 장애인이 될 수 있다. 드물기는 하지만 성을 바꿀 수도 있고, 성형을 통해 다른 신체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 어떤 정체성이든 우리를 확고하게 가두지 못한다. 변화무쌍한 삶, 변화무쌍한 육체만이 우리가 서로의 올바름을 이해할 토대가 되어줄 것이다. 진보를 찾으려면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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