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차이나] <잔향의 중국철학> - 자타관계와 중국2022-03-26 23: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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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타관계와 중국

 

우림

 

          중국은 항상 그랬던 것 같다. 고유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항상 상대화되어 이해되는 대상이었다. 기존의 학계가 서구 중심적인 학문의 풍토가 잘 구축되어 있어서일까, 항상 중국을 그 자체만으로 보기보다는 기존 이론의 적용, 기존의 그 무언가와의 비교를 통해 연구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문제라는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다. '중국을 중국으로 온전히 보자’라는 문제의식 하에서 이루어진 논의들은 그렇다면 중국을 제대로 봤을까.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중국을 바라보고자 하는 외부의 시선에 중국인들은 ‘중국식, 중국 특색의’ 그 무언가를 언급하면서 외부의 시선은 부족하며, 중국의 해석, 중국의 고유성을 언급했다. 중국이라는 복잡다단한 실체에 다가가는 발전적인 논의보다는 오히려 외부자가 중국의 그 무엇을 답습하거나, 배워보아야 하거나 하는 상황들이 왕왕 생겼다.

 

          일본인 학자가 중국 철학의 해체, 탈구축이라는 문제의식 하에서 언어와 정치의 관계를 이끌어가고 있다. 물론 책 내용을 따라가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버겁지만, 중국 내부담론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외부의 시선에서 이를 해체하고 (중국인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안에서 발생하는 언어와 정치의 관계를 이끌어간다니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책을 읽어나갈수록, 특히 발제를 맡은 6~8장의 내용에서 나타나고 있는 자-타관계를 읽을수록 앞서 언급한 중국연구에 있어서의 경험들이 떠올랐다. 6, 7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자기발출의 형이상학에 근거한 자타관계에서 ‘우리’에 해당하는 조건들은 실로 추상적이고 모호할 수 밖에 없다. 외부자는 절대 모를 ‘고유성’에 다가가기 위해 ‘격물치지’를 해야 하며, 계몽될 준비를 해야하며, 중국이라는 전달공간에 머무르기 위해 역사를 자각해야 하는... 이러한 기준의 틀은 배제당한 자들의 눈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과연 중국이라는 언어의 전달공간은 무엇이며 어떠한 뜻에 방점을 찍었기에 불교도라서, 혹은 백화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여 배제한다고 하는 것인가.

 

          물론 ‘우리’로 묶어질 수 있는 오리지낼러티(여기서는 그 애매모호한 도통이라는 명맥)을 상정하고 그 기준에 따라 자-타관계를 구분하며, 이를 통해 본인들 스스로는 자기를 인식하고 강화하는 과정들은 사실 여러 공동체에서 자기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한 일반적인 과정이라 볼 수 있다. 다만, 7장 마지막에서 저자가 지적했듯이 “스스로도 밖으로부터 도래한 새로운 원리에 대한 중국의 자기인식의 한 형태”를 통과한 채로 스스로의 고유성을 확보했다면, 이를 인정하고 중국이라는 열린 공간을 한번쯤 상정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고, 그것이 현재의 중국학계에도  (되지는 않겠지만) 반영되었으면 한다.

 

 

 

사족 - 한나 아렌트와 중국철학? 

 

          이러한 생각과 감정에 사로잡혀 책을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나 아렌트가 등장했다. 도대체 저자가 한나 아렌트와 레비나스(9장)을 왜 다루고 있는지, 이 책의 3부를 어떠한 기능으로 봐야할지 판단해야 할지 궁금하다. 한나 아렌트는 이 책에서 제한된 복수성을 바탕으로 한 건전한 공공공간의 형성을 강조한다. 자타논리가 여기서도 반영되는데 개인의 고유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공공공간은 분열되지 않도록 ‘타인과의 잠재적 동의’라는, 어떻게 보면 타인과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보편성을 담보하는 듯한, 이야기를 한다. 아렌트를 잘 모르지만 8장 초반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하나의 생각’에 대한 판단을 거부해야 하며, 판단을 거부해야하는 것조차 거부해야 한다는데, 후반부에 나오는 ‘타인과의 잠재적 동의’는 무엇인가. 여기서 공동체의 일원을 ‘광인’이라는 ‘타’를 배제한 것으로 규정한다. 특정한 조건을 통과해야만 공동체의 성원이라는 것도 이해할 수 없지만, 이러한 공동체의 성원이 과연 사사로운 것에서 벗어나 공동체를 위한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것이 과연 실제에서 가능할까. 언어가 교환되는 공동체, 전달공간, 공공의 공간을 상정하고 이에 대한 아렌트와 레비나스의 논의는 도대체 중국철학과 어떠한 관련이 있을까. 3부의 내용과 다음 주 논의가 기대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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