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코스모스] 인간의 사고방식과 세계의 작동방식2020-09-21 09:3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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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칼세이건 코스모스 34장 발제.docx (21.5KB)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3장 지상과 천상의 하모니, 4장 천국과 지옥


어릴 때 북극에 사는 이누이트 소녀의 모험을 다룬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강요된 결혼을 거부하고 툰드라로 용감하게 떠난 소녀의 이야기였다. 소녀는 밤하늘의 별을 보고 날짜와 계절, 방향을 인식할 수 있었고, 앞으로 바람이 어느 쪽에서 불어올지도 예측할 수 있었다. 지금 내가 툰드라 한가운데 떨어지게 된다면, 밤하늘을 보고 무언가를 알아챌 수 있을까. 시계와 달력의 도움 없이 나는 날짜와 시간을 알 수 없고, 계절이 가져오는 온갖 변화들을 예상할 수도 없다.

칼 세이건이 들려주는 천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그 이누이트 소녀가 떠올랐다. 고대의 사람들은 하늘의 움직임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지금 우리는 천문학에 그다지 많은 관심을 두지 않지만, 고대인들은 생존의 필요를 위해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해야만 했다. 계절의 변화, 수렵과 농경에 유리한 시기, 인간의 생몰 시점 등을 기억하고 예측하는 일이 천문학을 통해 가능해졌다. 천문학을 통해 관측과 수학, 문자가 발달했다. 초기의 천문학은 점성술과 분리되지 않았다.

나는 한갓 인간으로서 하루 살고 곧 죽을 목숨임을 잘 안다. 그러나 빽빽이 들어찬 저 무수한 별들의 둥근 궤도를 즐겁게 따라 가노라면, 어느새 나의 두 발은 땅을 딛지 않게 된다.” 지구 중심 설과 천동설을 주장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역시 이런 말을 남긴 열정적인 천문학자였다. 1543년 코페르니쿠스는 태양 중심설이라는 대담한 가설을 제안했다. 이에 심기가 불편해진 가톨릭 교회는 1616년 코페르니쿠스의 저술을 금서 목록에 포함시켰다. 종교개혁에 앞장섰던 루터조차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16세기 말 태양계 구조의 근본을 연구했던 케플러 역시 코스모스의 신비는 신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이들에게 천문학은 세계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계의 작동원리를 이해하는 일은 곧 신의 뜻을 이해하는 일이었다. 천문학자인 동시에 점성술사이며, 화학자인 동시에 연금술사이기도 했던 이들은 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우주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안타깝게도 케플러는 연구를 거듭하면서 세계의 완전성에 의심을 품게 되었다. 이를 테면 별들의 궤도가 완전한 원이라는 환상 같은 것이었다. 완전성에 대한 환상을 버림으로써, 천문학자들은 세계의 실제에 더 다가갈 수 있었다. 중력이나 만유인력의 존재를 예견했던 케플러가 최초의 공상과학소설을 썼다는 사실 역시 흥미롭다. 케플러의 소설은 지구의 외부인 달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케플러의 상상을 통해 천문학의 시점은 어느새 지구의 외부로 이동했다.

칼 세이건은 케플러를 소개하는 일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케플러가 인류 최초로 천체의 운동을 설명하면서 신비주의를 배제했다고 평가한다. 케플러의 연구를 통해 지구는 코스모스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물러났다. ‘천문학은 물리학의 일부다라고 단언한 케플러는 인류사의 마지막 과학적 점성술사이며, 최초의 천체물리학자였다. 케플러의 연구는 그의 죽음 이후 아이작 뉴턴의 연구를 통해 결실을 맺게 된다.

다수가 그른 길을 걷지 않는 한, 나 역시 다수의 편에 서고 싶다. 그 까닭에 나는 가능한 많은 이들에게 과학을 설명해주려고 무진 애를 쓰는 바이다.” 케플러의 고군분투는 뉴턴에게로 이어진다. “세상이 나를 어떤 눈으로 볼지 모른다. 그러나 내 눈에 비친 나는 어린아이와 같다. 나는 바닷가 모래밭에서 더 매끈하게 닦인 조약돌이나 더 예쁜 조개껍데기를 찾아 주우며 놀지만 거대한 진리의 바다는 온전한 미지로 내 앞에 그대로 펼쳐져 있다.”

칼 세이건은 케플러와 뉴턴이 발견한 법칙들이 인간의 사고방식과 세계의 작동원리가 서로 공명함을 밝혀냈다고 말한다. 단순한 수학법칙은 자연 전체에 적용되며, 자연의 법칙이 천상에서도 적용된다는 말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은 이제 어떤 법칙이 모든 곳에 적용되지 않더라도 법칙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어쩌면 모든 곳에 적용되는 법칙이란 신처럼 신비로운 존재의 힘을 빌려야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인간의 사고방식이 변화하는 것처럼 세계의 작동원리에 대한 이해가 변화한다면, 다시 말해 세계의 작동원리를 다르게 이해함으로 인해 인간의 사고방식이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칼 세이건의 평가는 여전히 유효하다.

혜성에 대한 고대인의 두려움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천체의 움직임을 자세히 알 수 없었던 고대인들은 혜성을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 혜성의 움직임을 관측하고 예상할 수 있게 된 지금 혜성은 오명을 벗고 반가운 손님이나 특별한 관측기회로 여겨진다. 혜성의 존재로 지구인들은 지구 역시 특별한 공간이 아니라 우주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행성임을 인식한다. 지구는 핼리 혜성에게 있어 76년마다 한 번씩 스쳐가는 어떤 지점에 불과하다.

칼 세이건이 과학의 역사에서 상상력만큼 중요하게 여기는 일은 자유로운 탐구이다. 어떤 가설이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억압하는 일이 과학계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칼 세이건은 이런 태도가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라고 말한다. 여기서 진리를 추구한다는 말은 진리가 절대적이거나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언제든 갱신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말처럼 들린다. 칼 세이건이 말하는 과학의 진리는 혁신적태도를 통해 추구된다. 진리를 추구하는 일은 진리를 숭배하는 일과 다르며, 거듭해서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오랫동안 밤하늘을 올려다보지 않고 살았다. 천문학은 학자들의 영역이라고만 여겼고, 밤하늘을 관찰하면서 나아갈 길과 해야 할 일을 찾던 이누이트 소녀를 잊고 살았다. 시계도, 달력도 없이 드넓은 툰드라, 혹은 사막에 서 있는 상상을 해 본다. 별을 관측하는 일은 여전히 인간의 생존과 무관하지 않다. 인간의 사고방식은 세계의 작동방식과 공명한다. 세계의 작동방식을 이해하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사고하고 살아가는 일이 가능하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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