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취투북] <노자가 옳았다> #5 - 정말 <노자>가 옳았을까?2021-02-02 16:5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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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zziraci/476


노자는 불친절한 책이다. 텍스트의 맥락을 이어갈만한 고리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물론 몇 가지 주제들이 반복되고 있지만 이를 잘 이해하려면 텍스트를 따로 해체하고 재조립해야 한다. 이런 까닭에 하이퍼텍스트로 보자는 한스-게오르크 뮐러(<도덕경의 철학>)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총 81장 약 5천여 자의 이 하이퍼텍스트를 가로지르는 고리들을 발견하고, 그 사이의 링크를 잘 찾아둔다면 <노자>의 본래 의미가 잘 드러날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노자> 텍스트는 오래도록 자유로운 해석의 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자>를 공부할 때면 서로 다른 번역본을 몇 개 가져다 놓고 이를 비교하며 보는 재미가 있다. 똑같은 문장을 전혀 다르게 풀이하기도 하고, 같은 식으로 풀이했다 하더라도 영 다른 식의 해설을 덧붙이는 경우도 있다. 


개인적으로 <노자>를 읽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사람을 경계한다. 우선 나의 감상과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어지러움, 혼란스러움, 복잡함에서 편안함을 느끼기란 어렵지 않나. 한편, 사유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편안하다는 것은 익숙하다는 것이고, 익숙하다는 것은 크게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철학은 불편함에서 출발한다.


공부하다 보면 권위 있는 해석을 참고해야 할 때가 있다. 그만큼 오래도록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기에 무시할 수 없는 까닭이다. 한편 신선한 해석이 반가울 때도 있다. 새로운 관점을 선물해준다는 면에서, 새로운 문제를 짚는다는 면에서 텍스트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곤 한다. 


개인적으로는 강신주의 <노자> 해석이 그랬다. '제국의 형이상학'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 <노자>를 통치술로, 나아가 형이상학적 사유를 펼친 텍스트라고 주장한다. 도올의 주장과 영 반대의 입장에 서 있는 셈이다. 


플라톤이 "폴리테이아"라는 제목으로 엄청난 양의 이상국가론을 썼는데, 그 국가론을 엄청난 느티나무 고목 전체에 비유한다면 노자의 이상국가론은 봄철의 냉이풀 한 닢밖에는 아니 될 분량이다. … 그 폴리테이아는 실상 내가 말하는 "형이상학적 폭력"의 원천이다. 

그러나 노자는 물, 허, 유악, 무위, 관용, 반자도지동, 문명의 축소, 절성기지, 절학무우와도 같은 아주 평화롭고 여유로운 소박한 가치를 전했다. (488~489쪽)


한 명의 독자로서 이 둘의 주장을 곁눈질하다 보면 과연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를 고민하다가 나중에는 누구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과연 무엇을 옳다고 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해결되지 않는 까닭이다. 글자 하나하나의 의미를 따져 본래 의미를 추적할 수도 있고, 텍스트의 맥락을 근거로 전체 의미를 구체화할 수도 있다. 그러나 <노자>의 시대는 너무 멀어 글자의 구체적 의미를 추적하기 힘들다. 이 텍스트의 맥락을 찾지 못하는 나는 도무지 <노자> 전체에서 부분으로 좁혀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결국은 도올의 <노자가 옳았다>를 읽으며 강신주 식의 접근을 물리칠 반론의 근거를 찾는 수밖에는 없는데 그게 잘 보이지 않는다. 도올 역시 <노자>가 정치를 논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것도 대국을 위한 논의가 들어있다. 


그러나 노자는 삶의 현실을 궁극적인 문제로 삼기 때문에 정치철학이 있고, 그의 법제에 관한 다양한 의견도 삶을 윤택하게 하려는 노력의 소산이다. (454쪽)
여기서 "대원大怨"을 맺는다든가, 원한을 화해시킨다고 하는 이야기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통치자와 피통치자인 백성 사이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축적태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 노자의 정치철학적 관심의 집요함을 엿보게 한다. (482쪽)
우리는 이미 60장, 61장, 66장 등에서 노자가 대국을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가에 관한 현실적 처방을 충분히 토론하고 있는 것을 보아왔다. 노자는 당대 세계질서의 평화는 대국의 올바른 세계질서감각과 국내정치운영방식에 좌우된다고 본 현실론자였다. (489쪽)


도올은 나아가 민중을 위한 정치, 민중의 텍스트로 <노자>를 소개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노자>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대립항을 보자. 성인과 백성, 천하와 만물, 이쪽과 저쪽의 구분이 있다. 이때 <노자>의 저자는 어디 서 있는가? 그는 어떤 독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가?


"백성이 비뚤어지고 정치가 어지러워지는 까닭은 모두 위로부터 말미암는 것이지 그 아래로부터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 백성은 결국 위를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 21세기 한국에도 똑같이 맞는 말이다. 일반 백성들은 결국 정치지도자들을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460쪽)


도올이 이야기하는 <노자>의 정치에 끝내 동의할 수 없었던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정치에는 정작 민중이 빠져있다. 민중을 '위한' 정치만 있을 뿐 민중에 '의한' 정치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결국 <노자>의 반문명주의건 평화주의건 '현실적인' 선한 통치자 하나를 바라야 하는 일이다. 


쟁의, 시위, 항의, 전복 등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연 오늘날 정치가 그렇게 단순한 것인지 되묻고 싶다. 물론 세간 사람들의 비판처럼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권력의 형태, 특정 정치인에 대한 선망과 과도한 기대감 등이 현실에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의 본모습인지는 따로 따져 보아야 할 문제이다. 


해석을 둘러싼 입장 차이를 차치하더라도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의문이 드는 부분이 드문드문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공산혁명이 맑스가 꿈꾸었던 "평등사회"를 도래시켰는가? 맑시즘이나 레닌혁명이 기여한 것은 "평등"에 대한 관념을 보편적 가치로서 인류의 심상에 심었을 뿐만 아니라, 지나친 불평등은 폭력혁명의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공포감, 그리고 혁명의 재현 가능성에 대한 역사적 체험을 남겼다는 데 있다. 그러나 "평등사회의 구현"이라는 측면에서는 지속가능한 실험이 되질 못했다.
이제 21세기는 민주라는 제도의 틀을 통하여 노자가 말하는 "손유여이보부족損有餘而補不足"을 실천할 수 있는 결정적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민중의 민주주의의식 성장, 자본주의적 불평등구조에 대한 심화된 반성, 그리고 평등의 당위성에 대한 인식, 그리고 자본주의는 사회주의적 성격에 의하여 수정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전망이 모든 사람의 상식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471쪽)


너무 표면적이고 순박한 주장 아닐까. 평등사회의 지속적 구현이 맑시즘을 폄하할 근거가 되는 것일까. 자본주의적 모순이 '손유여이보부족損有餘而補不足'이라는 잠언으로 해결 가능 한 것인가.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과연 자본주의적 불평등 구조를 해결할 수 있을까. 


서구 형이상학, 서구 철학 일변도의 상황을 비판하는 데서는 나름 절절한 고민이 엿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에게 불평등이 절실한 과제인지, 평화가 소중한 가치인지 모르겠다. 그의 말들은 그냥 미끄러져버린다. 당위적 방향성만 있을 뿐, 구체적인 실천으로도 심도 깊은 논의로도 이어지지 못한다.


"지금 이 원고를 쓰고 있는 내 방에는 전구 외에는 일체의 전자기기가 없다. 내가 쓰고 있는 이 원고도 종이 위의 잉크 넣는 만년필로 긁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위대한 인공지능이 있다 한들 이 내 머리와 손가락의 놀림은 대치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죽을 때까지 피씨자판을 두드리지 않을 것이다. (491쪽)


그의 고집은 잘 알겠다. 집필에 집중하기 위해서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이 문명의 모순과 대관절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컴퓨터가 문명의 이기利器인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고 그것이 문명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쳤는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코로나 19가 인류 문명의 거대한 전환점이 되리라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오로지 과거로만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돌아감이 단순한 회귀가 아니라 생성의 과정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무언가 다른 생각이 필요하다. 


<노자>는 과연 옳았는가? 이 두꺼운 책을 덮으며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권의 텍스트가, 한 명의 철학자가, 하나의 철리哲理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도리어 그런 기대야 말로 민중의 가능성을 불신하고, 일상 언어의 풍부함을 제거하는 게 아닐까. 


서양철학이 20세기로 접어들면서 변론가들의 춤판이 되고 말았는데, 이 지구상의 민중은 언어철학 전문가 이외에 어느 누구도 그 논리철학에 경복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곤jargon을 알아들을 수 있는 지들끼리 지지고 볶는 장난인 것이다. (497쪽)


jargon은 전문용어 혹은 특수용어라는 뜻이란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라 인터넷에 찾아보았다.  


화요일 저녁 취투부에서는 흥미로운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냥 참여해도 좋고, 책을 읽고 참여하면 더욱 좋은 유튜브 독서 컨텐츠 입니다. 
2월 9일부터는 <달콤 살벌한 한중 관계사>를 읽습니다.

https://zziraci.com/qutubook/hzg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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