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좀비학] 좀비, 이름 없는 자들의 이름2021-02-03 20:4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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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좀비학 서문, 1장 발제.docx (21.4KB)

1. 좀비는 누구인가

대중문화에는 각 시대마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괴물들이 등장한다. 사탄이나 귀신, 늑대인간이나 뱀파이어 같은 괴물들 말이다. 이 괴물의 형상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공포와 혐오가 담겨있게 마련이다. 괴물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대상인 동시에 타자이다. 두려움은 내면의 억압에서 비롯된다. 억압은 타자를 낳는다. 어떤 존재가 자신과는 전혀 다르다고 분리하는 과정을 타자화라고 하면, 괴물은 우리 내부에서 억압되고 분리된 존재이다. 그 존재가 기괴한 형상으로 눈앞에 나타나거나 내 뒤를 쫓아오면 괴물이 된다. 지금 우리 시대의 괴물은 바로 좀비이다.

좀비의 어원에는 여러 기원이 언급되지만, 부두교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팔려온 흑인들의 세계관, 혹은 노예가 된 그들 자신이 바로 좀비의 기원이다. 부두교에서는 지옥에 자리가 모자라면 죽은 자들이 좀비가 되어 돌아온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좀비는 지옥에서 귀환한 이들인 셈인데, 지옥에 자리가 모자라니 살아있는 자들의 땅이 바로 지옥을 대체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좀비의 귀환은 바로 지옥의 확장을 알리는 일이다. 그러니 좀비는 이 땅이 이제 지옥이 되었음을 알리는 존재이다.

이 땅은 왜 지옥이 되었을까? 죽은 자들은 이유 없이 돌아오지 않는다. 인간을 유혹하는 사탄이나 원한을 품은 귀신들에게도 당연히 목적이 있다. 단지 인간을 공포스럽게 하거나 죽이는 일이 그들의 목적은 아니다. 억압되거나 쫓겨난 존재들은 무언가를 되찾거나 알려주기 위해 우리 앞에 나타난다. 타자의 시선으로 세계를 본다고 해도 그 중심에는 역시 인간이 있다. 어쩌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한에서만 좀비의 존재는 유효하다. 인간의 상상력이 좀비를 만들어냈다면, 좀비를 가장 필요로 하는 이는 바로 인간이다.

 

2. 좀비와 인간의 경계

2000년대 대중문화의 많은 작품 속에 좀비들이 등장한다. 의지도 없고 고통도 모르는 채 썩어가는 시체인 좀비는 많은 영화와 소설, 드라마에서 인간을 공격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이들은 좀비를 피해 달아나다가 결국에는 좀비가 되거나 어렵게 살아남았다. 그 단순한 이야기가 여러 작품에서 계속 반복되었고, 그럼에도 사람들은 몇몇 이야기에 여전히 열광했다. 좀비영화의 최초 전성기는 지나갔지만, 새롭게 도래한 좀비르네상스를 맞아 다시 좀비매니아들이 모여들었다. 르네상스의 물결 안에서 20세기의 좀비영화가 보여주었던 메시지는 조금씩 확장되거나, 21세기에 맞게 변형되었다.

좀비영화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로 좀비와 인간의 경계에 대한 물음을 꼽을 수 있다. 좀비는 되살아난 인간으로 우리가 아는 괴물 중 가장 인간과 유사하다. 인간과 좀비를 나누는 경계 역시 허술할 수밖에 없다. 죽은 시체라 해도 인간이기는 마찬가지다. 좀비가 인간과 구분되는 지점은 죽었다 되살아나 움직인다는 점에 있다. 그렇게 되살아나 움직이기 위해 좀비는 살아있을 때 가졌던 능력 중 일부를 잃어버린다.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이나 말하는 능력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기능을 잃어버린 채 살아나 인간을 먹기 위해 공격하는 이들이 좀비라 불린다.

그런데 과연 사고하는 능력이나 말하는 능력의 유무만으로 인간과 인간 아닌 존재를 구분할 수 있을까? 인간은 가끔 질병이나 사고로 사고하는 능력이나 말하는 능력을 잃어버릴 수 있다. 갓 태어난 아기나 노인도 마찬가지로 사고하는 능력이나 말하는 능력이 미약할 때가 있다. 그렇다고 이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판단하지는 않는다. 좀비의 공격성을 경계로 본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좀비가 아님에도 인간을 공격하거나, 해를 끼치려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처럼 좀비와 인간을 구분하는 경계는 무척 허술하다. 어떤 좀비영화는 화려한 스펙터클 속에서도 그 점에 대한 질문을 놓치지 않는다.

 

3. 파괴된 일상의 회복

좀비는 우리가 살아있는 이 땅이 지옥이 되었음을 알리러 온 존재이다. 그들은 너덜너덜하고 삐걱대는 신체로 우리를 쫓아와 무언가 메시지를 전한다. 갈급한 형태의 메시지는 날카로운 이빨처럼 우리의 신체를 물어뜯는다. 우리가 미처 해독하고 이해하기도 전에 메시지는 바이러스의 형태로 퍼져나간다. 지금처럼 살아가다가는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 메시지는 강렬한 공포와 통증의 형태로 각인되어 급기야 우리 역시 좀비로 만들어버린다. 걷는좀비가 뛰는좀비가 된 시대, 좀비는 더 이상 우리의 각성과 변화를 기다리지 않는다.

좀비는 우리 자신인 동시에 우리에게서 버려진 존재들이다. 우리가 외면하거나, 떨쳐버리려는 무언가가 거기에 담겼다. 일부 영화나 드라마에서 좀비의 기원을 카니발리즘(식인 혹은 동족을 먹는 일)에서 찾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에서는 인육을 먹음으로써 좀비가 전염병처럼 창궐하게 된다. 카니발리즘은 많은 문화권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구분하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을 먹음으로써, 문명의 금기를 어김으로써 인간은 좀비가 되었다. 반면 대부분의 좀비영화에서 좀비는 같은 좀비를 먹지 않고, 인간만을 공격한다.

인간과 경계가 모호했던 좀비는 이 지점에서 인간과 다른 어떤 존재가 된다. 인간을 벗어난 존재,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춘 좀비는 이렇게 탄생한다. 잃어버린 사고능력이나 언어능력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인간들이 살아서 지옥을 경험하는 땅에서 더 이상 좀비는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지 않는다. 드라마 <킹덤>에는 좀비가 된 궁인들과 내시들이 궁 전체를 점령하고 왕족들을 공격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사고능력이나 언어능력으로 하지 못했던 일들이 좀비가 되면 가능해진다. 지옥으로 변한 일상은 회복되지 않는다. 사고능력과 언어능력을 잃은 좀비는 기존의 질서와 위계구조를 수용하지 않는다. 좀비는 회복이 아니라 일상을 전복하기 위해 온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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