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푸코] 성의 역사 1: 제1, 2장 발제2019-09-19 15:43:48
작성자
첨부파일성의 역사 1권 1,2장 발제.hwp (34KB)

성의 발견 - 권력과 쾌락이 만날 때

   

《성의 역사 1》 제1장 우리, 빅토리아 여왕 시대풍의 사람들, 제2장 억압의 가설

 

우리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19세기)의 이중적인 성생활 규범이 오랫동안 우리를 지배해왔다고 믿는다. 가정 내에서 생식을 위해 이루어지는 부부의 합법적 성생활을 제외하고 다른 형태의 성은 금기시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때 생식기능에 부합하지 않는 성은 침묵을 강요당하고 억압된다. 성의 역사를 억압 증대의 역사로 보는 시선은 프로이트를 지나며 근대까지 계속된다. 입헌군주인 빅토리아 여왕 시대는 부르주아지의 시대이기도 하다. 성 억압의 담론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비판의 담론과 성급하게 연결된다. 노동력 동원과 양립할 수 없는 방만한 성관계가 억압의 대상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들은 오래 믿어온 만큼 설득력이 있는 주장들이다. 푸코는 이 주장들이 틀렸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조금 낯설고 다른 방식으로 성과 권력, 지식의 관계를 조망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먼저 푸코가 주목하는 지점은 억압이다. 성과 권력의 관계가 억압적이라는 주장은 아주 흔하며, 우리에게 이상한 만족감을 준다. 푸코는 그 만족감이 어떤 이득에서 오지 않을까 의심한다. 억압이 금지와 부재, 침묵으로 연결된다면, 단지 침묵을 깨고 말하는 일만으로도 위반의 몸짓이 된다. 특히 성에 관한 억압은 성에 대한 침묵을 깨는 위반으로 연결되기 쉽다. 이때 억압은 혁명과 쾌락을 공존시키는 조건이다. 성에 대해 말하기는 일종의 쾌락이면서 동시에 위반을 통한 혁명을 꿈꾸게 한다.

 

이때 누군가 성이 억압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주장은 아무런 즐거움도, 이득도, 성과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오히려 성이 억압된다고 주장할 때의 즐거움과 이득과 성과가 훨씬 많다. 아무도 원하지 않을지 모를 분석을 푸코가 시작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아무런 즐거움도, 이득도, 성과도 없어 보이는 주장을 이제부터 푸코가 펼쳐 보이려 한다. 푸코의 물음은 ‘왜 우리는 억압받는가’가 아니다. ‘왜 우리는 커다란 열정과 강렬한 원한을 품고 억압받고 있다고 스스로 말하는가'이다. 푸코는 세 지점에서 “억압의 가설”에 의혹을 던진다. ① 성 억압은 정말로 자명한 역사적 사실일까?, ② 권력이 행사되는 일반적인 방식이 억압일까?, ③ 억압에 대한 비판은 권력 메커니즘을 차단할 수 있을까, 억압과 억압에 대한 비판은 과연 다른 것일까?

 

푸코가 이 의혹들을 통해 보여주려는 것은 억압의 가설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가설을 다르게 세워놓고 성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푸코의 연구스타일은 무언가가 ‘있음(혹은 없음)’을 전제하는 가설에 대항하기 위해 그 가설의 오류와 비판지점에 매달리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 가설을 세워 무언가가 ‘없음(혹은 있음)’에서 연구를 시작해나간다. 어떤 연구도 가설로부터 출발하며, 완벽하게 증명될 수는 없다. 푸코는 성 억압으로부터의 해방보다는, 성 억압 담론에서 유발된 권력효과에 관심을 가진다. 인간의 성생활에 작동하는 권력-지식-쾌락 체제는 왜, 그리고 어떻게 작동하는가, 하는 문제들. 성 담론의 생산을 통한 권력효과에서 모종의 “지식의 의지”를 도출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우리는 이 책의 제1장부터 심하게 낚였다. 푸코는 애초에 ‘성’의 역사를 쓰려는 마음이 없었다. 오히려 ‘성’을 근본적인 문제로 보고 뭘 쓸 수 있으리라는 게 환상이라는 걸 보여주려고 했다. 성 억압을 거론하면서 푸코가 드러내려는 문제들은 권력의 기술과 지식의 의지이다. 금지와 검열 같은 면들은 권력의 기술과 지식의 의지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렇게 보면 16세기 말부터 성의 담론화는 제한되는 게 아니라 선동되었고, 권력은 여러 형태의 성생활을 확산시키고 확립했다. 지식의 의지 역시 성생활의 과학을 구성하는 데 몰두했다. 새로운 가설을 세우면서, 그동안 보지 않으려 했던 역사적 사실들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통념과는 다르게 성이 억압되었다고 말하는 시기에 오히려 성 담론의 폭발이 감지된다. 종교개혁 이후 구교 내부에서는 성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를 하지 않는 방식으로, 고해성사가 자주 요구되었다. 행위에 대한 고백은 물론이고 상상과 욕망도 고해와 영성지도의 대상이 되었다. 욕망은 육신의 행위에 계기를 부여하는 일종의 장애로 발견되고, 인식되었다. 성과 육체, 욕망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해야 하는 책무는 수도원의 금욕적 전통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고백의 기술, 고백의 요구는 점점 늘어난다. 권력은 성을 생산하게 하였으며, 금지로만 설명될 수 없는 성 담론의 생산설비가 갖추어지고 있었다.

 

18세기에 이르면 권력의 메커니즘에 성 담론이 필수 요소로 자리를 잡았다. 의학이 지식의 대상으로 성과 육체를 포섭했으며, 법과 경찰이 성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18세기에 혁신적인 권력의 기술은 ‘인구의 등장’이라 할 수 있는데, 인구와 성은 아주 밀접하다. 도덕적 권고와 정치적 필요에 의해 국가는 시민의 성을 더 많이 알고자 했다. 어린이의 성도 단순히 금지된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말하도록 강제되었다. 성이 덜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관점에서 다르게 이야기되며 다른 효과를 얻게 되었다. 문제는 성을 ‘말함/말하지 못함’의 이분법적 구분 자체가 아니라, 그 구분의 방식이나 양자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어린이나 청소년의 성은 성을 공적인 문제화하면서, 정해진 방식으로 행동하거나 말하도록 만드는 두드러진 예이다. 18세기 교육제도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의 성에 관한 담론은 형태가 세분화되고, 실행지점이 확정되며, 내용이 체계화되고, 화자의 자격도 정해졌다.

 

권력의 강화는 담론의 증가와 연결된다. 성은 어느새 사법의 영격, 사회적 통제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성에 관한 담론은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권력행사의 수단으로 증가했다. 성은 저항이 아니라 권력이 요구하는 진술의 절차, 진술의 장치로 존재한다. 성에 관한 담론은 하나가 아니며, 갖가지 제도에 관련되는 일련의 도구 전체에 의해 생산되는 다수의 담론이다. 인구통계학, 생물학, 의학, 정신의학, 심리학, 윤리학, 교육학, 정치평론에서 형성된 서로 다른 담론의 폭발 속에서 성 담론은 분산되고 증식되었다. 성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비밀을 깨뜨려야 한다는 주장은 어쩌면 담론을 유발하라는 권력의 메커니즘과 지식의 의지가 요구하는 명령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푸코는 성의 비밀에 실체가 없을 것이라 본다. 오히려 성은 모든 선동과 성 담론의 확산에 꼭 필요한 허구에 가깝다.

 

자, 이제 푸코의 속셈이 드러났다. 그러니까 푸코는 ‘성’이라는 영역을 일종의 허구로 본다. 권력의 메커니즘과 지식의 의지가 담론의 확산을 위해 필요로 하는 허구. 푸코의 권력론에서 중요한 것은 억압보다 실천이다. 푸코는 우리가 권력에 의해 억압받는 게 아니라, 각자 그물망 속에서 권력을 실천하고 있다고 본다. 성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물망 속에서 성 담론을 생산하며, 성을 통해 스스로를 규율한다. 결국 푸코가 ‘성의 역사’를 통해 밝히려는 것은 성이 허구이며, 우리가 성을 통해 권력을 실천한다는 사실이다. 이쯤 되면 우리가 푸코에게 어디까지 뒤통수를 맞을 것인지를 기대하며 이 책을 따라가 봐도 좋겠다.

 

우리가 주변적 성생활이라고 부르는 형태의 성생활도 성 담론의 폭발과 함께 출현했다. 억압되는 것처럼 보이는 동시에 의학을 통해 질병으로 규정되어 관리되는 양면적 형태였다. 의학의 관리를 통제와 감시인 동시에 일종의 관용으로 본다면, 엄격함에 대한 보충적 책략이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용의 수준이나 억압의 정도가 아니라, 행사되는 권력의 형태이다. 의학이 개인의 쾌락을 관리하기 위해 명명 작업을 시작할 때, 여기에서 행사되는 권력은 금지와는 다른 형태이다. 명명은 악습을 증식시켰고, 그만큼 권력의 거점과 효과도 늘어났다. 성생활에 관한 세심한 분류와 명명은 그것들이 현실에 산재해 있음을 깨닫게 해 주었고, 개인의 내밀한 성생활을 그 분류와 명명 속에 통합했다. 권력이 쾌락을 에워싸는 형태가 되자, 권력은 더욱 관능적으로 행사되면서 쾌락과 연결되었다.

 

19세기의 부르주아 사회에는 성적 도착이 심하게 분산되어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 도착의 형태들이 아니라, 부르주아 사회가 육체와 성에 작용하게 한 권력의 유형이다. 권력은 금기보다는 특이한 성생활의 확대를 통해 작용한다. 성생활의 다양한 형태들을 추적하고, 개인의 성생활을 명시하고, 잡다한 성생활를 새로 만들어내어 정착시킨다. 성적 도착의 확립은 그 자체로 수단이자 결과이다. 성과 쾌락에 대한 권력의 관계는 주변적 성생활을 격리, 강화, 공고화하면서 퍼져나간다. 쾌락과 권력은 서로 상쇄하거나 배척하지 않으며, 서로 겹치고 활성화한다. 국지적으로 금지가 이루어진다 해도 메커니즘을 통해 특수한 쾌락의 급증과 성생활의 증가가 보장된다.

 

성에 대한 관심과 절제하는 태도를 동시에 가지면서, 우리는 성을 스스로 금지하거나 저항의 수단으로 삼는다. 성실한 노동자답게 우리는 권력과 쾌락의 역학 속에서 성 담론 역시 충실하게 생산해내고 있다. 그 권력과 쾌락의 역학 속에 수십 년 치 우리의 희노애락이 담겨있고, 아마 앞으로도 담길 터이다. 착취당한 노동보다 덜 억울할 리가 없다. 충실하게 찾아오는 허무를 막을 도리도 없다. 그저 지금껏 살아온 대로 다시 성실하게 눈을 부릅뜨고 책을 읽을 뿐.

 

댓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
error: 글 복사가 불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