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차이나] 알 수 없기에 끌린다, 번역어의 美2021-02-15 22:3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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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프리덤 어떻게 자유로 번역되었는가 4, 5장 발제.hwp (31.5KB)

《Freedom, 어떻게 自由로 번역되었는가》 제4장 미(美) - 미시마 유키오의 트릭, 제5장 연애(戀愛) - 기타무라 도코쿠와 ‘연애’의 숙명

 

미래세계를 다루는 SF영화에는 종종 자동통역기가 등장한다. 자동통역기는 귀에 꽂고 있기만 하면 상대방의 언어가 자동으로 통역되는 기계이다. 이 기계는 과연 서로의 언어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이를 테면 미묘한 비꼼과 놀림의 뉘앙스라던가, 한 지역의 오랜 문화가 녹아있는 관용표현이나 다른 문화 사람들은 들어본 적도 없는 욕설이라던가. 이 질문은 어떤 언어의 단어 하나하나마다 일대일로 조응할 다른 언어의 단어가 있을까, 라는 질문과 닿아있다. 이를테면 번역이라는 행위 자체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다. 그러니까 한 언어의 단어를 다른 언어의 단어로 바꾸는 식으로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는 일이 과연 가능하기는 한가?

 

이 책의 저자는 외국어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일본의 근대화에 주목한다. 근대화는 정치체제나 사회구조의 변화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메이지유신은 서구의 언어를 번역하는 중요한 기점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언어와 문화 역시 유신의 바람을 맞는다. 19세기에 일본에서 번역한 한자어가 중국과 한국에 그대로 전해지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어떤 면에서 이는 동아시아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격동의 시작이었다.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는 대로 언어는 자연스럽게 일대일로 조응하지 않는다. 번역은 조응할 단어를 새로 만드는 일에 가까웠다. 한 나라의 언어적·문화적 격변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책의 저자는 서구어의 일본어 번역을 서구인과 아프리카 원주민의 만남에 빗대어 이야기한다. 여기서 일본인은 문자를 사용하지 않는 아프리카 원주민에 비유된다. 아프리카 원주민 중 가장 먼저 문자를 사용하는, 아니 사용하는 척 하는 이들이 있다. 추장이나 서구인들과의 친분을 과시하고 싶은 이들이다. 문자를 이해할 수 없지만, 사용하는 척 연기하는 이들의 존재. 야나부 아키라는 일본에서 초기에 서구어를 번역했던 이들이나 번역어를 자주 사용했던 이들을 그렇게 본다. 이해하지 못하는 문자를 아는 척하며 종이에 빗금을 그어대는 이들로.

 

프랑스 철학자들이 말하는 에크리튀르(글쓰기)는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에크리튀르는 복잡한 글쓰기뿐 아니라 단지 종이에 선 하나를 긋는 일까지도 포함한다. 글쓰기-문자의 사용-는 그 자체로 권위를 드러내는 행위이다. 누군가가 이 에크리튀르를 본다는 일이 중요하지, 내용이 중요하지는 않다. 그런 의미에서 서구의 문자를 모르는 원주민 추장의 선 긋기나 일본 학자들의 서구어 번역은 하나의 에크리튀르이다. 또 번역어를 즐겨 사용하여 유행하게끔 만든 이들의 행위 역시 마찬가지로 에크리튀르이다.

 

번역어로 새로이 등장한 미(美)를 즐겨 사용했던 미시마 유키오의 행위 역시 에크리튀르에 포함된다. 미시마 유키오는 에크리튀르를 통한 권위를 극대화하기 위해 조금 더 복잡한 트릭을 이용한다. 이해하지 못해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불러일으키면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끌리게 되는 일본 번역어의 특징을 잘 활용한 트릭이다. ‘미’는 번역어로 쓰이기 이전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말이었으므로 일본인들에게 그 의미가 몹시 생소했다. 번역어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의미의 완성이 필요한데, 야나부 아키라는 특히 이 과정에 주목한다.

 

‘미’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인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들이 그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데는 ‘미’를 사용하는 지식인들의 태도도 한 몫을 했다. 미시마 유키오 같은 인물은 평소의 발언과 소설 안에서 ‘미’를 언급할 때 전혀 상반된 태도를 보였다. 평소에는 ‘미’가 쓸모없는 하찮은 존재인 듯 말하다가, 소설에서는 중요하고 무서운 존재인 듯 표현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다. 이런 트릭을 통해 ‘미’의 의미는 더욱 혼란스러워졌고, ‘미’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일본인들은 이 단어에 더욱 끌리게 되었다. 이런 혼란과 끌림은 일본 번역어의 중요한 특징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love의 번역어로 등장한 ‘연애’ 역시 이런 혼란과 끌림 속에서 일본인들에게 자리 잡았다. 이전까지 일본 사회에서는 love와 lust, 즉 애정관계에서 영혼과 육체의 문제가 분리되지 않았다. 반면 서구에서 love와 유사한 뜻으로 쓰이는 romance는 분명히 육체가 아닌 영혼의 문제를 담고 있다. romance는 기사도문학에서 언급되는 사랑을 말하며, 육체가 서로 멀리 있을 때 영혼의 사랑을 찬양하는 개념이다. 육체관계를 배제하면서 진행되는 이런 사랑의 서사는 성모 숭배나 십자군전쟁 등 기독교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만 수긍이 가능해진다. 이 특수한 사랑의 서사가 일본에 번역되면서, ‘정신적 사랑’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나타난다. 말하자면 ‘연애’는 번역어가 아니라 새로운 애정관계에 대한 정의인 셈이다.

 

이후 ‘연애’는 기독교도와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문화가 되었다. 이들은 ‘연애’를 사랑 이상의 무엇으로 포장하려 했다. 곧 ‘연애’는 서구에서 love가 뜻하는 의미보다 훨씬 좁은 의미로 축소되면서 일종의 상상적 영역으로 관념화되었다. ‘연애’는 한자어 ‘애련’과도 다르고 서구의 love와도 다른 개념이다. 당시 일본사회에서는 서구적 개념의 사랑 자체가 어려웠던 데다가, ‘연애’의 개념이 관념화되면서 더욱 현실의 연애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불가능한 ‘연애’는 일본의 현실을 재단하는 규범이 되었고, 더욱 많은 이들이 이 불가능한 ‘연애’에 감동을 느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연애에 바치는 수많은 찬사와 동경들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으리라.

 

“어떤 말을 증오하거나 동경하거나 할 때, 사람들은 그 말의 기능을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 말이 사람을 지배하고, 사람이 말에 이용당한다. 가치를 부여하며 바라봄으로써 그만큼 사람들은 말에 휘둘리는 것이다.”(62쪽) 야나부 아키라가 이 책의 3장에서 일본 번역어의 특징을 언급하며, 쓴 문장이다. 우리가 언어를 사용할 때는 언제나 정서와 가치판단의 문제가 끼어든다. 정서와 가치판단은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면 할수록 의미와 멀어지게 만든다. 언어는 권력의 도구인 동시에 도무지 길들여지지 않는 도구라고도 볼 수 있다. 누구도 언어라는 도구를 완벽하게 자기 의지대로 다룰 수는 없다.

 

다시 미래세계의 SF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대부분의 SF에서 미래에 국가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된다. 세계화의 물결 아래 국민국가라는 낡은 역할이 남아날 리가 없다. 국가가 없다면, 언어 역시 위기에 봉착한다. 국가가 없는 미래에는 서로의 언어를 통역하는 문제 역시 필요치 않을 수 있다. 통역이 아니더라도 언어는 사용 그 자체로 이미 변화의 과정에 있다. 에크리튀르는 권력의 도구인 동시에 혁명의 도구로도 기능한다. 종이에 선을 긋는 추장의 행위는 권력지향적인 동시에 그 권력을 폄하하며 조롱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우리가 미래에 모두 같은 언어를 사용하게 된다고 하여도, 그 언어에는 언제나 정서나 가치판단이 담기기 마련이다. 우리는 언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언어도 우리를 완벽하게 지배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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